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이 아닌 여친, 로맨틱 코미디 여주인공의 진화

 

SBS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지해수(공효진)는 도통 예쁜 척이라는 걸 모른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는 호불호를 확실히 얘기하고, 심지어 성적인 부분이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거침이 없다. 이것은 KBS <연애의 발견>에서 한여름(정유미)이라는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한여름은 처음 만난 강태하(문정혁)에게 호감을 드러내는데 전혀 눈치를 보지 않는다.

 

'<괜찮아 사랑이야>의 공효진과 <연애의 발견>의 정유미(사진출처: SBS,KBS)'

지해수와 한여름이라는 이 여성 캐릭터들은 최근 로맨틱 코미디가 그려내는 달라진 여주인공의 진화를 보여준다. 이들은 당당하고, 솔직하며 무엇보다 남자 캐릭터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과거 신데렐라나 캔디형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각자 자기만의 전문적인 일이 있고(정신과 의사, 가구 디자이너), 사랑에 있어서도 타인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들이다.

 

과거 남자 주인공 한 명에 두 명의 여자 캐릭터가 등장해 삼각관계를 이루던 것이 그래서 이들의 드라마에서는 정반대 상황을 만들어낸다. 즉 지해수든 한여름이든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해 그녀를 사이에 두고 쟁탈전을 벌인다. 물론 그들은 과거의 남자친구와 현재의 남자친구로 등장한다. 이 둘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양쪽을 저울질하는 쪽은 이제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가끔씩 이 여자 캐릭터들은 그래서 여우짓을 한다. 남자들을 도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유혹하기도 하면서 이른바 밀당을 하는 것.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들의 여우짓은 보기 불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엽게 다가온다. <연애의 발견>에서 한여름은 심지어 양다리를 걸쳐도 그 하는 짓이 전혀 불쾌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이들이 자기감정에 그만큼 솔직한 면모를 계속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런 상황이면 그렇게 마음가는대로 흘러가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

 

이렇게 로맨틱 코미디에서 여자 주인공의 면면이 달라지게 된 것은 과거처럼 남자들에게 쉽게 선망되는 신데렐라나 캔디형 캐릭터가 이제는 좀 구식이 되어버린 탓이다. 이제 빈부의 격차나 사회적 위치의 차이는 남녀 간의 사랑에 있어서(여전히 중요하긴 하지만) 가장 첫 번째 조건은 되지 못한다. 대신 먼저 두 사람의 화학작용이 벌어졌는가 하는 점이 중요해졌다. 이것은 현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드라마 속 판타지로는 이런 관계를 꿈꾼다는 얘기다. 빈부와 출신으로 구획되는 현실의 관계는 얼마나 지긋지긋한가.

 

흥미로운 건 이런 여성 캐릭터의 변화에 따라 이른바 로코퀸(로맨틱 코미디 퀸) 연기자들의 면면도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신데렐라형 스토리에서 여성 주인공의 연기자들은 그 첫 번째 조건이 예쁘장한 외모였다면, 이제 달라진 스토리 속 여성 주인공의 연기자들은 내면의 당당함과 솔직함을 표현해낼 수 있는 연기력이 그 첫 번째 조건이 되고 있다.

 

공효진과 정유미는 그래서 다른 듯 닮은 모습을 보여준다. 굉장한 미인형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귀엽고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이미지를 이 두 배우는 갖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범접할 수 없는 여신이 아닌 조금은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여친(여자친구)의 느낌을 주는 것이 이들의 강점이다. 달라진 로맨틱 코미디에서의 여성 캐릭터의 변화는 그래서 공효진과 정유미 같은 달라진 로코퀸 연기자 시대의 도래를 얘기하고 있다.

 

<괜찮아 사랑이야>가 깨는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

 

우리 사회에서 정신질환자들을 보는 시선은 편견 그 자체다. 그래서 심지어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어도 정신과를 찾지 않는 경우도 많다. 정신과에 대한 편견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으로 바라보면 <괜찮아 사랑이야>가 보여주는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각별한 시선을 읽어낼 수 있다. 거기에는 편견마저 감싸 안는 드라마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괜찮아 사라이야(사진출처:SBS)'

이광수가 투렛증후군 연기를 위해 각별히 노력한 이유 중에는 자칫 잘못하면 그 연기가 해당 질환자를 희화화시킬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던 것처럼 <괜찮아 사랑이야>가 정신질환자들을 소재로 다루는 방식은 극히 조심스럽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특정한 정신질환자들을 다룬다기보다는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도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마찬가지의 정신적 상처를 갖는다는 얘기를 건네고 있다.

 

장재열(조인성)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폭력으로 한강우(디오)라는 환상으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한다는 상황이 그렇다. 그는 모든 여성들이 보기만 하면 하트를 날리는 연예인에 가까운 추리소설작가다. 그런 그가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네 편견을 깨준다.

 

정신질환자라고 하면 어딘지 괴상하고 이상하게 생긴 무서운 존재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장재열 같은 멋진 남자는 그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멋진 남자다. 특히 이 드라마에는 캐스팅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예를 들어 지해수(공효진)가 찾아간 윤철의 부인은 정신분열 환자지만 외모는 평범 이상으로 출중하다. 해수가 재열에게 그녀를 가리키며 예쁘지 않냐?”고 묻는 대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조연으로 잠깐씩 등장하는 정신질환자들의 배역으로 지나치게 평범하거나 아니면 평범 이상의 외모를 가진 배우들을 캐스팅한 건 그래서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보인다. 정신질환자의 이미지? 혹여나 싸이코라고 부르는 그런 섬뜩함이나 불편함을 떠올렸다면 이 드라마는 오히려 그 반대를 보여준다.

 

이 드라마가 정신질환자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을 뒤집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지해수라는 정신과의사 역시 자신만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설정일 것이다.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정신과의사. 그러고 보면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크건 작건 자기만의 정신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하지만 다소 간의 부딪침과 소란이 있을지 몰라도 모두 문제없이 잘 살아간다는 게 이 드라마가 하고 있는 이야기다.

 

장재열과 지해수는 어찌 보면 둘 다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환자들이다. 하지만 지해수는 장재열이 무언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안고 살아가겠다는 그에게 대수롭지 않게 얘기한다. “그래도 필요하면 약도 먹고 상당도 받으라는 것이 고작이다. 어린 시절 엄마의 불륜을 지속적으로 목격한 후 남자와의 스킨십을 거부하는 지해수에게 장재열은 그냥 확 해버리라고 말하며 그녀를 계곡 물 속에 빠뜨려 버린다. 지해수는 그에게 그냥은 그냥이네.”라고 답하며 자신의 트라우마가 별게 아니라는 걸 점점 확인해간다.

 

<괜찮아 사랑이야>는 마치 <다모>의 한 대사처럼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 멀쩡해 보여도 우리는 모두 다소 아프게 저마다의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괜찮다는 것. 그것은 감기 같은 병일뿐이라는 것. <괜찮아 사랑이야>는 재열과 해수의 로맨틱 코미디를 빙자해 정신 질환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고, 결국 한 똑같이 아픔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들의 인간애를 얘기하고 있다.

 

<괜찮아>, CF처럼 살지만 상처투성이 현대인들에 보내는 위로

 

왜 하필 조인성이어야만 했을까. SBS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조인성이 연기하는 장재열은 마치 광고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가 집에 들어오면 마치 아파트 광고의 한 장면 같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면 냉장고 광고 혹은 생수 광고처럼 보이며,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면 자동차 광고 같다.

 

그렇게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조인성이라는 배우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 덕분이다. 그가 공개된 DJ 부스나 클럽에서 음악에 맞춰 살살 춤을 추기만 해도 순간 그 장면은 광고의 한 부분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조인성이 광고를 통해 대중들에게 이미지화된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그저 걷거나 숨만 쉬어도 광고 같은 완벽한 비주얼과 느낌을 보여준다.

 

하지만 광고란 일종의 환상이다. 사람은 결코 광고처럼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은 조인성이라는 배우가 가진 광고 같은 삶이 사실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는 아프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맨발로 피가 나도록 집으로부터 도망쳤던 인물이고, 아버지에게 맞는 엄마를 놔두고 도망쳤다는 것을 자책했으며, 그러던 어느 날에는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려 코피를 터트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 상처는 현재의 장재열의 주변을 여전히 맴돈다. 그래서 한강우(디오)라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투영된 가상을 만들어내고는 그를 때로는 다그치고 때로는 보듬어 안고 때로는 함께 웃으며 밤거리를 달리는 중이다. 광고 같은 삶? 그렇게 쿨하고 멋지게 보여 지고 싶지만 그것은 결코 장재열의 현실이 아니다.

 

그는 어쩌면 가족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아버지의 폭력에 맞서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형 장재범(양익준)은 그의 말대로 억울하게 동생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엄마는 동생을 살려내기 위해 형을 범인으로 지목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이 장재범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도 사실은 이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어느 게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투약하면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아미탈 같은 약물의 힘을 간절히 원할 정도로.

 

하지만 어느 것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가족이 모두 비극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만은 사실이다. 장재범이 교도소 철창 안에 갇혀 지내고 있지만 장재열 역시 마음의 감옥에서 복역 중이다. 그 둘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떨까. 이미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을 해버린 그녀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처럼 광고처럼 쿨하게 보이는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아픔 하나씩을 껴안고 살아간다. 홈 쉐어라는 어찌 보면 쿨해야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주거 환경 속에서 광고의 한 장면 같은 파티를 벌이는 그들이지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그들은 다시 자신을 기다리는 상처를 껴안고 잠들어야 한다.

 

당찬 정신과 의사 지해수(공효진)는 어린 시절 지속적으로 목격한 엄마의 불륜으로 일종의 남성 기피증을 갖고 있고, 멀쩡한 허우대에 쿨한 성격의 박수광(이광수) 역시 어린 시절 이유 없이 찾아온 투렛증후군으로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재혼해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며 아픈 이들을 돕는 조동민(성동일)도 마찬가지다. 껄껄 거리고 웃는 그의 얼굴 이면에도 어떤 허허로운 아픔 같은 것들이 어른거린다.

 

<괜찮아 사랑이야>는 마치 광고의 한 장면처럼 깔끔하고 쿨하고 괜찮아 보이는 현대인들의 삶 이면에 놓여진 결코 괜찮지 않은 아픔을 꺼내놓고는 괜찮다고 보듬어주는 드라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은 각각 힘겨워 하지만 의외로 타인에게 간단한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스킨십 기피증을 갖고 있는 지해수에게 그냥 하면 된다며 장재열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 그렇다. 지해수는 그 방법을 결벽증을 가진 환자에게 적용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치유하면서 동시에 그 주변 사람들까지 치유시켜준다.

 

겉보기에 우리의 삶을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광고 속의 삶을 꿈꾸고 어느 정도 성공한 이들은 그 삶을 현실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멀쩡해 보이는 삶의 진면목은 심지어 병을 앓을 정도로 아파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상처다. 사랑? 물론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줄 수는 없다. 다만 모두 상처받은 이들이라는 타인과의 공감과 그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교감이 그래도 우리네 삶을 괜찮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 <괜찮아 사랑이야>가 하고 있는 이야기다.

 

섹스 이야기를 그토록 입에 달고 다녀도 섹스 한 번 하지 못하는 스킨십 거부증을 갖고 있는 지해수와 연예인인지 작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장재열의 사랑은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게 희망이자 위안이 될 지도 모른다. 화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없다. 다만 괜찮다고 애써 말하며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그래서 더 아름다워 보인다.

 

신데렐라 없어도 더 쫄깃한 '응답1994'의 멜로

 

멜로는 신데렐라가 있어야 된다? 적어도 <응답하라 1994>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상속자들> 같은 드라마가 초거대 재벌가들 사이에 들어간 신데렐라 이야기로 너무 뻔하다는 비판을 받는 반면, <응답하라 1994>는 신데렐라 없고 심지어 촌스럽게까지 보이는 멜로만으로도 오히려 시청자들의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응답하라1994(사진출처:tvN)'

과거 <시크릿 가든>의 현빈과 하지원이 그랬고, <최고의 사랑>의 차승원과 공효진이 그랬듯이 잘된 멜로의 연기자들이 주목받는 건 당연한 일. <응답하라 1994>의 멜로는 정우라는 배우에 대한 신드롬을 만들고 있고 또한 늘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던 고아라까지 매력적인 연기자로 재탄생시켰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처럼 촌스런 멜로의 주인공들이 이토록 주목받게 된 것은.

 

<응답하라 1994>는 <응답하라 1997>이 그랬듯이 현재의 여주인공이 과거 1994년의 어떤 인물과 결혼을 했는가를 찾는 다소 단순한 멜로를 그린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멜로가 의외로 힘을 발휘한다. 누가 누구와 만났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떻게 관계가 발전됐는가 하는 점은 마치 첫사랑의 추억담처럼 우리를 아련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친오빠처럼 다가와 점점 가슴 뛰게 만드는 오빠로 느껴지게 되는 쓰레기 정우나, 그저 하숙집을 들락거리다 점점 가까워지게 되는 칠봉이 유연석은 그 설정 자체가 신데렐라 멜로와는 다른 <응답하라 1994>의 특별한 멜로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은 연세대라는 괜찮은 학벌의 소유자에다 직업적으로도 향후 의사가 될 의대생이거나 프로야구의 에이스가 될 야구선수다.

 

이것은 나정이(고아라)네 하숙집에 들어와 그녀와 장차 결혼할 지도 모를 다른 후보군들도 마찬가지다. 해태(손호준)는 순천시 버스회사의 막내아들이고, 빙그래(바로)의 부모는 충북 최대 규모의 양계장을 운영하며, 삼천포(김성균)는 한번 나가면 기름 값 1500은 드는 배를 가진 집의 아들이다. 물론 이들은 초재벌도 아니고, 드라마는 오히려 이 ‘잘사는 촌놈들’이라는 설정을 신데렐라 이야기로 활용하려 들지도 않는다. 유머 코드라면 모를까.

 

이들 촌놈들이 상경해 벌이는 멜로는 특별할 것 없는 당대 대학생들의 그것이다. MT를 가고 미팅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팬클럽 활동을 하며 하숙방에서 술내기 게임을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그들이 보여주는 멜로란 오지 않는 삐삐를 밤새워 기다리거나 게임을 빙자해 뽀뽀를 하거나 혹은 아플 때 꼭 껴안아주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등장하는 그 흔한 결혼 반대하는 부모들도 보이지 않고 백화점을 통째로 쇼핑하듯 과시하는 남자의 모습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하라 1994>의 멜로가 그 어떤 신데렐라 스토리보다 쫄깃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멜로 속에 존재하는 평등한 시선과 특유의 공감대 덕분이다. 이 드라마에는 1994년의 공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어딘지 촌스럽고 능숙하지 못한 인물들의 행동들이 오히려 멜로를 더 아련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정이를 좋아하면서도 표현은 친오빠처럼 무뚝뚝하게 던지는 쓰레기가 그렇고, 또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애써 속내를 감추려는 칠봉이가 그렇다. 해태와 조윤진(도희)의 관계를 보라. 그들은 대부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면서 가까워진다.

 

<응답하라 1994>가 신데렐라 이야기 없이도 더 아련한 멜로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1994년이라는 과거의 한 지점이 가진 힘 때문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 그것도 첫 사랑의 추억이 있는 그 청순의 한 기억이란 현실적인 것과 일정부분 거리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첫 사랑의 설렘에 집안 형편이나 학벌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것은 또한 어쩌면 1994년만 해도 지금처럼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초재벌이 남자 주인공으로 나와 거의 하녀처럼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을 보호해주는 이야기는 그것이 판타지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졸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돈이 많으면 많았지 그것이 사랑도 넘을 수 없는 계급이 되는 현실, 얼마나 치졸하고 치사한가.

 

그래서 이러한 양극화로 인한 수직적인 계급구조가 잘 보이지 않는 나정이네 하숙집에서 벌어지는 수평적이고 평등한 멜로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더 큰 판타지로 다가온다. 돈이나 현실이나 집안이나 학벌과 상관없이 누군가에 대해 진정으로 가슴 설레며 하는 사랑.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 사랑은 그러나 심지어 치사한 신데렐라 스토리에마저 빠져들게 만드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랑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요즘 청춘들은 학비 마련하랴 취업 준비하랴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응답하라 1994>가 보여주는 이 너무나 편안하고 때로는 낭만적으로 여겨지는 청춘과 사랑이 왜 판타지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양극화를 더 첨예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멜로의 극성을 만들어내는 신데렐라 스토리보다 <응답하라 1994>의 평범한 멜로가 더 강력한 이유다. 양극화 자체를 지워버린 완전한 평등의 멜로라니. 대단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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