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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네모난 세상

아프리카는 아름답다? 아프리카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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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눈물', 그 아름다움과 슬픔 사이

이건 겨우 프롤로그다. 그런데 벌써부터 마음은 혼란스럽다. 막연히 '아프리카' 하면 누구나 자연을 떠올린다. 날 것 그대로의 야생이기에 살풍경한 것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곳. 그래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피조차 신성하게 여겨지는 곳. '아프리카의 눈물'은 지금까지의 '눈물' 연작 다큐멘터리가 그래왔듯이 그 공간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 야생과 그 위를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아름다움을 담는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수줍어하며 데이트를 하는 우바가 이제 곧 소 뛰어넘기 성인식을 마치고 다르게와 혼인할 날을 기다리며, 유목민인 풀라니족들은 가장 아름다운 남성이 되기 위해 몸을 가꾸는 것처럼.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아름다움으로만 연상되는 '아프리카'만을 담으려는 것이 아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창과 화살이 들려진 손이 떠올리는 신성한 피는, 이제 그 손 위에 대신 총을 얹어놓음으로써 더럽혀진다. 왜 평화롭게 공존하던 그들은 서로 총을 겨눌 정도로 생존 전쟁을 치르게 되었을까.

'아프리카의 눈물'은 그 눈물의 진원지를 찾아간다. 아프리카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덜 문명화되고 환경과 자연이 보존되어 있던 아프리카가 무슨 죄가 있어 피와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그것은 결국 지구의 다른 한 편에서 살아가는 우리 같은 도시인들의 죄다. 물이 점점 말라버리고 바닷물의 수위가 올라가 살 터전이 물에 잠기고, 땅이 타버리는 것이 농담이 아닌 진짜 현실인, 그들 표현대로 '죽어가는 땅'이 되어버린 아프리카는.

코끼리들이 물을 찾아서 반제나 호수로 몰려들고, 가는 도중에 낙오된 어린 코끼리들이 말라 죽어가며, 말라버린 땅에 목말라 하며 쓰러져 죽어가는 가축이 마지막 물기를 눈물로 떨굴 때, 그 가축의 주인은 속수무책으로 방치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이제 갓 아이를 낳은 엄마는 물을 찾아 나서고 도무지 마실 수 없을 것 같은 물을 마시며,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일을 찾기 위해 대도시로 떠나가 그 곳에서 막노동을 하고, 그러다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겨 분노하는 도시의 일꾼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급기야 어떤 이는 차가운 한 줌의 재로 돌아오고, 그 아버지의 묘 앞에서 소년은 분노 반 슬픔 반으로 눈물을 흘리는 이 모든 재앙들... 이건 그들의 죄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눈물'은 잔인하게도 이 아름다운 아프리카와 눈물 흘리고 있는 아프리카를 병치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이 혼돈스런 상황들이 서로 연결고리를 맺고 있고, 그 고리가 바로 TV 앞에 앉아 '아프리카' 하면 연상되는 평화로운 자연을 떠올리고 있던 시청자들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총을 쥐게 된 것도, 어린 코끼리가 죽어간 것도 모두 그 현실을 없는 것처럼 여기며, 마치 영화 속에서 그려내는 아름다움으로만 아프리카를 기억했던 우리들의 문제라는 것을 이 다큐는 보여준다.

'눈물' 연작 다큐멘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공간을 상정하고 그 위에 살아가는 자연과 동물과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본 후, 그것이 파괴되어 가는 현실에 눈물 흘린다. 따라서 감성적으로 그 곳의 삶들에 공감하면서 따라가다 보면 그 밑바닥에 깔려진 이성적인 각성에 도달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 아름다움과 슬픔의 파괴력이 강력하다. 무엇보다 이 아름다움과 슬픔을 포착하기 위해 총알이 날아다니는 위험 속으로 뛰어 들어간 제작진의 용기가 영상 곳곳에 진심으로 묻어난다는 것. 현빈의 내레이션은 '아마존의 눈물'을 빛나게 했던 김남길의 목소리만큼 차분하고 호소력이 느껴진다. 혼란스럽지만 이것이 다시 눈물로 돌아온 '아프리카의 눈물'을 기꺼이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그리고 이건 겨우 프롤로그에 불과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