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 한대수의 멸망의 밤’, 그가 꿈꾼 행복의 나라로

 

X같은 세상 다 썩어가네. 총알은 튀고 또 피바다 되어- 비린내 나는 이 끝없는 전쟁, 공해와 질투, 또 오해와 권투. 돈 좇아가다 다 지쳐버렸네. 어린애들은 다 미쳐 버렸네.’ 한대수가 2000년에 발표한 ‘Eternal sorrow’에 수록된 멸망의 밤은 쌍스럽게도 욕으로 가사를 시작한다. 그에게 세상은 욕이라도 해야 될 어떤 곳이다. 그 곳은 피 비린내 나는 끝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고, ‘이웃사랑을 비웃는 사기의 천국이다. 종교가 사람을 구원하기는커녕 바로 그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쓰러진 사람 옆구리를 차 창자가 터진전사들을 만드는 곳이다. ‘지옥이 따로 있나. 바로 여기 있지.’

 

'한대수(사진출처:서울뮤직)'

멸망의 밤이 그러하듯 한대수의 노래에는 거침이 없다. 마치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들여다보며 툭툭 던지는 이야기 같다. 우리 같이 세상 안에서 생존해내기 위해 무수한 분노와 좌절감을 꿀꺽 삼키며 살아가는 서민들은 그래서 한대수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 한 구석의 억눌렀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듯한 기분을 갖게 된다. 한대수 하면 지금도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물 좀 주소라는 곡이 그렇고 행복의 나라로라는 곡이 그러하다.

 

흔히들 한국의 밥 딜런으로 한대수를 이야기하곤 하고 실제로 그가 밥 딜런의 영향을 받은 국내 포크 가수들 중 한 명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실 밥 딜런의 영향을 받은 국내 포크 가수들은 한대수 이외에도 꽤 많다. ‘담배라는 절창을 불러낸 서유석도 있고, 낮은 읊조림으로 세상을 날카롭게 노래한 김민기도 있으며, 미국적 포크를 우리식의 민요로 수용해낸 양병집이나 정태춘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대수가 주목되는 건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을 지금까지도 가사에 녹여 부르는 현재진행형의 가수라는 점 때문이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우리가 반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이 되는 건 우리네 가요계에서 한대수 같은 거장이 저 밥 딜런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었던 현대사들 때문이다. 음악은 삶의 즐거움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또한 세상의 부조리를 시적 언어로 비판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인물이 밥 딜런이 아니던가. 그가 부른 ‘Blowing in the wind’‘The Times They are a-Changin’ 같은 반전음악은 그래서 시대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우리네 풍토에서 이처럼 세상의 부조리를 노래했던 가수들은 한때 블랙리스트가 되어 핍박받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네 가요를 보면 너무 균형을 잃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한류의 첨병처럼 되어 있는 아이돌 음악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 그쪽으로만 치우쳐져 있다는 것이다. 이 흐름 속에서 가사의 무게감은 갈수록 사라지고 표피적으로 흘러버린다. 한대수가 저 멸망의 밤에서 노래한 돈 좇아가다 다 지쳐버렸네라는 가사가 새삼 가슴에 박히는 건 그래서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져 나오면서 대중들은 허탈감에 빠져 있다. 그 허탈감의 정체는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가 누구의 손에 의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그 자괴감, 배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최순실 게이트는 안타깝게도 아이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세월호 참사를 그대로 닮았다. 만일 밥 딜런이 지금 여기 살아가는 한국인이었다면 어떤 노래를 했을까.

 

김용익 민주정책연구원장은 밥딜런이 한국인이었다면 받을 것은 블랙리스트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대중문화인들의 블랙리스트를 쓰고 있을 때 밥 딜런은 귀로 듣는 시를 쓰고 있었다. 그 시가 세상을 바꿔왔다. 이제 청와대만이 아는 대답을 듣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표도 정부는 학문과 문화예술을 지원하되 간섭해선 안 된다. 블랙리스트 따위는 있어선 안 된다고 했다.

 

목마른 세상, 자꾸만 한대수의 노래들이 다시 들리는 나날들이다. 우리는 그가 부른 멸망의 밤을 겪고 있다. 이 어둠을 통과해 그가 꿈꾸던 행복의 나라로갈 수 있을까. ‘물 좀 주소의 그 갈증이 그 어느 때보다 공감되는 시절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한대수가 필요하다.

<피리부는 사나이>, 우리의 이야기 같지가 않다

 

사실 이 정도 되면 손에 땀을 쥐고 봐야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tvN 월화드라마 <피리부는 사나이>에서는 그다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은행강도 사건이 발생했어도, 시위현장에 한 사내가 가스통과 기름을 가득 채운 차로 돌진해도, 심지어 형사인 공지만(유승목)의 아들 정인(곽동연)이 피리부는 사나이의 전화를 받고, 지만이 그 피리부는 사나이가 보낸 아들을 찾으러 오라는 협박사진을 받았어도, 또 알고 보니 그것이 정인의 자작극이었고 또 그 뒤에는 피리부는 사나이인 척 한 성찬(신하균)이 있었다는 게 밝혀졌어도 그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피리부는 사나이(사진출처:tvN)'

도대체 왜 이럴까. 화면 상에서는 긴박하게 인물들이 움직이고 사회의 부조리가 만들어낸 분노에 가득 찬 사람들이 제 몸을 내던지며 그 부조리를 토로하고 있는데도 그다지 큰 공감대가 생겨나지 않는다. 또 그들의 이면에 피리부는 사나이가 휘파람을 불며 나타나 배후조종을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다지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고, 이를 막기 위해 치밀한 두뇌싸움으로 협상을 벌이는 성찬과 명하(조윤희)의 고군분투가 그리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혹시 종영한 <시그널> 탓이 아닐까. 워낙 긴장감도 높았고, 또 그 간절함이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던 <시그널>이었다. 사실 무전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다는 판타지가 들어 있는 <시그널>이 이토록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거기 뛰고 또 뛰는 형사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몰입시켰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피리부는 사나이>에는 그런 판타지 설정도 없다. 그런데 왜 이다지도 몰입이 안 되는 걸까.

 

그 첫 번째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건들에 대한 실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행강도 사건은 물론 우리에게도 종종 벌어지는 일이지만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건의 정경은 미국 어디쯤에서 벌어질 법한 그런 장면을 보여준다. 일단 강도가 어디서 구한 것인지 총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실감이 떨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회에 대한 분노를 가진 누군가를 배후조종해 폭력을 일으키는 피리부는 사나이라는 존재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 이 드라마에 대한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이유다. 만화에는 어울릴 법 하지만 드라마처럼 좀 더 리얼리티를 보여줘야 하는 장르에는 어딘지 너무 만화적으로 느껴지는 캐릭터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시그널>이 그랬던 것처럼, 피해자들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위해 그들이 처한 저간의 사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는다. 은행강도가 출연하지만 그가 왜 은행을 털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뒤에 피리부는 사나이의 조종이 있었다는 것이 있을 뿐, 그 은행강도가 어떤 사회적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대신 이 드라마는 협상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성찬과 명하에 더 집중하고 있다. 협상을 통해 소통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멋진 협상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좋지만, 마치 그것이 그들의 능력을 자랑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 이상을 주지 못한다. 피해자와 희생자가 겪는 고통을 마치 내 일처럼 여기며 심지어 목숨을 거는 휴머니스트 이재한(조진웅) 같은 형사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현실감이나 정서적 공감대 같은 것들이 잘 느껴지지 않는 <피리부는 사나이>는 우리 이야기 같지가 않다. <시그널>이 가장 잘 했던 그 부분이 빠져 있는 것. 이것이 <피리부는 사나이>가 가진 취약점이 아닐까. 그게 없어서 사건들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도 그다지 긴장감이나 놀라움이 느껴지지 않는 게 아닐까. <피리부는 사나이>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검사외전> 강동원, 복수극 속에서 그가 빵빵 터트린 이유

 

<검사외전>은 어떻게 설 명절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5백만을 훌쩍 넘기는 관객을 동원하고 있을까. 사실 이 스토리는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흔하디흔한 복수극.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 검사가 그 안에서부터 치밀한 계획 하에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사진출처: 영화 <검사외전>

장르적 유사성이나 이야기 구조상으로 보면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크게 다른 느낌이 아니다. 거기에는 부패한 권력이 있고 부조리한 법 정의가 있으며 무고한 희생자가 있다. 사회 현실의 답답함을 영화 속으로 끌어와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 <검사외전>은 거기에 충실한 오락영화다.

 

아무리 좋은 것도 여러 번 보게 되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야기 구조나 정서에 있어서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검사외전>은 만일 그것 만이었다면 쉽게 성공하기 어려웠을 영화다. 하지만 <검사외전>에는 강동원이 있었다. 그저 살 생긴 강동원의 팬덤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가 연기하는 재욱이라는 귀여운 사기꾼 캐릭터가 <검사외전>만의 독특한 재미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재욱은 사기꾼이다. 돈 많은 여자나 후려내는 그렇고 그런 인물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특유의 허세는 강동원이라는 연기자와 맞아 떨어지면서 관객들에게 시원한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로 거듭난다. 잘 생긴 외모로 한껏 허세를 부리는 모습도 우습지만, 그런 그가 주먹이 무서워 찌질한 모습을 드러낼 때는 더욱 웃기다. 사기꾼이기는 하지만 어딘지 속내는 착해 보이고 어떤 면에서는 당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점은 그가 밉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정치인과 검사가 맞붙는 이 거창한 복수극 속에서 그가 위치한 어딘지 방관자적인 태도다. 그는 물론 억울하게 감방에 들어온 변재욱(황정민)을 돕는 입장에 서지만 사회 정의라던가 부조리에 대한 고발 같은 거창한 목적 따위는 그에게 없다. 그저 돈이 앞서고 그것이 아니라면 살아남기 위해 뛰는 것이며, 그저 가끔씩 인간적인 정 때문에 일에 뛰어들 뿐이다.

 

재욱의 위치는 정확히 서민들의 시선을 만들어낸다. 도대체 저 사회 정의고 어쩌고 하는 거대담론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그게 우리네 서민들에게 어떤 희망을 준 적이 있는가 하고 그는 되묻는 듯하다. 그런 거대담론과 대결하기 보다는 그저 눈앞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 더 갈급한 일이라는 걸 재욱이라는 캐릭터는 대변하고 있다.

 

그러니 복수극이라는 무거운 틀 속에서, 그것도 썩은 정치와 검은 돈과 유린되는 법 정의라는 어마어마한 사건들 속에서 일종의 냉소를 날리는 듯한 재욱의 캐릭터는 그 자체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잔뜩 긴장한 대치 상황 속에서 그가 등장하기만 하면 빵빵 터지는 건 그래서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정의가 이기기를 바라는 재욱의 모습에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빙의되어간다.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가 결코 대중적일 수 없으면서도 흥행에 성공한 이면에 많은 이들이 강동원의 존재감을 얘기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강동원이 사제복을 입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관객들의 마음이 움직였을 거라는 것이다. <검사외전>도 마찬가지다. 강동원이 과거 <전우치>에서 보여줬던 그 냉소적이면서도 허세가 가득하고 그것이 기분 좋은 유쾌함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그 면면들이 <검사외전>에서도 빛을 발한다. 흔히들 강동원은 늘 옳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왜 그런가를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내부자들>의 성취와 이병헌에 대한 호불호는 별개

 

영화 <내부자들>에 대한 관객 반응은 뜨겁다. 개봉 첫 주에 160만 관객을 동원해 역대 청불 영화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고 최단기간 100만 관객 돌파 기록을 세웠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건 지금이 영화 비수기로 불리는 시기라는 점이다. 이런 시점에 <내부자들>이 이런 결과를 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출처:영화<내부자들>

<내부자들>은 확실히 이런 기록을 낼만한 영화적 성취를 갖고 있다. 그 첫 번째 힘은 윤태호 원작이 갖는 그 스토리에서 나온다. 이미 <베테랑>에서 우리가 확인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 현실 속에 상존하는 권력의 부조리에 대한 대중들의 공분은 깊다. <내부자들>은 이 부조리의 심층부를 모두 도려내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다. 정계, 재계, 언론계, 법조계가 <내부자들>의 도마 위에 오른다. 그것만으로도 대중들은 반색할 만하다.

 

두 번째 힘은 이런 스토리를 실제처럼 만들어버리는 연기자들의 빈틈없는 연기다. 백윤식이나 이경영, 조승우, 이병헌까지 착한 역할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 욕망의 질주를 보여주는 연기들은 보는 이들을 공분하게도 하고 때로는 통쾌하게도 만든다. 이 정도면 악역 연기의 각축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흥미로운 건 <내부자들>의 이런 성공과 함께 솔솔 피어나고 있는 이병헌에 대한 언론의 반응이다. 마치 <내부자들> 하나로 그간 이병헌에게 쏟아졌던 비난들이 모두 잠재워지기나 한 것 같은 호들갑이다. 성급하게는 이제 모든 액땜을 한 이병헌이 <내부자들> 한 편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영화고 이병헌은 이병헌이다.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영화에 대한 호평은 당연하다. 실로 잘 만들어진 영화니까. 또 연기에 대한 호평도 마찬가지다. 실로 이 영화 속에서 이병헌은 연기를 잘했다. 게다가 연기를 떠나서 그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악역은 지금 현재의 이병헌에게는 그토록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연기는 잘 했다고 칭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병헌에게 면죄부가 될 순 없다. 대중들은 여전히 지난 50억 협박 사건을 통해 드러난 이병헌의 행실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건 영화가 성공하든, 연기를 잘했든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침 그에게 딱 맞는 캐릭터가 <내부자들>에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만일 그가 지금 시점에 깡패 역할이 아닌 순애보의 남자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같은 반응이 나왔을까. 제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대중들이 몰입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의 성공 때문일까. 이병헌은 광고에 공공연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제 논란이 만들어냈던 그 불편함을 스스로 털어 버린 듯한 모습이다. 여기에 공조해 언론들도 일제히 이병헌의 재기를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 대해 대중들은 여전히 냉담하다.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이병헌이 오롯이 연기자로 다시 서게 되는 길은 더 멀어질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작품 하나 잘 한 것으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연기자는 연기만 잘하면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연기자의 어떤 일상적인 행동이나 태도는 고스란히 그의 연기를 바라보는 대중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연기는 어찌 보면 그저 만들어서 가짜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제 첫 단추를 끼운 것이나 마찬가지다. 섣부른 샴페인 터트리기보다는 자신을 한껏 낮추고 지금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연기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겠다는 그런 겸허함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