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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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트렌드] 주연보다 '미친 존재감', 왜?

D.H.Jung 2010. 12. 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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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에서 주변으로, '만들어진'에서 '만들어가는'

올해의 드라마로 손꼽히는 '추노'. 이 작품하면 떠오르는 배우는 주연급인 장혁, 오지호보다 성동일이다. 조연인데다, 그것도 악역인 성동일이 "나 천지호야!"라고 외쳤을 때 그 존재감은 주연급 이상이었다. 그래서 대중들은 그에게 기꺼이 '미친 존재감'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무한도전'의 정형돈. 그는 존재감 없는 개그맨으로 캐릭터화 되어 있었다. '무한도전'에서 뭐든 열심히는 하지만 웃기지는 못하는 그를 멤버들은 '웃기는 거 빼놓고는 뭐든 잘 하는' 존재로 불렀다. 그러던 정형돈의 예능 부적응 캐릭터는 그러나 올해 들어 뭐든 하기만 하면 빵빵 터지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미친 존재감'은 이제 그의 새로운 캐릭터가 되었다.

'춘향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패러디한 영화 '방자전'에서 변학도 역할을 한 송새벽은 전혀 기대 밖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작품 자체가 방자와 이몽룡, 춘향을 중심으로 되어있는데다가 송새벽이라는 배우 역시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얘기할 때면 송새벽을 먼저 얘기할 정도로 그는 '미친 존재감'이 되었다.

성동일이나 정형돈, 그리고 송새벽 같은 배우나 개그맨은 물론 드라마나 예능에서 중심은 아니었지만 늘 변방에서 실력으로 주목을 끌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미친 존재감'이라는 칭호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즉 중심 바깥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니 '미친'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이다.

하지만 '동이'의 티벳궁녀 최나경이나 1초 유재석은 다르다. 잠깐 얼굴을 보였을 뿐인데 이들은 '미친 존재감'이라 불렸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냈다기보다는 대중들이 그 존재감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 휙 지나가는 순간 속에 지나치는 엑스트라의 얼굴을 포착하고는 대중들이 '티벳궁녀' 같은 의미를 부여한 것. 즉 '미친 존재감'이란 신조어에는 '변방'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대중들이 '만들어낸(혹은 찾아낸)' 존재라는 의미가 덧붙여진다.

그래서 이렇게 '미친 존재감'이라는 수식어는 이제 대중들이 '발견한' 존재들에게 붙는 일반명사가 되어간다. 주연과 조연은 작품의 제작자들이 구분해 부여하는 것이지만, '미친 존재감'은 그러한 구분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자이언트'의 정보석, '대물'의 차인표, 다수의 드라마에 등장하지만 늘 죽어버리는(하지만 존재감은 죽지 않는) 배우 김갑수, '닥터 챔프'의 1초 박지선 차경아, 늘 조역이지만 확실한 존재감으로 자리한 유해진.... 게다가 이제는 주연들마저 주연이라는 수식어를 버리고 '미친 존재감'이라는 수식어로 재편된다. '자이언트'의 이범수, '즐거운 나의 집'의 김혜수 등등.

즉 '미친 존재감'은 작품 내에 늘 존재하던 기존의 서열 구조를 깨뜨린다. 주연 조연 혹은 엑스트라로 구분되던 서열은 모두 '미친 존재감'이라는 수식어로 들어오면서 '존재감이 있는' 캐릭터와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로 양분된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제작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대중들의 몫이 된다.

일종의 놀이처럼 보이지만 이 '미친 존재감'에는 올 한 해 대중들의 정서가 담겨져 있다. 올해 특히 민감했던 부분은 이른바 '루저'와 '위너'로 나뉘는 세상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이다. '루저녀'가 사회적 파장을 만들어내고, '슈퍼스타K2'가 변방에 있던 허각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이런 대중정서의 반영으로 보인다. 누군가에 의해 '루저'와 '위너'로 구분되는 세상에서 대중들은 그들만의 수평적인 구분 체계로서 '미친 존재감'이라는 그들만의 왕관을 스스로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