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개그가 저질? 몸 개그도 진화한다
슬로우 모션으로 잡힌 뱃살이 흔들리는 모습과 함께 소개되는 타이틀. ‘김병만은 살아있다’. 무단횡단을 하는 김병만에게 갑자기 차가 다가오자 깜짝 놀란 그는 펄쩍 뛰어 넘어진다. 어쩌면 흔히 길거리에서 보았을 수 있는 이 장면이 뭐가 우스울까. 하지만 희한하게도 이 장면은 말 그대로 뻥 터진다. 잠시 후 이어진 느린 화면의 다시 보기 때문이다. 천천히 잡혀진 그 장면에서는 우리가 순간적으로 지나쳤을, 김병만의 놀라는 얼굴이 리얼하게 잡힌다.
농구공을 밟고 순간 미끄러져 공 위에서 뱅그르르 도는 모습도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는 흔하디 흔한 몸 개그지만, 느린 동작으로 다시 보여지고 그 위에 영화 ‘불의 전차’의 주제가인 반젤리스의 ‘Chariots Of Fire’가 장중히 흐르면 말이 달라진다. 마술 무대 위에서 의자와 의자 사이에 머리와 발을 대고 누워 있는 김병만이 한쪽 의자를 빼는 순간 그냥 뚝 떨어질 때 커진 눈이 클로즈업된 느린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코미디쇼 희희낙락’의 ‘김병만은 살아있다’라는 코너가 보여주는 이 같은 몸 개그와 영상기술(?)의 만남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린 코미디 프로그램 ‘웃음충전소’에서 김병만은 ‘정의의 따귀맨’이란 코너를 시도했다. 이 코너의 백미는 따귀맨이 나타나 악당들을 따귀로 물리치며 마치 매트릭스처럼 정지된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장중한 내레이션 장면이다. 보통의 시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느린 화면이 포착해내는 살의 떨림 같은 것들이 몸 개그의 소재로 떠오른 것이다.
김병만의 몸 개그가 특별한 것은 이런 영상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데서 비롯된다. 김병만은 작금의 웃음이 얼마나 순간적인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개그콘서트’가 갖는 무대개그의 형식은 기승전결 없이 즉각적인 웃음을 요구한다. 개그들은 점점 짧아졌고 그 짧은 순간 몇 마디 말과 몇 개의 동작으로 웃음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니 이제 중요해진 것은 정황설명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순간포착이다.
“저거 개그야 무술이야?”할 정도의 몸 개그를 통해 단순하고 과장된 몸이 보여주는 순간적인 웃음을 포착해온 김병만이 ‘달인’이라는 짧은 개그에서 폭발력을 보여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찌 보면 ‘김병만은 살아있다’같은 코너는 바로 이 짧은 순간에 집착하는 개그가 이제 그 극점을 실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면으로는 개그의 진화된 형태라고도 부를 수 있는 김병만의 몸 개그는 그간 저질이라 불려왔던 몸 개그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사실 배삼룡의 개다리춤, 이주일의 수지큐처럼 우리네 코미디계의 거목들은 모두 몸 개그의 달인들이었다. 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방송가에 일어난 이른바 ‘저질코미디 시비’로 인해 이들이 물러나면서 사실상 몸 개그는 저질이라는 딱지를 달게 되었다.
하지만 배삼룡이 한 시사토크쇼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 느닷없이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전두환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술회한 것처럼 당시 저질코미디 시비는 당대 정치가 행한 진짜 저질코미디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코미디의 황제였던 이주일씨는 전두환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금지를 당했지만 명분은 그럴싸한 저질 슬랩스틱 코미디 척결을 내세웠다. 슬랩스틱이 저질이라면 찰리 채플린이 저질인가. 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로 만들어진 몸 개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그러나 후에 심형래 같은 개그맨들이 슬랩스틱으로 다시 인기를 끌면서도 여전히 남아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말 홍수의 시대에 몸 개그가 가진 가능성은 어쩌면 더 중요해진다. 글로벌화된 지구촌 문화가 만들어지는 시대에 언어를 뺀 몸 동작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있는 우리네 ‘논버벌 퍼포먼스’는 몸의 언어가 갖는 가능성을 잘 말해준다. 몸 개그는 저질이 아니며 이 시대가 요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언어일 것이다. 김병만은 그 언어의 중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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