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형제들', 그 리얼 상황극의 가능성

'뜨거운 형제들'이 서 있는 지점은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지대다. '뜨거운 형제들'이라는 타이틀 아래 형제들(?)은 인위적으로 구성되었다. 그 인위성은 김구라와 박명수 같은 좀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강한 캐릭터가 한 자리에 서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 노련하고 재기발랄한 탁재훈과 의외로 진지한(?) 박휘순, 의외로 허술한 노유민도 독특하고, 예능 신상으로서의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한상진이나 사이먼D, 이기광이라는 조합도 낯설다. 이 어색한 느낌의 구성만으로 보면 이 프로그램은 마치 김구라가 진행했던 '절친노트'의 초반 시절을 연상시킨다.

억지로 구성한 팀은 바로 그 인위성 때문에 오히려 리얼하다.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고, 어색하다는 점은 이들이 서로 팀이 되거나 어떤 상황 속에 들어가 그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쇼의 '리얼'을 확보해준다. 여기에 부여되는 미션 또한 인위적이다. 이른바 '상황극'이 제시되는 것. '아바타 소개팅'은 소개팅에 나가는 아바타와 그를 뒤에서 조종하는 인물이 짝패를 이뤄 애프터를 성공시키는 상황극을 미션으로 제시했다. 이 인위적인 틀 속에서 조종하는 자와 조종당하는 자의 리얼한 속내가 드러난다.

조종하는 자는 자신이 직접 퍼포먼스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담없이(?) 시키고 싶은 것을 맘껏 시키고, 조종당하는 자 역시 자신의 의중과 상관없는 행동이라는 틀 속에서 자유롭게 연기(?)한다. 이 조금은 느슨해지는 상황극은 그러나 바로 그 느슨함 때문에 리얼해진다. 박휘순이 시키는 상황을 꼬박꼬박 수행하는 반면, 이기광은 때론 명령을 반역한다. 사이먼D가 나이에 비해 능글능글한 모습을 연출하는 반면, 노유민은 여전히 미성숙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김구라와 박명수의 폭주, 한상진의 섬세함과 탁재훈의 장난기는 시키는 자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된다.

새롭게 시도된 '뜨거운 상황극 - 네 형제를 알라'편은 '뜨거운 형제들'이 가진 상황극의 묘미를 극대화해 보여준다. 박명수는 자신을 의심하는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는 상황극 속으로 들어가 즉석에서 애드립만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웃음을 만들어낸다. 김구라는 육탄공세하는 이웃집 여인 때문에 곤경에 빠지는 상황극 속에 자신만의 논리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간다. 이기광은 학생으로 사이먼D는 선생으로 탁재훈은 형사로 상황극 속에 투입되어 극단적인 상황 속으로 몰리고, 그 속에서 그들은 저마다의 성격과 심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절친노트'의 초반부 같던 어색한 관계들은 이러한 상황극의 미션을 통해 조금씩 '뜨거운 관계'로 변화해 간다.

이처럼 '뜨거운 형제들'이 서 있는 곳은 상황극이라는 틀 속에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그 뜨거운 지점이다. 상황극. 즉 설정은 지극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적인 극이지만, 그 상황에서 보여주는 형제들의 반응은 100% 리얼이다. 이 '리얼 상황극'은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다. 주로 토크쇼 등을 통해서 우리는 이 형식을 목도한 적이 있다. '해피투게더'의 '웃지마 사우나' 같은 코너나, '무한도전'에서 종종 벌어지는 추격극 같은 미션들은 모두 리얼 상황극이다. 박명수가 이 리얼 상황극의 일인자라는 점은 '뜨거운 형제들'의 정체성이 그의 역할을 통해 어느 정도는 규정되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뜨거운 형제들'은 박명수가 유재석과 콤비를 이루며 여러 코너에서 발군의 기량을 선보였던 그 상황극의 확장판 같은 묘미를 선사한다.

물론 '뜨거운 형제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리얼 상황극을 하나의 특징으로 밀어붙일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치 '무한도전'처럼 이 프로그램은 어떤 하나의 형식의 틀에 갇혀 있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뜨거운 형제들'이 뜨겁게 보여주고 있는 그 중심에 가상과 현실을 오락가락하는 박명수식 리얼 상황극의 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런 형식은 동시간대 경쟁 예능들인 리얼 버라이어티쇼들과 확실한 차별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가능성도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동성애 콘텐츠, 어떻게 봐야할까

1996년도에 제작된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동성애 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에서는 서로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주먹을 입에 대고 입을 맞추는 장면을 대신 묘사한다. 아마도 직접적인 표현, 즉 남자들이 진짜 딥키스를 하는 장면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영화적으로 연출하기가 힘들어서 그런 식으로 대신 표현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당시 대중들에게는 그 직설적인 장면연출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성애 코드도 아닌 동성애 자체의 문제를 포착한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이처럼 표현 수위에 있어서는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2008년 개봉된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를 보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 동성애자로 출연하는 민선우(김재욱)는 자신의 사랑에 당당하다. 물론 성적인 묘사는 그다지 노골적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이 영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동성애자로서의 선우에게 그다지 특별한 시선을 던지지 않는 영화의 태도에 있다. 이 영화는 마치 "넌 여자를 좋아해? 난 남자를 좋아해! 그게 어때서?"하고 말하는 듯이, 동성애적 상황 자체를 일상적인 공기처럼 다뤄버린다.

사실 영화 속으로는 이미 이러한 동성애가 꽤 빈번히 다뤄졌었다. 동성애는 '로드무비'나 '후회하지 않아'같은 우리네 작품들이 있기 전부터, 해외에서 들어온 영화들을 통해 이미 익숙해진 소재가 되었다. '크라잉 게임'이나 '해피투게더'같은 작품들을 비롯해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우리네 문화 전반에서 특히 영화가 동성애를 더 많이 다루고 있는 것은 이러한 해외의 작품들을 통해 영화 속에 상대적으로 어떤 개방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의 특성상, 극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구획되는 점이 좀 더 과감한 성적 표현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TV는 이제 공공연히 동성애라는 단어를 드러내고 있다. '커피 프린스 1호점' 나 '바람의 화원'같은 작품들이 동성애 콘텐츠가 아니라 동성애 코드 콘텐츠를 선보였다면 그 연장선 위에 '개인의 취향' 같은 작품이 있고, 거기서 한 발 더 나간 자리에 '인생은 아름다워'가 있다. 그만큼 동성애에 관대해졌다는 이야기일까.

동성애 콘텐츠와 동성애 코드 콘텐츠?
간단한 구분이지만 '커피 프린스 1호점'이나 '바람의 화원', 그리고 '개인의 취향'은 동성애 콘텐츠가 아닌 동성애 코드 콘텐츠이다. 이 드라마들에는 동성애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남장여자들이 등장하거나, 동성애자로 오인 받는 남자가 등장해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길 뿐이다. 이 드라마들을 보는 시청자들은 그가 사실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이 드라마가 가져온 것은 동성애 코드이지 동성애 자체가 아니다.

'개인의 취향'에서 동성애자로 오인 받는 전진호(이민호)는 오히려 그 설정이 판타지로 작용한다. 그와 동거하게 된 박개인(손예진)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 때문에 스스럼이 없고 오히려 남녀관계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까지 한다. 남자를 성적인 구분 없이 친구로 둘 수 있다는 것은 이 여성이 동성애자를 어떤 판타지로까지 여기게 되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이 드라마에서는 물론 동성애 코드지만 과거 '커피 프린스 1호점'이나 '바람의 화원'에서 간접적으로 다뤄지던 동성애자들이 겪는 아픔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대중들이 갖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심적인 허용수준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성애 코드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때론 재미있는 설정(질척한 성적 관계를 벗어난 남자친구가 주는 판타지, 그것도 이민호 같은 남자라면!)으로 오히려 즐기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다룬 '후회하지 않아' 같은 작품에 관객이 들지 않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시선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수현 작가의 새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실로 파격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진짜 동성애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것도 가족드라마의 틀 안에서. 이 드라마는 동성애자를 가족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한다. 태섭(송창의)은 자신과 결혼하기를 원하는 유채영(유민)에게 어렵게 커밍아웃을 하고, 유채영은 그 상황을 힘겹게 받아들이면서 "미안하다"는 태섭에게 "그것이 네 잘못은 아니잖아"하고 말한다.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유채영과 그런 그녀를 두고 돌아오는 길에 혼자 눈물을 쏟아내는 태섭은 이들이 남녀 관계를 넘어서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김수현 작가가 바라보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이다. 수많은 사랑이 있고, 그것을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다를 뿐, 틀린 사랑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공감까지 일으키고 있는 걸 보면 지금 확실히 우리가 바라보는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걸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동성애 소재의 콘텐츠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그것이 점점 직접적으로 소수의 성을 다룬다고 해서 우리네 성 의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 커밍아웃을 한 후 오히려 삶이 더 어려워진 동성애자들의 사례들은 이제 흔한 이야기가 되었다. 문화 속에서 동성애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되고는 있지만 성 소수자로서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는 이야기다.

왜 이렇게 동성애 콘텐츠들이 많아질까
그렇다면 여전히 편견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동성애가 대중문화 속에서 공기처럼 퍼져나가고 있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이성애, 즉 이성 간에 벌어지는 멜로가 어느덧 식상한 어떤 것이라는 암묵적인 인식이 깔려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드라마에서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삼각 사각의 멜로나 신파조의 설정들은 이런 인식의 밑바탕을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 한편 영화로서는 늘 연말이 되면 쏟아져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가 그 역할을 했을 터이다.

남녀가 등장하면 으레 생겨나는 이러한 멜로적 상황이 대중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 도달하자 영상 콘텐츠들은 오히려 동성을 그 자리에 대치시켜 멜로가 아닌 인간애를 다루려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동성애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본래는 남녀 주인공을 세우려했다가 결국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세운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준익 감독은 이미 전작 '왕의 남자'에서도 두 남자의 동성애를 끌어들여 예술혼과 인간애로 콘텐츠가 가진 주제를 확장시킨 전례가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란 영화가 단지 성 소수자들만이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도 어떤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동성애가 가진 인간애로의 확장 가능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동성애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남녀로 구분되던 성별구분이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사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과거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는 남녀의 역할구분이 명확히 나눠져 있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던 농경사회에서의 성별 역할의 차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육체적인 노동력이 아닌 정신적인 노동력을 사용하는 정보사회에서는 남녀의 역할구분이 사라진다. 오히려 여성들의 노동력이 섬세한 정보사회의 업무에 더 적합해진다.

남녀 구분은 이제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으로 바뀌게 된다. 남자라도 여성성이 많은 사람이 있고, 여자라도 남성성이 많은 사람이 지금 시대에 남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동성애는 바로 이 시선 속에 자연스러움을 얻게 된다. 남성이지만 강한 여성성이 실제 생물학적 성까지도 변모시킨 존재로서 동성애자는 외계인이 아닌 우리들 중 한 사람으로 자리 매김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지 실제 사회의 변화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남성성과 여성성의 시각으로 보면 '커피 프린스 1호점'의 프린스들이나, '개인의 취향'의 전진호 같은 캐릭터가 사실은 여성성을 더 많이 가진 남성들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문화 콘텐츠들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여성성이다.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신모계사회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 창조적인 생각과 감성적인 접근, 그리고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여성성은 사회를 바꾸는 키워드가 되어가고 있다. 바로 이 키워드를 어쩌면 가장 잘 보여주는 것들이 동성애 콘텐츠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적 구분은 가장 모호해지고 대신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이 더 명징해진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동성애 콘텐츠에 깔린 성 상품화의 확장이다. 사실 동성애라 얘기한다면 여성과 여성의 동성애는 우리네 문화 콘텐츠 속에서 늘 등장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왜 그 콘텐츠들은 동성애 콘텐츠라고 구획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 여성과 여성의 동성애는 남성적인 시선을 위한 성 상품화로 나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우리가 동성애가 자주 등장한다고 얘기할 때 그것은 남성과 남성 간의 동성애를 의미한다.

이렇게 남성들 간의 동성애가 이제 눈에 띄게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문화구매자들로서의 여성이라는 존재의 위상이 그만큼 커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등장하는 남성들이 모두 꽃미남들인 점은 과거 여성들의 성 상품화가 이제는 남성들까지 포함시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동성애 콘텐츠, 중성적 사회로 가는 지표
확실히 우리의 문화는 이제 동성애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과감해졌다. 소재로서 아무 거리낌없이 활용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고, 어떤 것은 의도적으로 동성애 코드를 활용하는 경향까지 생겼다. '미인도' 같은 영화는 동성애 코드를 자극적으로 활용하여 성 상품을 극대화시킨 경우다. 이 영화는 신윤복이 남장여자였다는 설정 자체도 파격적이지만, 그 남장여자의 신윤복(김민선)이 남성의 옷을 벗어버리고 김홍도(김영호)와 과감한 섹스를 하고, 한편으로는 여성들끼리의 성적인 장면을 동시에 연출하는 그 지점이 더 파격적이다. 이 영화에서 남장여자, 즉 동성애 코드는 오로지 이 에로틱한 성적 상상을 위해서만 활용된다.

하지만 같은 신윤복을 다루었지만 전혀 다른 결을 갖고 있는 '바람의 화원'을 보면, 이 동성애 코드가 한 예술가의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윤복은 남성을 강요하는 조선이라는 사회 속에서 어쩌면 여성성을 무기로 한 평생을 싸우다 간 화원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가진 남장여자의 활용은 어쩌면 가장 적절했다 판단되는 것이다. '바람의 화원'이 보여주는 상황은 저 '미인도'처럼 직접적인 표현은 등장하지 않지만, 오히려 더 동성애에 대한 접근을 해주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미의식(여성성)을 추구하는 자와 그를 억압하는 사회가 대립하는 상황 자체가 소수자와 다수자 사이의 대립상황을 에둘러 말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소재를 다룬 전혀 다른 결과물의 두 작품은 동성애에 대한 우리네 성 의식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하나는 여전히 하나의 볼거리이자 성 상품으로 세워지는 동성애다. 여성을 좀 더 자극적으로 벗겨내기 위해 남성의 옷을 입혀놓는 것이나, 꽃미남들이 나와 서로의 아름다운 몸을 만지고 보여주는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다른 하나는 점점 중성화되어가고 있는 사회를 보여주는 지표로서의 동성애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겉으로 드러난 성별보다는 그 내면 속에 담겨진 남성성과 여성성을 주목하면서 그 미묘한 감정선들을 잡아낸다.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들보다는 어딘지 여성적인 섬세함을 가진 남성들이 점점 대중문화 속에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중성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사회의 징후들이다. 그 속에서 동성애는 그 단적인 지표가 된다.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고 있는 동성애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사회가 가진 성 의식은, 이 두 가지 방향 즉 성 상품화와 중성적 사회로의 지향 사이에 놓여진 긴장관계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성 상품화가 남녀의 성별의식을 기본 전제로 만들어진다면 중성적 사회로의 지향은 이 성별의식을 무너뜨린다. 아직까지 눈에 띄는 변화가 확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후자쪽으로 점점 무게중심이 이동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토크쇼 전성시대, 토크쇼가 토크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토크쇼 전성시대다. 월요일에는 MBC의 ‘놀러와’, SBS의 ‘야심만만2’, KBS의 ‘미녀들의 수다’가 경쟁을 벌이고 있고, 화요일에는 KBS의 ‘상상플러스’, 수요일에는 MBC의 ‘황금어장’, 목요일에는 KBS의 ‘해피투게더’, 금요일에는 SBS의 ‘자기야’, 토요일에는 MBC의 ‘세바퀴’ 같은 토크쇼들이 포진해 있다. 실로 거의 일주일 내내 토크쇼를 볼 수 있는 시대다.

이렇게 된 것은 물론 토크쇼라는 형식이 비용 대비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토크쇼는 다른 예능 프로그램의 형식보다 비용이 적게 들어간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크쇼가 갖추고 있는 형식, 즉 호스트가 게스트를 초청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답변을 듣는 과정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능적인 욕망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연예계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이른바 신비주의의 해체기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연예인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고, 대중들은 그 솔직 대담한 이야기에 더욱 빠져들고 있다. 이른바 리얼 토크쇼가 대세가 된 것이다.

리얼 토크쇼는 시청자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그 시청자들을 등에 업은 호스트가 게스트를 압도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즉 게스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시청자를 대신하는 호스트가 원하는 이야기를 게스트가 하게 된 것이 리얼 토크쇼가 등장한 배경이다. 여기에 연예인들의 신비주의 콘셉트가 무너지면서 오히려 솔직한 모습이 인기를 끌게 되자, 게스트들의 솔직한 이야기는 자발적인 모습을 띄게 되었다.

하지만 이 리얼 토크쇼는 또한 문제점도 갖고 있다. 지나치게 과열된 경쟁 속에서 솔직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폭로성의 이야기들이 난무한다는 것이다. 억지로 게스트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까지 들춰내기도 하고, 심지어 게스트를 윽박질러서 울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지나친 사생활 침해라고 할 수 있는 집요함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리얼 토크쇼가 태생적으로 갖는 단점이다. 리얼 토크쇼의 토크 양상은 자극적으로 흐르게 마련인데, 바로 이 자극은 반복되면 둔감해지고 따라서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토크쇼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거의 연예인들의 가십 수준에 머문다는 건, 현재 우리의 토크쇼가 가진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토크쇼는 사람을 출연시켜 그 사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진솔한 모습을 추구하는 리얼 토크쇼에서는 그 사생활적인 부분을 다룰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전 세계 어느 곳에 있는 토크쇼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끄집어내려 하거나, 또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억지로 말하게 하는 토크쇼의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토크쇼가 그저 쇼가 아니라, 한 시대의 화법을 대변해 보여주고 어떤 면에서는 교육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이들 같은 경우에 이런 형식에 반복 노출되면 대화의 방식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물론 토크쇼들도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잡담이 아닌 다른 것들을 담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릎팍 도사’는 지금 현재 가장 진취적인 토크쇼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대의 화법으로 자리 잡은 직설어법을 쓰면서, 게스트에 대해 시청자가 알고 싶은 점을 피하지 않고 질문하는 공격적인 화법을 구사하면서도, 그 게스트를 통해 어떤 시사점까지 찾아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실로 중요한 것이다. 사생활은 그저 가십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론 중요한 정보가 되기도 한다. 사생활로 제시된 개인적인 삶이, 대중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삶으로서 어떤 공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가십이 아니다. 토크쇼는 이처럼 개인에 집중하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연예인으로 한정된 직업군에서 계속해서 어떤 보편적으로 공감을 주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무릎팍 도사’가 시도한 게스트의 외연을 넓힌 작업은 토크쇼에 있어서 큰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도 연예인이 아닌 비연예인이 출연했을 때, 시청률이 더 높은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점으로 보아 대중들은 좀 더 다양한 게스트들의 이야기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문제는 연예인에 편중된 게스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호스트들도 너무 몇몇 MC에 국한되어있다는 지적들이 있다. 실제로 현재는 강호동과 유재석 이 두 개그맨이 거의 토크쇼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만큼 토크쇼의 진행 자체가 녹록치 않게 된 상황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박중훈쇼’의 추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실제로 토크쇼의 성공은 생각보다 어려운 점이 많다. 하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이것은 시청률 보증수표인 이 개그맨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새로운 형식을 개발하기 보다는 유명 개그맨을 기용해 쉽게 시청률을 가져가려는 것이다.

토크쇼는 문제와 해법을 계속 제시하면서 진화를 거듭해왔고 지금도 그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토크쇼는 과거 가장 기본적인 형식인 1인 토크쇼에서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자니윤쇼’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집단으로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이었다. 서세원이 진행했던 ‘토크박스’ 같은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는데 ‘야심만만’이 대표적이다. 설문 형식을 가져와서 자연스럽게 연예인들의 속내를 끄집어냄으로써 새로운 토크쇼의 도래를 예고했다. 그리고 직설어법의 시대에 와서 토크는 좀 더 독해졌고 과감해졌다. 하지만 지금 이것도 저물어가고 있다.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정체된 느낌의 토크쇼는 이제 자극적인 웃음만이 아닌 어떤 공감을 찾고 있다. 진솔하면서도 사람의 스토리가 살아있는 토크쇼, 이런 게 그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박중훈쇼’가 ‘해피투게더’를 통해 생각해봐야 할 것들

‘박중훈쇼’에 대한 시청자들의 “재미없다”는 반응에 대해서 박중훈은 ‘무례한 시대’라는 표현을 썼다. 그 말의 요지는 젊은 세대들이 무례하지 않은 것에 익숙하지 않으며(그래서 무례한 트렌드가 아니면 재미를 못 느끼고), 재미는 웃음 자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재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박중훈쇼’는 무례하지 않으면서 따뜻하게 핵심을 전할 수 있는 토크쇼가 될 것이라는 거였다.

이 말들은 하나씩 떼어서 생각하면 꽤 의미가 있고 곱씹어볼만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런 해명에 가까운 말은 토크쇼의 재미없음에 대해서 그 문제를 자신들에게서 찾기보다는 시대와 세대를 탓하고, 시청자가 원하는 재미, 즉 웃음을 어떻게 끌어낼까 고민하기보다는, 그 시청자가 원하는 재미가 너무 편협하다고 가르치는 말로도 들린다. 하지만 박중훈이 지적한 게스트들에게 바늘방석을 내미는 트렌드화된 무례한 토크쇼의 범주 밖에서도 즐거움을 주는 토크쇼는 얼마든지 있다. 게스트들에게 적극적으로 멍석을 깔아주는 ‘해피투게더’는 무례하지 않고 따뜻하게 핵심을 전하면서도 또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 프로그램으로서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현재의 ‘해피투게더’는 메인 MC인 유재석의 배려해주는 캐릭터를 프로그램화한 토크쇼다. 대중목욕탕이라는 공간은 일반적인 스튜디오 속의 토크쇼가 갖는 긴장감을 와해시킨다. 찜질방에 온 듯한 편안하고 통일된 복장은 거기 앉아있는 게스트들과 MC들 사이의 거리감을 좁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메인 MC 유재석은 뽀글가발을 쓰고 마치 동네 아줌마같은 행색으로 쪼그리고 앉아 있다. 로커룸의 좁은 공간에 앉아있는 게스트와 MC들은 한 카메라에 포착되기 위해서 다닥다닥 살을 맞대고 앉아야 한다. 이 상황은 전형적인 토크쇼가 갖는 의례적인 형식의 어색함을 상당부분 없애주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의 MC들은 저마다 각자의 캐릭터로 게스트들이 좀더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유재석은 특유의 복기개그로 무심코 게스트들이 내뱉은 말을 한번 되새김질(재해석) 해줌으로써 웃음을 만들고, 그 웃음 속에서 뽑아내진 게스트의 캐릭터를 설정하기까지 한다. 전혀 웃음의 목적을 가지지 않고 출연한 게스트라고 해도 유재석의 이 레이다망에 잡히면 순식간에 ‘웃기는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뜻밖의 수확도 얻을 수 있게 된다.

박명수는 ‘무한도전’에서의 거성 혹은 버럭 캐릭터가 갖는 위압감을 이 프로그램 속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해피투게더’에서 그는 바보캐릭터로 스스로 무너지면서 게스트들을 돋보이게 한다. 물론 게스트가 한 이야기가 썰렁할 때면 버럭 소리치는 것으로 그 상황을 모면시켜준다. 바보가 하는 호통이니 그다지 기분 나쁠 것도 없다. 한편 박미선은 게스트들의 연령대를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아줌마들이 갖는 편안함을 만들어주고 본인 스스로 나이가 많은 것을 캐릭터화해서 연령대가 많은 게스트들과 공감을 나누기도 한다.

신봉선은 게스트들에게 선망의 눈빛을 던지면서 특유의 몸 개그를 활용해 게스트들을 돋보이게 해준다. 춤에 능한 그녀는 특히 가수들이 출연했을 때 빛을 발하는데, 그녀의 춤 따라하기는 그 자체로도 화제를 일으키면서 게스트에 대한 주목도를 높여준다. 이처럼 ‘해피투게더’는 프로그램명처럼 게스트들에게 확실한 멍석을 깔아줌으로써 속에 있는 이야기가 술술 풀려 나오게 만드는 토크쇼다.

이 멍석 위에서 토크쇼가 주는 것은 웃음뿐만이 아니다. 때로는 게스트의 진솔한 이야기가 감동을 주기도 하고, 아팠던 과거사에는 눈물이 쏟아지기도 한다. 정적일 수 있는 토크쇼에 동적인 면을 주기 위해 춤과 노래가 삽입되고 직접적으로 얘기하기가 애매한 민감한 사안들은 때론 설정토크쇼라는 형식 속에서 얘기되어지고, 친절하게도 마지막에 유재석은 “콩트는 콩트일뿐 오해하지 말자!”는 구호까지 외쳐준다. 끌어내고 싶은 이야기는 다 끌어내되 거기에 또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놓는 치밀함이 돋보인다.

박중훈이 지적한 무례한 토크쇼들이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무례한 토크쇼들도 게스트들의 홍보전략을 원천봉쇄해 시청자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은 내용에 접근해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예를 갖춘 ‘해피투게더’같은 토크쇼는 게스트들의 재미있는(웃음은 물론 감동까지)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꽤 많은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박중훈쇼’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애초부터 초특급 배우들을 게스트로 출연시키며 예능 프로그램처럼 스스로를 포장하고도 재미가 없었던 ‘박중훈쇼’. 재미없다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쓴 소리를 하기보다는 그 재미없음의 진짜 이유를 곰곰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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