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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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킥3', 왜 모자이크만 보고 풍자는 안볼까

D.H.Jung 2011. 9. 3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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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킥3', 모자이크에 가려진 절묘한 풍자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3)'은 왜 굳이 노출 장면에 모자이크를 썼을까. 이런 식의 질문에는 함정이 있다. 질문 자체가 결국 모자이크와 노출에만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모자이크든 노출이든 둘 다 자극적이긴 마찬가지다. 즉 백진희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드러난 팬티를 끄집어내려 엉덩이를 보여주는 노출 자체도 자극적이지만(물론 이 장면은 실제가 아니라 레깅스를 입고 찍은 장면이다), 그것을 모자이크 처리한 점은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모자이크는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하지만 노출과 모자이크만 자꾸 떼어내 벌어지는 논란은 어쩌면 방송된 장면 그 자체보다 더 자극적일 수 있다. 전체적인 맥락을 가리고 국소적인 부분에만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왜 청년백수 백진희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사실은 더 중요하다. 그녀가 그런 일을 당한 공간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다. 고시원에서 쫓겨나 박하선의 집에 얹혀사는 그녀는 스스로 투명인간을 자처한다. 살게만 해주면 "없는 것처럼" 살겠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화장실은 거의 유일한 사적인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 누구에게나 최소한 허용되는 사적인 프라이버시의 공간조차 허용되지 않는 현실. 백진희의 빵꾸똥꾸(?) 상황은 그런 현실을 화장실 코미디로 풀어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 기발한 것은 백진희를 그렇게 만드는 인물이 또 다른 현실의 피해자인 안내상이라는 점이다. 빚쟁이에 쫓겨 도망치던 안내상이 우연히 발견한 땅굴로 유사시의 비상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옆집 화장실을 뚫게 되었고 마침 거기에 청년 백수 백진희가 있었다는 이 기막힌 설정은 화장실 유머로만 보게 되면 상황이 주는 맥락을 놓치기 쉽다.

집도 절도 없는 안내상 가족이 청년 백수 백진희를 설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그 자체로는 우습지만 그 상황 자체가 우스운 건 아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 승자 독식 구조의 사회에서 패자가 되어버린 이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장면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려는 의도는 없지만, 구조 자체가 힘겨운 이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부딪치게 되어있는 이 웃을 수 없는 현실.

학생 백진희와 안내상 가족이 이 시트콤 전반에 병치된 것은 이 두 상황이 거의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루 아침에 빚더미에 올라 길바닥을 전전하는 홈리스가 된 상황. 그리고 각각 윤계상의 집과 박하선의 집에 얹혀사는 상황. 화장실을 뚫고 나와 부딪치게 되는 안내상과 백진희는 이 절박한 패자들이 만나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지점이다. 그들은 함께 공존하는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안간힘을 쓸 것인가.

시트콤은 물론 웃음을 주는 코미디 장르지만, 또 한편으로 시추에이션(상황)이 환기하는 현실적인 코드들이 중요한 장르이기도 하다.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이 독특한 것은 이러한 현실적 상황들을 가져오면서도 그것을 슬랩스틱이나 화장실 유머처럼 누구나 볼 수 있는 장면으로 연출해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사회적 맥락을 이해 못하는 아이들조차 쉽게 웃을 수 있으며, 동시에 어른들은 그 맥락이 주는 풍자적인 쾌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시청층이 폭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킥3'의 백진희 장면에 등장한 모자이크 논란은 충분히 예고된 것이다. 그만큼 자극적인 연출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모자이크로 인한 논란이 자칫 '하이킥3'가 본래 의도했던 다른 맥락들까지 모두 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모자이크와 노출이라는 나무가 아니라, 그런 장면이 왜 나왔는가 하는 숲을 볼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