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시대, 낯선 작품의 가치
이명세 감독의 새 영화, ‘M’이 떠올리게 하는 두 인물이 있다. 그것은 난해한 시와 소설로 당대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던 천재적인 시인 이상과, 불우한 삶을 거름 삼아 전복적인 소설을 써냈던 카프카가 그들이다. 스토리로 보자면 결혼을 앞둔 민우(강동원)가 첫사랑이었지만 잊고있었던 무의식 속의 미미(이연희)를 떠올린다는 것이 전부. 하지만 이 단순한 스토리는 이명세라는 독특한 자의식을 만나 기묘하고 낯선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상, 질주하는 그들과 거울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로 시작하는 오감도의 첫 소절처럼 영화 ‘M’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쫓고 쫓기는 긴박한 꿈에서 시작된다. 민우(강동원)는 먼저 도심의 거리에서 자신을 쫓는 알 수 없는 시선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 시선을 자신이 쫓기 시작한다. 어두운 골목길로 질주하던 그는 그 곳, 루팡 바에서 그 시선이 미미(이연희)라는 소녀라는 걸 알게된다. 그러자 그 후부터는 미미가 우산을 든 그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꾸게 된다. 미미는 민우를 쫓고, 민우는 미미를 쫓으며, 미미는 그 누군가에게 쫓기는 이 반복된 이미지는, 이상의 ‘오감도’가 자아내는 의미를 찾기 힘든 단어의 반복과 그럼에도 느껴지는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을 똑같이 직조해낸다.
이상이 무의미한 단어의 조합을 통해 무의식의 초현실적인 느낌을 포착한 것처럼, ‘M’은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물론 극도로 의도된 영상들이지만) 영상들을 통해 의미를 지워버리고 대신 느낌을 얻는다. 비논리적이고 단절된 영상들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들은 때론 코미디가 되고, 때론 비장해지며, 때론 미스테리가, 때론 멜로가 된다. 이러한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쏟아내는 이유는 우리네 꿈 혹은 무의식의 세계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처음의 혼재된 의식과 무의식의 이미지들은 그러나 차츰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분열되는 부분에서 이상의 모티브가 또 등장한다. 그것은 거울이다.
민우는 거울 앞에서 저편의 세계를 기웃거린다. 저편 세계(무의식)를 공간화한 루팡 바를 찾아가는 길에는 여지없이 거울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하나의 그림처럼 구성된 화면 속에 어딘가로 가는 골목길이 있고, 길 벽에 거울이 걸려 있는데, 그 거울 속에는 아직 화면 속으로 들어오지 않은 민우가 비춰진다. 의식 저편에 서 있는 민우가 그러나 화면 속으로 들어오면 거울 속에 있던 민우의 얼굴은 사라진다. 이 장면처리는 민우가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거울 이편에서 저편으로 넘어갔다는 걸 보여준다. 이밖에도 무수히 등장하는 거울의 이미지들은 저 이상이 자주 그려낸 분열되고 불안한 자아를 그린 시들의 모티브가 된 거울과 같다.
카프카, 인공으로 빚어낸 완결된 세계
“‘M’의 시놉시스 작업당시 주인공 민우를 구상할 때 처음 떠오른 것은 카프카의 젊은 시절을 담은 사진 한 장이었다.” 이명세 감독의 이 말은 그러나 카프카처럼 안경을 끼고, 묘한 분위기를 내는 천재적인 소설가로서의 민우라는 캐릭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카프카적인 분위기는 이명세 감독의 초기작부터 ‘M’까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영상미학과 연결되어 있다. 늘 실제 현실이 아닌 세트를 통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명세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혼동하게 만든다.
분명 인공으로 제작된 가짜 이미지인데, 실제보다 더 정확한 느낌을 전달하는 이유는 뭘까. 카프카가 기괴한 내면의 세계를 실제 현실처럼 그려내는 것처럼, 이명세 감독 역시 내면에 심상화된 이미지를 잡아내기 위해 인공적인 가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실제 거리의 모습은 날씨와 사람들, 시간 등등에 따라 한없이 다른 이미지들을 던져주지만, 만들어진 인공의 거리는 감독이 전달하려는 그 느낌만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명세는 따라서 외면이 아닌 내면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작가라는 의미에서 카프카를 닮았다. 인공적인 세계 속에서 ‘아 나도 저런 거리에서 매미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하고 생각할 때, 그가 만든 영상은 비로소 정확히 관객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대중문화 시대, ‘M’의 가치
바야흐로 대중의 시대. 누구나 몇 천 원이 있으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요즘, 그 힘을 갖고 있는 자는 작가나 감독이 아니라 대중이다. 과거처럼 예술가로서의 감독이 자신의 세계관을 그려내는 작품보다, 대중들의 기호를 파악해 상품으로 제작되는 기획작품이 더 많아지는 것은 바로 이런 시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것은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장르에 있어 당연한 선택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작품이 장르적이고 관습적인 영상으로만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대중들에게 익숙한 선택만으로 영화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것이고, 결국에는 사라지지 않을까. 헐리우드를 위시한 장르 영화들이 극장가를 가득 메우고 극장 역시 테마파크화 하는 이 때 내러티브를 버리고 영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이미지로 돌아간다는 건 어찌 보면 무모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분명한 건 이명세 감독의 말처럼 “영화에서 이미지를 주무르는 건 모국어를 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떤 문법과 틀에 익숙해졌다고 해서 그것과 다른 형식을 보여주는 시도를 불친절하다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않는 창작자의 태도야말로 관객에게 불성실한 것은 아닐까. 낯선 것은 불편한 것이 아니다. 생각을 바꾸면 낯선 두려움은 새로운 설렘이 되기도 한다. 이상과 카프카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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