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M’,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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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D.H.Jung 2007. 10. 17.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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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미로 속에서 찾은 소중한 기억

누구나 무언가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삶은 채워지는 만큼 비워내야 하고 그 비워낸 것은 기억 저편으로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그 잊혀진 기억들은 정말 영원히 사라진 걸까. 아니다. 그것은 저 무의식의 어두운 창고 속에 숨겨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의식이 잠을 자는 순간 작은 틈새를 타고 창고를 빠져나온다. ‘M’은 바로 그 무의식의 창고 속에 숨겨져 있던 첫사랑을 안타깝게 대면하는 영화다.

빛과 어둠으로 포착한 몽환의 세계
영화는 최연소 베스트셀러 소설가 민우(강동원)의 1인칭 시점으로 그의 무의식을 따라간다. 그러니 영화 속에는 세 가지 차원이 겹치게 된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무의식과 의식이 혼재된 소설이다. 이 세 차원이 겹치는 영화 초반부의 비연속적이며 비논리적인 이미지들의 폭풍은 보는 이를 당황케 만들 정도로 파격적이다. 영화의 내러티브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 하지만 기성영화문법이나 이미지에 저항하지 않고 보다보면 그 새로움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선명하게 무의식의 이미지를 잡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명세 감독이 이미 ‘형사, Duelist’에서 실험한 바 있는 어둠으로 포착되는 빛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둠은 투명한 액체처럼 경계를 나누고 그 밖으로 튀어나온 빛에 어떤 표정을 만든다. 민우가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 때, 중요한 것은 드러난 얼굴이 아니라 어둠 저편에 숨어있는 수많은 표정들이다. 빛으로 드러난 얼굴이 의식이라면 드러나지 않는 어둠은 무의식이 되는 식이다.

이 빛과 어둠으로 포착되는 비연속적이고 비논리적인 꿈의 이미지들은 그러나 놀라운 경험을 안겨준다. 내러티브 없이 던져지는 이미지와 알 수 없는 효과음만으로도 영화는 멜로의 잔잔함과, 미스테리의 긴박감, 코미디의 경쾌함 같은 것을 모두 느끼게 해주니까. 이야기 없이도 이미지가 전달하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이명세 식의 새로운 영화에 빠져들었다는 얘기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들어가는 멜로
그런데 도대체 왜 영화는 민우의 무의식을 이다지도 거창한 긴박감과 경쾌함을 넘나들며 전달하려 하는 것일까. ‘M’이 가진 나름의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얘기해보면 허탈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잘 나가는 소설가 민우가 은혜(공효진)와 결혼하기 전, 첫사랑이었던 미미(이연희)를 떠올린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 구조는 무의식을 그대로 이미지화 하는 영상과 만나면서 산 자인 은혜와 죽은 자인 미미 사이에 갈등하는 민우라는 기이한 멜로를 형성한다.

즉 (민우의 기억 속에 있는) 미미는 민우가 은혜와 결혼하면서 자신이 잊혀질까봐 전전긍긍한다. 물론 이것은 논리적으로 말하면 미미라는 첫사랑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은혜라는 사랑을 맞아들이는 민우의 죄책감 같은 것이다. 민우는 소설을 통해 미미에 집착하고, 은혜는 살아있는 자신보다 죽은 미미에 빠져드는 민우를 못마땅해 한다. 그리고 민우는 수많은 거울 앞에서 갈등한다. 거울 저편으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이쪽에 남을 것인가. 물론 결론은 나와 있다. 미미가 무의식, 꿈의 인물이라면, 은혜는 현실의 인물. 따라서 민우가 현실을 포기하고 꿈을 선택할 리가 만무하다.

‘M’, 잃어버린 기억을 부르는 암구호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민우의 내레이션처럼 우리네 삶의 한 부분을 말해준다. 누구나 지워버린 기억이 있고 그 지워진 자리는 새로운 기억이 차지한다. 그것은 어느 날 카페에서 받았다가 잃어버린 성냥갑처럼 아주 작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은 것은 우리 마음 속에 한 때는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소중한 것이었다. 영화는 지워져 가는 기억을 대변하는 미미가 첫 장면에서 하는 말을 되새기게 만든다. “난 나중에 당신이 아주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 재미있는 영화를 보다가도 내 생각이 나서 펑펑 울었으면 좋겠어.” 소중하지만 지워져가는 기억에 대한 안타까움이 압축된 이 대사는 이명세 감독이 관객들에게 ‘M’을 선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M’은 그러니까 잃어버린 기억을 부르는 암구호이다. 그것은 미미에게 민우일 수도 있고, 민우에게 미미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민우에게 미미가 그렇듯이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는 영감(Muse)일 수 있고,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기억(Memory)일 수 있다. “해봐요. 머리 속에서 빙빙 돈다는 얘기. 담배연기를 뿜어내듯 머리 속에 있는 얘기를 시원하게 뿜어내 봐요.” 미미의 이 말은 관객에게 실로 의미심장하게 다가갈 것이다. 깊은 어둠 속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녀린 성냥불에 의지해 길을 찾아나가듯, 영화를 보며 각자 자신만의 소중한 ‘M’을 찾아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