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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영화로 세상보기

‘중천’, 매트릭스급 CG, 은행나무침대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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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제작기술 못 미친 '중천'유감

‘매트릭스’ 약 6백50억 원, ‘반지의 제왕’ 편당 약 1천10억 원. 제작비 규모로 보면 100억 원을 들인 ‘중천’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가져간 개런티(1편만 약 92억 원)에 불과한 소품이다. 하지만 그 CG만 떼어놓고 보면 결코 소품이라 할 수 없는 놀라운 장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이게 진짜 100% 순수 국내 기술력으로 완성된 영화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영화는 설정부터 가상공간이다. 하늘과 땅 사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진 ‘중천’이라는 중간계가 배경인 것이다. 그러니 거의 대부분을 CG에 의존하면서 만들어야 하는 상황. 미국 같은 경우에 이미 CG를 활용한 작품들이 일상화될 정도로 예술성과 상업성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엔 아마도 이 작품이 이제 그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 사실 과거에도 우리의 CG는 결코 헐리우드나 일본에 뒤지는 것이 아니었다. 외국 유명게임업체들이 우리네 게임업체들을 OEM 방식으로 참여시키는 걸 선호했던 것은, 터무니없는 제작비로도 훌륭한 CG가 나온다는데 놀라서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중천’의 시도는, 돈이 없어 OEM으로 잔뼈가 굵은 우리네 애니메이션 업계나 게임업계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중천’에 때아닌 CG 표절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이 CG 작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겨운 싸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다. 2년 넘게 5백여 명의 스태프들이 참여한 이 ‘작품’을 단 몇 줄로 ‘표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만일 단지 선정적인 제목으로 이목을 끌기 위한 기사였다면 그 기사가 허문 것은 단지 100억 원이라는 비용뿐만이 아니고, CG업계에서 배고프게 일해온 종사자들의 의욕이다.

‘중천’의 CG는 ‘반지의 제왕’이나 ‘매트릭스’, ‘스파이더맨’ 같은 헐리우드 CG에 비견할 만큼 뛰어나다. 이 작품으로서 ‘은행나무침대’에서 보았던 조악한 수준은 이제 과거지사가 될 법하다. 특히 숲 속에서 벌어지는 사슬창 추격신과 천기관 광장에서 벌어지는 3만 원귀병과 이곽(정우성 분)이 벌이는 전투신은 놀랄 만한 수준이다. 배경으로 제시되는 중천의 풍경 역시 ‘반지의 제왕’의 그것과 비교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가장 어렵다는 인물3D캐릭터 애니메이션으로 디지털 액터(정우상이라고 불리는)를 만들어낸 것 역시 대단한 성과이다.

‘중천’의 문제는 CG에 있지 않다. 이 훌륭한 CG를 내러티브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이 약점이라면 약점인 것이다. ‘중천’이라는 이 매력적인 공간은 수많은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게 만들었던 ‘매트릭스’와 비견됨에도 불구하고, 불교적이고 사이버펑크적인 충분한 알레고리를 형성하지 못했다. 깊이 있는 내러티브에 대한 접근을 하지 못한 결과, 훌륭한 CG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저 ‘은행나무침대’의 멜로로 흐르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 빈약한 내러티브를 현란한 CG가 어느 정도 채워주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아쉬움은, 역시 영화는 CG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제 달라진 상황을 읽게될 것이다. 과거 제작기술이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했던 시절은 이제 과거지사가 되었다고. 오히려 상상력이 제작기술을 못 따라가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