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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뿌리', 이토록 인간적인 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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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 자신과 싸워야했던 고독한 군주의 초상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가 그리는 세종은 대단한 파격이다. 욕쟁이에, 똥지게를 지고, 개소리를 연구하는 왕. 게다가 어린 시절 아버지 이방원(백윤식)의 피의 정치를 보고 자라며 갖게 된 트라우마는 그를 정신분열의 상태로까지 몰아넣는다. 세종(한석규)이 젊은 세종(송중기)과 논쟁을 벌이는 이 셰익스피어 희곡 같은 장면은 이 왕의 깊은 내상을 밖으로 드러낸다. 아버지와는 다른 정치를 하려 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이상적이고 힘겨운 것인가를 실감하며 절망하는 세종의 내면이 이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도대체 이 왕은 무엇이 그리도 괴로운 걸까.

일찍이 마방진 에피소드에서 상징적으로 제시되었듯이 세종은 왕 하나만을 남기고 필요하면 모두 제거해버리는 아버지 태종의 패도정치가 아니라, 모든 백성이 저 마다의 자리를 잡아서 함께 살아가는 모두가 상생하는 정치를 꿈꾼다. 즉 태종이 죽이는 정치를 했다면 세종은 살리는 정치를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린 첫 번째 백성, 똘복(장혁)은 그를 죽이려 궁에 들어와 있고, 어린 시절 아버지 태종의 실체를 까발리고 자신을 조롱했던 정기준을 살리려 했으나 그 역시 밀본의 수장으로 돌아와 자신의 학사들을 죽이고 있다. 그는 살리려 하지만 그들은 죽이려 한다.

세종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홀로 고독하게 싸우고 있지만, 그런 왕을 이해하는 이들은 없다. 세제개혁을 위해 새로이 여론을 조사하겠다는 얘기에 조정은 술렁이고 신하들은 반기를 들려 한다. 그런 신하들을 바라보며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반문하는 장면에서는 왕의 외로움이 묻어난다. 갖은 명분을 붙여 자신이 하려는 일을 막아 세우는 그들을 보며 새로운 나라를 꿈꾼 왕의 절망감은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왕을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 나인에 불과한(그것도 말 못하는) 소이(신세경)라는 건 아이러니다. 모두가 왕의 책임을 묻고, 왕 스스로도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할 때, 소이는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라고 말해준 유일한 인물이다.

"이 조선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다." 이 아픈 고백은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외로운 심사가 겹쳐져 있다. 장인어른이 아버지 태종에 의해 죽게 되었을 때, 소헌왕후조차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이 모두가 전하 때문이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간 사극이 좀체 깊게 다뤄지지 않았던 왕이란 존재의 고독을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왕이란 자리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물이 아니다. 세종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온전히 백성을 위한 삶을 꿈꾸면서, 본인은 정작 깨질 듯한 두통과 참을 수 없는 트라우마에 불면의 밤을 지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사극의 팽팽한 긴장감은 어찌 보면 밀본이라는 세력이 가진 위협감이나 똘복이라는 복수의 화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긴장감은 세종의 내면 속에 있다. 자신이 꿈꾸는 조선을 위해 '살리는 정치'를 하려는 자아와,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괴로워 이를 모두 포기하고픈 자아가 부딪치는 것. 똘복과의 대결이 아니라, 똘복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세종의 갈등 속에 이 팽팽한 긴장감이 들어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사극은 기묘한 지점이 생겨난다. 마방진의 숫자 하나가 달라지면 전체가 흐트러지듯이 사극의 한 사건은 왕에게도 고스란히 그 여파가 전달된다. 외적인 상황들이 사건으로 터져 나오지만 그것이 결국 세종의 내면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세종이 욕을 하고 기물을 때려 부수거나 누구의 책임이냐를 두고 소이를 윽박지를 때 이 사극의 긴장감은 그래서 더 고조된다. 얼마나 인간적인 왕인가. 백성을 위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이것은 아버지 태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삶이 지독스럽게 고통스럽고 외롭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왕. '뿌리 깊은 나무'가 보여주려는 그 깊은 뿌리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그 꽃이 아니라 그 꽃이 피어나기까지 꿈틀대고 괴로워했던 세종의 내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