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 사이, 사랑과 행복
변심한 애인 때문에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나버린 분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어떤 희망을 읽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 사랑이란 언감생심이었던 분이라면 이 영화를 통해 그 낮은 자리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임을 알게 될 지도 모른다. 도시에 살면서 도시가 제공하는 욕망에 허우적대다가 어느 날 아침 “이게 뭔가? 이렇게 사는 게 재밌나?”하고 반문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줄지도 모른다.
허진호 감독의 ‘행복’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명제들이지만 너무나 흔하게 취급되어온 사랑, 행복 같은 것들에 대한 대부분의 질문에 답을 주는(그것이 정답일지 아닐지는 관객의 몫이지만) 영화다. 도시생활에 찌들어 병을 앓게 된 영수(황정민)가 요양원에서 은희(임수정)를 만나 사랑하고, 그러다 몸이 낫게 된 영수가 변심해서 다시 도시로 떠나온다는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라인은 오히려 섬세한 감독의 손길을 거쳐 강렬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남녀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짧은 행복에 대한 감독의 담담한 시선은 거기에 숨겨진 흔해빠진 사랑과 행복의 진짜 얼굴을 발견하게 만든다.
‘행복’은 전작이었던 ‘외출’보다는 그 이전 작품인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와 맥을 같이 하는 영화다. 첫 작품인 ‘8월의 크리스마스’가 이 영화에 죽음이라는 벽 앞에 선 남녀의 사랑과 행복이라는 모티브를 제공했다면, ‘봄날은 간다’는 도시와 자연이라는 틀 속에서 변화하는 사랑이라는 모티브를 제공한다. 그러니 어찌 보면 ‘행복’은 허진호 감독이 거의 10년이란 세월을 에둘러 도착한 첫 번째 기착지인 셈이다. 그는 늘 삶의 시간이라는 불변의 축 위에서 변하는 사랑의 양상을 포착해왔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그것이 시한부인생으로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정원(한석규)이라는 불가항력과 그의 사진관에 놓여진 가장 밝은 모습으로 웃는 다림(심은하)의 사진으로 대변된다. 허진호 감독은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사랑)을 사진(영화)이라는 틀 속에 영원히 잡아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봄날은 간다’에서는 변하는 사랑을 보여주는 은수(이영애)와 거기에 집착하는 상우(유지태)의 도시적인 사랑을 보여주면서 여기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연의 흐름을 포착해낸다. 허진호 감독은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를 통해 바로 그 자연의 소리로 대변되는 변하지 않는 것을 영원히 담아내려 한다.
그 연장선 위에서 ‘행복’은 변하는 것을 대변하는 영수와 변하지 않는 것을 대변하는 은희를 대비시킨다. 놀라운 것은 감독이 이 두 캐릭터 속에 남성과 여성, 도시와 자연, 소비와 창조 같은 다양한 대비되는 코드들을 녹아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화는 남성의 욕망과 여성의 사랑으로 읽히기도 하고, 도시생활이 주는 피폐함과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으로 읽히기도 한다. 소비적이고 중독적인 삶이 만들어내는 불건강과 불행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만들어내는 건강과 행복으로 대비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메타포가 관념적인 영상이 아닌 영수와 은희의 캐릭터를 통해 체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의 감상 폭을 무한히 확대시킨다. 그저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만으로도 가슴이 폭발할 것 같은 아련함을 선사한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유머로 한껏 웃다가, 또 그들의 예쁜 사랑으로 한껏 가슴이 설레는 감정에 휩싸이다, 슬픔을 넘어서 관조적인 입장이 주는 즐거움까지 영화는 다양한 각의 재미를 선사한다.
그러니 ‘행복’은 가을날 한 때의 분위기 있는 멜로 영화로 봐도 충분한 영화다. 그리고 그 멜로 영화를 보면서 혹여나 우리 삶이 가진 조건, 즉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미묘하게 떨리면서 공존하는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특별한 즐거움이 될 것이다. 우리네 삶을 유한한 육체적 조건과, 그걸 넘어서기 위한 (이를테면 사랑이나 행복 같은) 무한한 정신적 조건의 끝없는 동거라고 본다면 이 영화는 제대로 그 삶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이런 삶 속에서 고통스럽거나 혼돈에 빠진 현대인들이라면 ‘행복’은 거기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를 감동으로써 전해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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