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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영화로 세상보기

가을극장 물들이는 4색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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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마이 파더’, ‘두 얼굴의...’, ‘즐거운 인생’

물 드는 건 가을 나무들만이 아니다. 가을을 타고 온 영화들이 선보이는 사랑의 다채로운 색깔 역시 극장을 물들이고 있다. ‘디워’와 ‘화려한 휴가’로 대변되는 여름방학 영화 시즌이 사회적 논쟁으로 물들었다면, 추석과 함께 시작되는 가을 영화 시즌은 ‘사랑’으로 물들고 있다.

남자의 사랑, 곽경택 감독의 ‘사랑’
“지랄 같네. 사람 인연.” 낮게 읊조리는 채인호(주진모)의 이 대사는 이 영화가 가진 결을 모두 내포한다. 먼저 거친 대사에 걸맞게 이 영화는 남자의 사랑을 다룬다. 멋지고 쿨한 남성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여성들의 환타지가 있다면, 가녀린 여성을 끝까지 지켜주는 마초적인 남성들의 환타지도 있다. 여성들의 환타지가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 요즘, 남성들의 환타지는 과연 그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멜로는 여성의 전유물이란 공식을 깨고 남성들의 멜로가 새로운 코드가 될 수 있을까. 여러 모로 귀추가 주목되는 작품이다.

곽경택 감독의 전작들과 유사한 굵직한 남성성의 맥락을 갖고 있는 이 영화는 ‘친구’의 연장선상에서 읽히며 남성들의 사랑에 꼭 등장하는 ‘사람 인연’의 문제를 끼워 넣는다. 즉 성공이라는 축과 사랑이라는 축이 부딪치는 그 지점에 영화적 긴장감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확대해서 보면 남자들의 삶이란 결국 이 두 축의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어떤 것이다. ‘친구’에서 그것이 성공이란 측면으로 달려갔다면, ‘사랑’에선 사랑으로 달려간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그 어느 쪽의 길도 해피엔딩은 없었다. 그것이 감독의 세계관인지 아니면 남자들 삶 자체가 비극적인 것인지는 전적으로 관객들이 판단할 몫이다.

깊이 있는 사랑, ‘마이 파더’
‘마이 파더’를 가지고 제목에서 연상해 아버지 영화일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이 영화는 ‘파더’, 즉 아버지가 아닌 ‘마이’라는 주인공의 관점에 맞춰지는 영화다. 그것도 굳이 ‘파더’가 아닌 ‘마이 파더’라는 ‘나의’ 아버지라는 관점이 중요하다. 실제 잘 알려진 인물인 제임스 파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아버지 황남철(김영철)과 제임스 파커(다니엘 헤니)는 그저 평범하게 부자관계로 얘기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제임스 파커가 가진 자신을 버린 모국에 대한 이야기고, 그 모국과 동일시되는 아버지 황남철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가 전하는 사랑의 해답은 입양된 이들이 모국을 찾아 부모를 찾을 때 흔히 하는 말속에 숨겨져 있다. “어머니, 아버지 안 미워해요.” 제임스 파커가 가진 부모에 대한 이 입장은 황남철과 그가 단순한 부자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측면에서 모국에 대한 입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가족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된다. ‘마이 파더’는 사실 세상의 모든 모래 같은 관계들에 던지는 제임스 파커란 실제인물의 인간에 대한 끈끈한 사랑을 전하는 영화다. 두 말할 것 없는 김영철이란 배우의 존재감과 더불어 다니엘 헤니의 연기자로서의 변신을 즐기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영화다.

성장하는 사랑, ‘두 얼굴의 여친’
‘두 얼굴의 여친’은 마치 ‘엽기적인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처럼 가볍지만은 않은 영화다. 영화는 두 얼굴을 가진 여친, 아니(정려원)의 엽기발랄로 상큼한 코미디 영화처럼 시작한다. 초반부 만화 같은 연출과 제목에서 풍겨지듯 좀체 무거워질 필요가 없을 듯 여겨지던 영화는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제목처럼 두 얼굴로 변신한다. 초반부 ‘여친’과의 애정모드로 시작한 이 영화는 점점 ‘두 얼굴’이 갖는 정체성의 문제로 빠져든다.

‘여친’을 사랑하는 구창(봉태규)은 그녀의 두 정체성을 모두 받아들이는 사랑의 성장을 겪게 되지만 영화는 거기서 발랄하게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반전으로 좀 무거운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청춘의 발랄한 사랑과 고민스런 성장을 그려내며 후반부에서 완벽하게 변신하는 이 영화는 코미디에서 시작해 좀 무겁다 싶은 멜로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영화 곳곳에 숨겨진 톡톡 튀는 대사와 아이디어들은 영화의 설정 자체가 갖는 약점들을 극복하고도 남게 만든다. 시종일관 웃다가 허전한 퇴장이 아닌, 어딘지 찡한 구석을 만드는 사랑 영화를 찾는다면 권할 만한 영화다.

인생에 대한 사랑, ‘즐거운 인생’
“인생 뭐 복잡할 거 있나. 즐겁게 살면 되는 거지.” ‘즐거운 인생’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세상에 던지는 신나는 모반이다. 늙다리가 되어가면서 참 인생 별거 없다고 생각할 즈음, “아닙니다. 당신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당신은 지금 충분히 즐거운 인생을 살 자격이 있습니다.”하고 말해주는 그런 영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실에 치이면서, 정작 사랑하지 않았던 자기 인생을 보듬어주는 그런 영화가 ‘즐거운 인생’이다.

무거운 현실의 이야기를 비틀어 웃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이준익 감독 특유의 유머와 인생 패배자들 역할을 더도 덜도 아닌 무게감으로 연기해내는 정진영, 김윤석, 김상호의 연기력, 게다가 그 쟁쟁한 연기자들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장근석의 존재감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즐거움을 준다. 지금이라도 내 삶이 어딘가 엇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번쯤 현실을 내려놓고 푹 빠져서 보길 권한다. 어쩌면 웃다 울다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추석 시즌에 맞춰진 사랑을 담은 영화들은 포스터가 담아내는 것처럼 사람들을 다룬다. 그 사람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들 영화들이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느 것이든 자신을 반추하게 만드는 이들 사랑을 담은 영화들은, 흘러가는 삶의 한 지점을 갈무리하는 이 시기에 다채로운 결로 우리의 감성을 건드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