악마와 프라다 사이에 선 현대여성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뉴욕 자체도 하나의 볼거리가 된다. 그것은 뉴욕이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세계 경제의 중심이면서, 또한 뉴요커로 대변되는 패션과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중심이 주는 화려함과 귀족적인 분위기의 기저에는 그것에 대한 욕망이 자리한다. 우리는 그런 삶을 욕망한다. 엄청난 고가에 사치일 뿐이라고 욕을 한다 해도 누구나 프라다를 입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사실 프라다를 입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걸 얻기 위해서는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다른 가치들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악마와의 거래다. 이것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드리아가 처한 입장이자 커리어 우먼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네 현대여성들은 물론이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이 처한 입장이다. 그녀는 악마와 거래를 한 후 프라다를 입게 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옷이라는 걸 알게된다. 그리고는 결국 본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영화 속 미란다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대로 이 영화는 ‘그것이 다(That's all!)’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이야기도 아닌 뉴욕의 이야기에, 단순해 보이는 스토리의 이 영화가 국내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한다는 사실은 영화 밖에서 그 흥행의 이유를 찾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이역만리 떨어진 이 곳과 뉴욕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그 지점에서 영화는 다시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관객들을 이 영화에 열광하게 하고 있는 걸까.
아바타 놀이 재미있으셨나요
앤드리아는 저널리스트의 꿈을 갖고 있지만, 패션으로 보면 전형적인 시골출신의 촌닭이다. 그러니 그런 촌닭이 세계 최고의 패션지, ‘런웨이’에 입성하는 것 자체에 관객들은 욕망에 마음을 내주게 된다. 그녀가 주인공인 까닭에 관객들은 그녀에게 자신을 감정이입시키고 앞으로 온갖 명품으로 변신할 그녀를(자신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이라는 것이 간교하여, 처음에는 자신과 너무 다른 세상에 있는 욕망을 거부한다. 자신을 내면적인 아름다움이란 굳건한 성으로 방어하면서 오히려 그 닿을 수 없는 욕망을 폄하한다. 영화는 이러한 관객들의 심리적 반응까지 고려해가며 극을 진행시킨다. 그러면서 그 욕망을 정당화해줄 계기를 기다린다. 그 계기를 주는 사람은 바로 나이젤이다. 그는 패션계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의 직장생활에서도 통용되는 단어를 끄집어낸다. 바로 ‘프로의식’이란 단어다. ‘당신은 프로가 아니야. 그러니 그런 걸 비판할 자격도 없어.’
이러한 질책은 기다렸다는 듯이 억압해온 욕망을 풀어내는 구실로 작용한다. 또한 이 곳은 패션잡지사이기에 이것은 단지 구실이 아닌 진짜 프로가 되려면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변신은 폭발적이다. 화면은 몇 초 간격으로 그녀의 옷을 바꿔 입혀준다. 구찌, 돌체&가바나, 로베르토 카발리, 마이클 코어스, 마크 제이콥스, 칼 라거펠트, 제이 멘델, 베르사체... 여성들이라면 꿈꿔왔을 명품들로 말이다. 앤드리아로 분신한 관객들은 이 장면들이 주는 아바타 놀이에 푹 빠져버린다.
뉴욕에서 우리나라까지의 거리만큼 큰 환타지
이 아바타 놀이에 중요한 것은 그 배경이 뉴욕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뉴요커의 입장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미국 개봉시 이 영화에 내려진 호평들은 주로 메릴 스트립의 명연기와 패션업계를 제대로 조명한 그 리얼함에 이유를 두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리얼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 관객들이 몇이나 될까. 물론 패션업계에 정통한 사람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본 이 영화는 ‘리얼함’보다는 ‘환타지’쪽에 더 무게를 두는데, 거기에 가장 큰 일조를 하는 것이 바로 뉴욕이라는 공간이다. 잘 생기고 부유하며 매너 있고 지성적인 남자들과 성공한 커리어 우먼들의 로맨스가 이루어지는 곳. 그 환타지의 실체를 우리는 이미 저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목격한 바 있다.
그 뉴욕이 가진 환타지의 기저에 또 한 가지를 포함시키자면 그건 우리가 사는 이 공간과의 거리가 될 것이다. 만일 이 공간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잔치였다면 그것이 ‘섹스 앤 더 시티’의 자유로운 성 담론이든, 이 영화의 명품에 대한 욕망이든 어느 것이나 현실이 개입했을 것이다. 그런 무거운 현실 속에서 환타지는 잘 생기지 않는다. 대신 뉴욕은 어떤가. 그 먼 거리에 있는 곳에서의 환타지는 마치 해외여행에서 보다 대담해지는 사람들의 편안한 공기가 있다. 남의 나라 얘기면서 잠깐 내 얘기로 차용하는 것. 여기에 뉴욕이라는 공간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주는 환타지의 힘이 있다.
보편적 정서로의 회귀
그런데 이러한 명품을 갖고 하는 아바타 놀이와 뉴욕이라는 공간이 주는 환타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속에는 보편적 정서를 자극하는 요소가 들어있다. 그것은 환타지의 진원지인 패션이라는 코드를 이 영화에서 뚝 떼어놓고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에게 리얼한 것은 패션이 아니라 직장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미란다 같은 악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메릴 스트립이라는 대배우의 열연에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많은 대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습관적으로 하는 몇몇 동작들과 시시때때 바뀌는 의상들을 소화하는 것만으로 영화의 한 축을 만들어버린다. 악마 같지만, 성공한 상사, 자신을 온통 구렁텅이로 빠뜨릴 것 같지만, 때론 그것을 통해 사회생활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만드는 상사, 어떤 때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다가도, 금세 다시 악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런 상사의 모습을 굳이 뉴욕이 아닌 곳의 사람이라도 공감하게 만들 정도로 리얼하게 연기해낸다.
이로 인해 우리는 환타지의 한 축에서 공감이라는 다른 축을 얻게 된다. 이러자 그저 환타지를 즐긴 후 극장을 빠져나가면 됐을 관객들은 공감의 틀 속에서 앤드리아의 선택(환타지와 현실, 여기서 환타지는 미란다며 현실은 미란다의 화려한 삶의 정반대축에 있는 앤드리아의 애인 요리사 네이트가 된다)에 함께 동참하게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이 삶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이로써 앤드리아의 한바탕 환타지는 면죄부를 받게 되고, 거기에 동참한 관객들 역시 극장을 벗어나면서 느끼게 될 현실의 허탈함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화는 경쾌해진다!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건 그만큼 욕망을 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려야한다는 걸 말한다. 성공하려면 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네 이 독한 현실 속에서 매일 악마와 직면해야 하는 현대여성들, 그들이 한 두 시간쯤 편안하게 환타지에 빠져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이 귀여운 악마와 만나는 게 뭐가 대수일까.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그 유쾌함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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