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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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하다, 예술적으로

D.H.Jung 2007. 11. 29.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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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와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이 예술적인 이유

‘야한 것’과 ‘예술적인 것’은 상반된 것일까. 왜 똑같이 적나라한 성기 노출을 해도 어떤 것은 포르노가 되고 어떤 것은 예술이 될까. 그것은 ‘노출을 위한 노출’인가 아니면 ‘작품의 통일성 속에서 반드시 드러나야 하는 노출’인가의 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안 감독의 ‘색, 계’와 ‘실낙원’의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사랑의 유형지’는 분명 야하긴 하지만 후자에 속할 것이다. 이 두 영화는 정말 야하다. 예술적으로.

‘색, 계’의 노출, 합일될 수 없는 육체의 경계를 그리다
아무리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에 빛난다 해도, 또한 이안 감독의 작품이라 해도, ‘색, 계’의 무삭제 개봉은 지금까지의 우리네 상황을 두고볼 때 파격적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가위질 없이 제대로 볼 수 있게된 건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색, 계’는 노출 신을 잘라내면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살과 살의 부딪침만으로 가장 적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 교접의 욕망을 나타내는 ‘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계’를 그리고 있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수많은 ‘경계들’이다. 그것은 크게는 일본과 중국이라는 나라 사이의 경계이기도 하고, 홍콩이라는 동서양 문화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 배경으로 제시되는 경계 속에서 왕치아즈(탕웨이)와 이(양조위)는 스파이와 스파이가 제거해야할 남자로서 마주 서게 된다. 왕치아즈는 그 남자와 마주하기 위해 수많은 자신 속의 경계를 넘어선다. 정조를 버리고 막부인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의 경계를 넘은 왕치아즈는 자꾸만 이에게 빠져들면서 자기존재의 경계에서 서성댄다. 그러니 이 경계의 최전선은 왕치아즈와 이가 교접하지만 하나가 될 수 없는 살의 경계이다. 이로써 ‘색, 계’의 노출은 가장 파격적이면서도 가장 주제를 압축하는 예술로 승화된다.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  사회적 규범을 넘는 사랑을 그리다
‘사랑의 유형지’는 여러 모로 와타나베 준이치의 ‘실락원’을 닮았다. 사회적 규범을 넘어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드는 불륜남녀는 급기야 사랑의 파국으로 치닫는다. “날 사랑한다면 날 죽여줘요”라고 말하는 후유카(테라지마 시노부)는 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키쿠지(토요카와 에츠시)의 손에 웃으며 죽음을 맞게된다. 영화는 이미 사회적 규범을 넘어 저질러진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과 그것을 법이라는 잣대로 난자해버리는 현실을 병치시킨다. 살인자로 기소된 소설가인 키쿠지는 후유카와의 불꽃같은 사랑을 문학적인 틀로 설명하지만 법은 끔찍할 정도로 그 사랑을 더러운 불륜과 살인으로 몰고 간다.

이미 벌어진 살인사건 후 키쿠지의 조서와 회고담으로 구성된 영화는 사회적 규범은 물론이고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사랑의 힘을 그린다. 따라서 사회적 잣대와 치열한 대결구도를 갖는 영화는 그 반대급부로서 거침없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두 남녀를 세운다. 이들의 안타까운 살들의 부딪침은 결국 이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의 끝이 죽음임을 암시한다. 결국 죽음으로서 사랑을 얻은 후유카는 그 어느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위대한 사랑을 그려낸다. ‘사랑의 유형지’의 정사 신은 절정과 죽음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조건을 상징적으로 담는다.

노출은 그것이 예술적인 맥락 속에서 보여질 때 가장 파격적이면서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란 그저 생식과 정욕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한 사회와 긴밀하게 연관된 인간의 안타까운 존재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노출된 맨살이라 해도 어떤 경우 절망적이고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몸이라는 유한한 틀이 가진 비극성 때문이다. 몸은 슬프고 그 안에 대부분의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것이 ‘색, 계’와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이 야하면서도 예술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