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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천 일', 추억과 시간에 관한 슬픈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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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일', 얼마나 슬픈 얘길 하려는 걸까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스토리는 신파지만 이 대목은 들을 때마다 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아." 나비부인의 한 대목을 들으며 서연(수애)은 지형(김래원)에게 말한다. "신파 싫어하잖아." 지형의 물음에 서연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삶이 사실은 신파였다고 한다. 이 짧은 대화는 이 '천일의 약속'이라는 드라마를 말하는 듯하다. 신파? 신파면 어떤가. 그것이 우리네 인생의 비의를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다면.

'천일의 약속'에는 자주 인물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상투적인 설정들을 언급한다. 서연은 지형과 감히(?)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드라마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빈부 격차에 의한 부모들의 결혼 반대 같은 걸 찍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향기(정유미)와의 결혼날짜가 정해지자 지형이 그의 어머니인 수정(김해숙)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며 이미 양가가 정해놓은 결혼을 되돌릴 수 없느냐고 물을 때도 드라마 얘기가 나온다. 수정은 자신이 서연에게 직접 전화하는 그런 '막장'까지는 하게 하지 말라고 지형에게 당부한다.

'천일의 약속' 그 자체가 드라마지만 이렇게 드라마 얘기를 끌어옴으로써 하려는 얘기는 명백하다. 많은 사람들이 상투적이라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하는 그 얘기가 때로는 우리 삶의 진실을 말해주기도 한다는 것. 실제로 이 드라마의 설정은 지극히 상투적이다. 다른 빈부의 삶을 살아온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걸 반대하는 부모들. 게다가 치매라는 병까지. 만일 이것이 김수현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그 설정만으로 단박에 또 불륜에 불치냐 하는 비판을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천일의 약속'은 그런 상투적인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그 삶의 상투성을 '기억'이라는 차원으로 다시 보게 함으로써 그 상투성을 극복하려는 드라마다. 서연이 치매를 앓게 된다는 설정은 그저 신파를 강화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서연과 지형이 헤어지려 만난 이 드라마의 첫 번째 시퀀스는 지극히 상투적인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우리 삶의 한 자락이 압축되어 있다 여겨지는 건 바로 이 기억의 문제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서로 만나러 달려가며 설레고, 늦게 왔다며 투정하고 싸우고, 그러다가 이 짧은 시간이 아까워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불타오르다가 결국 끝이라는 걸 알고는 괴로워한다. 헤어지면 바로 그 기억을 싹 잊어버리고 새 삶을 살겠다는 서연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오열하고 만다.

헤어지는 이들에게 기억이란 그처럼 천형 같은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 손에 잡을 수 없는 기억이란 오히려 지워버리고픈 고통이 되곤 한다. 그런데 이제 점점 기억을 잃어가게 될 서연은 과연 이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려 할까. 아니면 아무리 아파도 그 기억의 한 자락이 사실 가녀리기 그지없는 우리네 삶의 본질이었다며 끝끝내 부여잡으려 할까. 추억과 기억의 차이는 그리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라는 작중인물의 얘기처럼 그녀는 이 아픈 기억조차 추억으로 간직하려 할까.

우리 삶을 기억의 한 조각으로 포착하려는 '천일의 약속'은 그래서 그만큼 아프고 슬픈 이야기다. 기억은 삶이고 기억을 잃는 것은 죽음이다. 하지만 기억이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라지지만 누군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는가가 중요한 삶의 문제인 건 그 때문이다. 그러니 이 짧고 가녀린 삶에서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힌 채(그녀는 동생을 엄마처럼 키웠고,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책을 쓰고 있다) 살아온 세월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 5년 후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10년 뒤에는 어떨까. 우리 마음 어떤 식으로 변해갈까. 너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나는 너를 언제쯤이면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내려놓을 수는 있을까." - 지형

"5년 후 쯤이면 아빠가 되어 있겠지. 10년 뒤에는 40대 아저씨가 되어 있겠지. 그 때쯤이면 오늘이 누렇게 흐릿해진 사진이 되어 있겠지.... 겹겹이 날들이 쌓여가고 당신한테 나는 공룡시대의 화석이 되겠지." - 서연

그래서 이제 그들은 그 마지막 기억의 한 자락을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사랑할 것이다. 미워할 것이다. 힘겨워할 것이고 아파하면서 행복해할 것이다. 우리네 기억 속에 남겨지는 그 모든 상투적인 것들이 사실은 우리네 삶이었다고 슬프게 긍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긍정은 우리를 어쩌면 영원하게 만들어줄 지도 모른다. 불멸을 피할 수 없는 삶이지만 누군가의 기억을 통해 우리는 불멸하는 존재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니. '천일의 약속'은 그 지독히도 슬픈 기억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