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재난영화, <연가시>의 경쟁력

 

영화 <괴물>에서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괴물보다 더 끔찍한 공권력의 문제였다. 어찌 보면 진짜 괴물은 재난에 대처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자리보전이나 이익에만 급급한 공권력이었다. 그래서 재난에 직면한 국민들을 지키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가족 같은 혈연 공동체에 의지하게 된다. 괴물에게 잡혀간 어린 소녀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건 그 가족들뿐이다.

 

 

'연가시'(사진출처:(주)오죤필름)

재난영화가 국가기관이 아니라 가족에 집중하는 건 <괴물>만이 아니다. <해운대> 역시 쓰나미가 밀려오는 그 시간들 속에서 오로지 가족을 조명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결국 이 재난영화에서는 쓰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가족애가 더 중요하다. 최근 우리네 영화에서 시도되고 있는 이른바 한국형 재난영화의 특징을 꼽으라고 하면 바로 이 ‘가족’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새로 개봉한 <연가시>도 마찬가지다. 한때 곱등이와 연가시 이야기로 공포를 자아내게 했던 바로 그 기생충이 소재다. 본래는 동물의 몸에 기생하지만, 인간의 몸에 기생하게 된 변종 연가시가 전국으로 퍼져나감으로써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재난 상황을 다루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재난보다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공권력의 문제가 등장한다. <괴물>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연가시보다 재난 대처능력이 떨어지는 공권력에 의해 죽어나간다.

 

그래서 <연가시>를 비롯한 이른바 한국형 재난영화를 보다보면 그 안에 들어있는 몇 가지 장르의 결합을 느낄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공포다. 어디선가 나타난 괴생물체와 그로 인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평온한 일상을 공포로 일그러뜨린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두 번째 발견되는 건 가족극이다. 그 공포 상황 속에 놓여진 가족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은 보는 이들을 눈물짓게 만든다. <연가시>는 그 이야기 속에 힘겨운 가장의 스토리를 녹여서 이 부분이 더 극대화된다.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가장으로서의 애정이 묻어나는 김명민의 목소리와 평범하지만 그런 가장을 끝까지 믿어주고 버텨내는 문정희의 대사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 닿는다.

 

하지만 이 공포의 살 떨림과 가족극의 눈물을 넘어서고 나면 세 번째로 발견되는 것이 사회극이다. 도대체 국민들을 보살펴줘야 할 국가가 하는 짓이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가족들끼리 서로 살기 위해 재난 앞에 맞서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공분을 자아내게 한다. 도대체 왜 저들이 저렇게 사투를 벌어야 하는가. 이것이 한국형 재난영화가 주는 감정선이다. 우리는 떨다가 울다가 분노한다.

 

알다시피 우리네 사회는 재난과 사고에 둔감하다.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지하철 방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엄청난 무고한 인명이 죽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간다. 제대로 된 예방책이나 세워두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작년 물 폭탄을 맞은 서초동에 마치 둑이 터지듯 쏟아져내려온 산사태에 의해 벌어진 재난은 한 해가 지나 다시 장마철을 맞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복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이러니 우리네 재난영화들이 다루는 것이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가 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괴물 그 자체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는 전언.

 

<연가시>가 <괴물>이나 <해운대>의 재난과 달라진 지점은 그 안에 경제 불황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일 게다. 이 주식투자로 한 방에 삶이 꺾어져 버린 가장 재혁(김명민)은 영화 내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뛰어다닌다. 온 몸이 흙투성이 땀투성이에 새까만 재혁의 손바닥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우리를 뭉클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가장의 끝없는 동분서주가 우리네 서민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 이 경제 불황의 그늘을 표징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떨다가 울다가 분노하게 만드는 우리네 재난영화의 특징은 서구의 재난영화들이 보여주는 스펙터클보다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각적인 충격이 아니라 감정적인 충격이다. 아마도 한국적인 상황이 만들어낸 이 한국형 재난영화의 특징은 그래서 독특한 지점을 획득한다.

 

바로 이점은 <스파이더맨>이나 <다크나이트> 같은 해외의 블록버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 속에서도 <연가시>가 가진 흥행 가능성을 점치게 만든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 한국형 재난영화가 어쩌면 그 어떤 블록버스터들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로열패밀리', 그 인간과 괴물의 증명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까. '인간의 증명'이라는 원작을 갖고 있는 '로열패밀리'의 질문이다. 이 드

'로열패밀리'(사진출처:MBC)

라마는 '로열패밀리'라는 자본의 기계가 되어있는 정가원 속에 스스로를 괴물로 치부하는 이질적인 존재를 통한 화학실험을 선보인다. 이 화학실험의 목적은 그 안에서 진정으로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가를 추출해내는 일이다.

구박받는 며느리에서 18년 간을 절치부심 반전을 준비해온 김인숙(염정아)의 행보는 숨겨져 있던 정가원 사람들의 실체를 드러낸다. 가족관계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업을 연상시키는 정가원의 자본으로 말끔한 표면 아래 숨겨져 있던 더러운 비밀들이 김인숙이라는 촉매제에 의해 마구 밖으로 끄집어내진다. 가족이 아닌 그저 관계로서 아무런 감정조차 없이 살아가는 자본 기계로 전락한 정가원 사람들은 때론 목적을 위해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사이코패스의 면모까지 드러낸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인간 냄새를 풍긴 김인숙의 남편 조동호(김영필)가 의사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우연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그나마 남아있던 정가원의 온기를 빼앗아버린 셈. 남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금치산자로 몰아 아들까지 빼앗으려하는 공순옥 회장 앞에서 김인숙의 변신은 시작된다. 무표정하게 감정을 숨기며 살아오다 어느 날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는 김인숙을 정가원 사람들은 '괴물'이라 부르지만, 이것은 어쩌면 반어법인 지도 모른다.

즉 감정 없이 사이코패스처럼 살아가는 정가원 사람들은 김인숙에게서 인간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을 지도.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결국 그 괴물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괴물로 보게 만드는 위험한 존재가 아닌가. 결국 조니의 죽음을 김인숙의 살해로 몰아 그녀를 끌어내리려던 공순옥 회장이 백기를 들게 된 것은, 그녀가 들고 온 자술서가 사실은 정가원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스스로 괴물이라 하지 않지만, 자술서까지 들이대며 스스로 괴물임을 밝힌 김인숙은 그래서 인간임을 증명하는 마지막 한 자락을 손에 쥐게 된 셈이다. 드라마는 김인숙이 불행한 과거를 지우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조니마저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해 몰아가고, 스스로도 자신이 조니를 죽였다고 밝히게 만들지만, 바로 그것이 그녀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대목이 된다. 사실은 자해한 조니를 살리려 노력했지만 살리지 못했다는 그 자책감이 스스로를 살인자로까지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그 사실. 그것이 김인숙이 괴물이 아니라는 증명이다.

결국 마지막 헬기에 한지훈(지성)과 함께 올라 그에게 자신을 구원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김인숙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승리자가 된다. 그것이 죽음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인지 모를 열린 결말로 드라마는 끝나고 있지만, 그 끝을 받아들임으로써 김인숙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셈이고, 반대로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혼자 갈 수 없다"며 김인숙을 헬기에 태워 죽음으로 내몰려는 공순옥은 괴물임이 증명된 셈이니까. '로열패밀리'의 희비극은 바로 이 죽음 앞에서 어떤 선택이 인간임을 증명하고, 또 어떤 선택이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올드보이’, ‘괴물’을 잇는 ‘추격자’의 영웅

‘추격자’에 대한 칸의 반응이 심상찮다. 도대체 ‘아이언맨’처럼 몸에 잔뜩 무기들을 장착하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영웅도 아니고, ‘인디아나 존스’처럼 채찍 하나와 명석한 두뇌, 그리고 놀라운 순발력으로 고대의 유물들을 찾아내는 영웅도 아닌, 그저 보도방 여자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이 중호(김윤석)라는 소시민적인 영웅의 어떤 점이 세계의 이목을 매혹시켰을까.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가 내세우는 영웅은 역시 서민이다. 그것도 평범 이하거나 때론 비열하기까지 한 서민. 이 평범한 서민들은 어느 날 비범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점점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다가 갑작스런 납치 감금으로 15년 동안의 감금을 당하며, ‘괴물’의 강두(송강호)는 순식간에 한강에 출몰한 이상한 괴물에게 금지옥엽 딸을 납치 당한다. ‘추격자’의 중호 역시 평범한 보도방 사장에서 괴물 같은 살인마에게 납치된 미진(서영희)을 찾기 위해 달리고 달리는 추격자가 된다.

즉 이들 우리네 서민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평범한 일상을 깨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대개가 납치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했던 것이 (납치로 인해) 사라질 때, 이 서민들은 그 소중한 평범함을 찾기 위해 뛰기 시작한다. 그것은 오대수에게는 세월 속에 지워진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이며, 강두에게는 딸이고, 중호에게는 미진이다. 그 소중함이 가족이나(유사가족을 포함) 자기 자신 같은 일상의 가치를 조명할 때, 이 서민적 영웅은 휴머니티를 좇는 영웅이 된다. 거창한 것이 아닌 최소한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래야 할 만한 일을 하는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종종 이 영웅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섭다는 점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자신을 감금한 적을 찾아다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지만 결국 진짜 적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괴물’과 ‘추격자’의 강두네 가족과 중호는 눈에 보이는 괴물이나 살인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런 괴물들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공권력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사회적인 메시지는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들만이 가진 특징이다.

그리고 이 서민적인 영웅들은 헐리우드의 영웅들과는 상반되게 미션에서 실패하게 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적은 잡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그렇게 뛰게 만들었던 소중함을 잃고 만다는 점에서 실패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자신의 과오를 알아채고는 기억을 지워버리려 하고, ‘괴물’의 강두나 ‘추격자’의 중호는 결국 괴물 혹은 살인마에게서 납치된 그녀들을 구해내지 못한다. 바로 이 실패의 지점은 이 영웅들의 행보에 사회적 메시지와 함께 리얼리티를 구축해내는 힘이 된다.

이 결과가 아닌 과정을 주목하게 만드는 영웅들은 헐리우드의 영웅들과는 색다른 면모를 갖게된다. 영화는 끊임없는 추격의 과정을 그리는데 목표의 성공과는 상관없이 바로 그 추격의 이유, 즉 휴머니티가 이들 영웅의 특징이 된다는 점이다. 전 지구적 담론으로 허황된 영웅상을 정치적 논리와 섞어 세계에 배포하는 헐리우드식의 영웅을 유치하다거나 식상하다고 느꼈던 관객이라면 이 지극히 가족적이며 자성적인(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다는 면에서) 반영웅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에 쏟아지는 일련의 세계적인 관심은 이제 새로운 영웅상의 탄생을 예고하는 징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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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좇는 ‘추격자’, 그 흥행의 이유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물결. 인파로 복잡한 거리에서 만나는 남녀. 그리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차. 골목길. 담벼락에 대충 세워지는 차. “차를 저렇게 세우면 어떻게 하냐”는 사내의 말, “금방 나올 건데요”하는 여자의 답변. 하지만 이어지는 담벼락에 오래 방치된 듯 보이는 차에 가득 달라붙어 있는 출장안마사 명함들. 이 짧지만 함축적인 영상의 연결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과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해 설명한다. 누군가 사라졌고, 그 사내는 여자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 것.

원경에서 잡을 때는 일상적인 거리의 풍경이었던 것이 차츰 가깝게 심도를 잡아가자 특정한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영상 구성의 효과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쳤던 거리에서 어쩌면 우리가 희대의 살인마와 옷깃을 스쳤을 지도 모를 아슬아슬함을 전해주기도 하며, 그렇듯 타인으로서 극장문에 들어선 관객을 영화 속 사건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이 원경에서 점점 가까운 곳으로 옮아가는 카메라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장치다. 그리고 거기에는 출장안마소를 차려놓고 여자를 파는 비열한 인간, 엄중호(김윤석)의 시선이 겹쳐진다.

사라진 여자를 엄중호가 좇는 첫 번째 이유는 돈 때문이다. 그에게 여자란 돈을 벌어다주는 존재 그 이상이 아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손님에게 보내진 미진(서영희) 역시 마찬가지. 엄중호가 미진과 막연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미진을 찾아 헤매던 엄중호는 미진을 근거리에서 보게되고, 미진이 희대의 살인마에게 붙잡혔다는 심증이 갈수록 마음은 더 절박해진다. 그 근거리에서 엄중호는 돈으로서의 미진을 좇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미진을 좇게 된다. 이것은 엄중호의 시선에 포획 당한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범인을 추격하는 엄중호가 쉬지 않고 달릴 때, 그 마음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전이된다.

카메라가 점점 원경에서 근경으로 다가가면서 엄중호의 시선이 달라지듯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지나치듯 보았던 인물들을 역전시켜 놓는다. 이 영화 속에는 엄중호, 지영민(하정우), 그리고 경찰, 이렇게 세 부류가 부딪치는데, 초반부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인상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정반대로 바뀌어 나간다. 한없이 비열해 보였던 엄중호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발견하게 되는 반면, 겉보기에 마음 여린 사내로 보이던 지영민은 희대의 살인마로 변신한다. 경찰은 그 직업상 무언가 사건해결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만 상황은 거꾸로다. 경찰이 하는 일이란 엄중호가 기껏 잡아놓은 살인마를 풀어주는 것이다.

이 역전된 상황은 저 ‘괴물’이 보여주었던 상황을 반복적으로 그려낸다. 괴물(지영민)이 있고, 괴물에게 딸을 잡혀 애타게 괴물을 추격하는 강두네 가족들(엄중호)이 있는데, 오히려 이를 도와주어야 할 경찰은 강두를 감금해버리는 상황. 따라서 이 유사한 구조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가진 문제의 본질은 늘 같다는 것이다. 무능한 정부, 그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 그리고 그 괴물과 정부 양쪽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서민이 구조의 본질이다.

그러나 ‘추격자’가 ‘괴물’과 다른 점은 괴물의 실체가 사람이라는 점이다. 한강변으로 뛰쳐나와 사람들을 습격하는 괴물은 나타나기만 해도 그것이 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도심 속, 그 사람들 속에 꼭꼭 숨어있는 지영민이라는 괴물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원경에서 근경으로 지영민을 추격하는 것이고, 그 추격하는 엄중호를 쫓아다니는 것이며, 그 엄중호의 변해가는 마음을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추격자’가 ‘살인의 추억’을 닮았다고 하지만 ‘추격자’는 ‘괴물’의 구조 또한 닮았다. 나홍진 감독이 밝힌 바대로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은 ‘추격자’의 전범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추격자’에 대한 평단과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 또한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닮은 것은. 한국영화가 어렵다는 이 시기에 불쑥 나타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괴물 같은 나홍진 감독의 출현이 반가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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