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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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PD | 예능은 어떻게 예술이 되었나

D.H.Jung 2011. 7. 2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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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 필요 없다, 그저 한 부분을 떼어내 보여줘라

'무한도전'(사진출처:MBC)

김태호 PD는 ‘만들어진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 ‘만들어진 것’은 기성관념일 수도 있고, 일상적인 관계일 수도 있으며, 사회적인 통념일 수도 있다. 물론 예능 프로그램으로 돌아오면 그것은 기성형식이나 상투적인 주제의식 같은 것이 된다. 김태호 PD가 ‘무한도전’을 통해 매번 만들어내는 웃음의 소재들과 형식들이 다른 것은 다분히 이런 성향 덕분이다. 물론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 방송 PD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방식은 여타의 예능 PD와는 방향성이 다르다.

보편성의 웃음을 추구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시청률로 대변되는 대중들의 반응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는 방송 예능의 한계 속에서도 그는 대중을 따라가기보다는 대중을 이끄는 방식을 선택했다. ‘무한도전’은 그래서 따라온 대중들에게는 그 능동성에 걸맞는 달콤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선사하지만, 따라오기만을 원하는 대중들에게는 외계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20% 안팎의 시청률은 어쩌면 그래서 김태호 PD의 적절한 선택인 셈이다. 그에게 지나치게 대중적인 것은 ‘만들어진 것’을 그저 잘 따라한 증거가 되고, 지나치게 무관심한 것은 자신이 정한 방향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중간 어디 즈음에 김태호 PD는 자신이 서야할 예능의 방점을 찍는다.

이것은 김태호 PD가 언론을 상대하는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만큼 언론의 인터뷰를 기피하는 인물도 없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자신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언론에 노출되곤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하려는 얘기는 A인데, 언론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B를 보여준다는 얘기다. 그래서 어찌 어찌 해 어렵게 김태호 PD를 만난다고 해도 그 인터뷰는 기자와 PD 사이의 좀 더 편안한 사적 관계를 만들어준다기보다는 오히려 팽팽한 거리감과 긴장감을 만들어내곤 한다.

이런 김태호 PD도 단박에 반하는 인물이 있다. 무언가 ‘만들어진 것’ 바깥에서 놀라운 도전정신으로 부딪치는 인물들이다. 이것은 아마도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하면서 생겨난 경향일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제대로 된 경기장 하나 없지만 묵묵히 도전정신을 보여준 봅슬레이팀이 그렇고, 퉁퉁 부운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것을 보여준 여성 복싱선수가 그러하다. 김태호 PD의 페르소나, 유재석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떠한 미션을 줘도 성실함과 무모할 정도의 도전정신을 발휘하는 유재석이 없었다면 김태호 PD의 ‘무한도전’이라는 세계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테니.

김태호 PD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장기하의 새 음반에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 참가를 권유했지만 자신의 새 음반이 성공할 자신감이 있다며 그 성공이 ‘무한도전’ 덕이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고사한 장기하의 무모할 정도의 도전정신을 그가 높게 산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기성사회가 갖는 통상적인 관계의 틀 바깥으로 탈주한다는 점에서 김태호 PD의 성향과 그대로 만난다.

김태호 PD의 이런 ‘만들어진 것’에 대한 거부는 ‘무한도전’이 왜 예술 같은 예능이 되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사실 ‘무한도전’이 예능의 레전드가 된 것은, 그 하나 하나가 도전이었던 과정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무한도전’을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새로운 형식의 선구자 정도로 인식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김태호 PD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무한도전’이 거둔 가장 큰 공적은 예능 프로그램에 촬영 카메라와 마이크를 여러 대로 늘린 것”이다. 삽과 포크레인이 대결을 벌이던 ‘무모한 도전’이 뭔가 스펙타클하기는 해도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하지 못한 것은 그 광경을 포착하는 카메라와 마이크가 몇 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방송국에 카메라를 더 달라고 요청했지만 요지부동. 김태호 PD는 결국 외주 카메라를 직접 모았다고 한다. 그들이 지금의 많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바탕이 된 셈이다.

카메라가 늘어나자 비로소 각각의 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이야기들이 담기기 시작했고, 쌓여진 비디오테이프만큼 후반작업에 들어가는 공도 커지게 되었다. 깨알 같은 재미를 북돋워주는 자막이 붙기 시작했고 각각의 캐릭터는 좀 더 공고해졌으며, 그 캐릭터들을 각각 따라다니는 카메라로 인해 다양한 미션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많아진 카메라로 인해 캐릭터들 간의 중심과 변경의 벽이 무너진 것이다. 물론 메인 MC로서 1인자 유재석이 서 있지만 그만큼 비슷한 비중의 다른 인물들도 이제 수평적인 위치에서 멘트를 쏟아낸다. 즉 카메라를 좀 더 늘리겠다는 그 새로운 도전의 결과는 우리에게 이미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세계를 가져왔던 셈이다.

그러나 김태호 PD의 ‘무한도전’이 예능의 벽을 넘어서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열려진 작품세계(?)’ 덕분이다. 이미 ‘정해진 어떤 틀’ 속에서 움직이던 예능이 이제 미션 하나를 던져놓고 보는 하나의 실험이 되면서, 그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과정들은 독특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 미션을 수행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일상적인 경험들과 습관들을 이 미션 속으로 끌어옴으로써 상황에 상징성을 부여한다. 스키 점프대 꼭대기까지 전원이 오르기 위해 벌이는 미션은 가상적이고 게임적이지만, 그것이 그려내는 이야기가 현실을 상기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미션 과정에 가타부타 없는 설명은 대중들의 좀 더 적극적인 개입을 끌어낸다. 그래서 대중들에 의해 이런 저런 의미로 해석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무한도전’이라는 예능은 비로소 예술이 되어간다.

웃음은 과연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명쾌하다. 물론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비극만이 예술인 것처럼 오인되기도 했지만, 이미 수많은 희극들이 우리에게 예술로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웃음의 방송버전인 예능은 과연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의문점이 있다. 이것은 웃음이라는 소재 때문이 아니라, 방송이라는 매체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로 대변되는 보편성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방송이 독창적인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태호 PD를 본다면 그것이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물론 이 ‘무한도전’ 역시 방송 프로그램으로서의 보편성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경우 그 틀을 넘어 예술의 차원을 언뜻 우리에게 보여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