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 시각 돋보인 ‘궁녀’의 아쉬움
최근 개봉한 ‘궁녀’와 움베르토 에코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장미의 이름’은 여러 모로 닮았다. ‘장미의 이름’이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면, ‘궁녀’는 궁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을 다룬다. ‘장미의 이름’에서 사건을 다루는 윌리엄 신부(숀 코넬리)가 있다면 ‘궁녀’에는 내의녀인 천령(박진희)이 미궁의 사건을 조사한다. 윌리엄 신부에게 수련제자 아조(크리스찬 슬레이더)가 있었다면 천령에게는 숙영(한예린)이 있다.
무엇보다 유사한 점은 수도원과 궁이라는 이 두 공간이 주는 느낌이다. 먼 거리에서 봤을 때 신성한 장소로 생각되어온 이 공간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 곳은 기괴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야만의 공간이 된다. 주로 어둠 속에서 등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천령과 윌리엄의 모습은 야만으로 대변되는 중세사회의 어둠을 이성으로 비춰나가는 르네상스에 세례 받은 인물들로 보인다.
두 영화가 모두 공포와 미스테리적인 기법으로 그려진다는 점도 유사한 점이다. 신성하고 밝은 이미지로만 인식됐던 수도원과 궁의 이면을 잡아내기 위해서, 이 기법은 유효하다 할 것이다. 공포의 공간으로 변한 그 곳에서 가녀린 빛(이성)에 의지해 진실을 찾아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성과 야만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결의식은 권위의 이면에 숨겨진 야만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할 것이다.
‘궁녀’는 이러한 의미 이외에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코드를 부여한다. 궁의 남성이 아닌 여성들, 즉 궁녀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는 말이다. 영화 속에서 왕인 남자는 그저 희빈이나 중전과 성관계를 벌이는 인물 정도로 그려진다. 또 한 명의 남자인 정랑(김남진) 역시 바람둥이 정도로만 보여진다. 그리고 영화는 시종일관 궁녀들의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관행을 포착해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성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지만 결국 여성들을 그렇게 만든 남성들에게 비판의 칼날을 드리우고 있다. 이것 역시 수도사를 통해 중세사회의 억압을 그려낸 ‘장미의 이름’과 유사한 접근이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장미의 이름’은 영화가 하려는 내용이 그러하듯이 끝까지 이성적인 수사를 그 중심에 두었지만, ‘궁녀’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천령의 수사가 이 궁의 비밀을 파헤치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지만, 영화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궁이라는 견고함을 도무지 이성이라는 것 하나로 무너뜨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성으로서의 억압이 그토록 깊다는 반증일까. 영화가 추리형식에서 공포물로 돌변하는 상황에 이르면 이성은 실종되고 만다.
‘궁녀’는 분명 그 시도자체가 의미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남성 중심의 역사관을 표징하는 궁이라는 공간의 적나라한 속살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좋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분명히 남는다. ‘한’과 같은 감정적인 대응으로는 견고하고 뿌리깊은 남성들의 세계를 무너뜨리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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