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뿔났다’, 그녀들을 뿔나게 한 것
‘엄마가 뿔났다’의 엄마 김한자(김혜자)는 자식들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다. 세탁소 일을 하고 있는 아들 영일(김정현)의 아이를 가졌다며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미연(김나운)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막내 영미(이유리)는 밥벌이도 못하는 남자(실제론 재벌2세이지만)와 결혼을 하겠단다. “내 인생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사실상 대부분의 자식 가진 엄마의 마음을 제대로 잡아낸다. 세상에 제 맘대로 되는 자식 가진 부모가 몇이나 있을까.
그래서 그녀는 늘 ‘안해요! 못해요!’하고 말하면서 화를 내거나 때론 눈물을 보인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걱정되어 찾아온 자식들 앞에서 그녀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며 언제 그랬냐싶게 금세 웃어 보인다. 이 조울증에 가까운 태도변화는 갑작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것은 그녀의 웃는 얼굴 뒤에 숨겨져 있는 세상 엄마들 모두가 가지고 있을 아픔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 나일석(백일섭)은 늘 이렇게 말한다. “결국엔 할 거면서 당신은 꼭 그러더라.” 속으로 뿔나면서 겉으로는 웃는 그 엄마의 마음은 내레이션 속에서나 흘러나올 뿐이다. 남자들이건, 자식들이건 일단 저질러놓고는 “사랑해서 미안혀”라고 말하면 그뿐인 존재들 아닌가. 그래서 뿔난 엄마가 어느새 웃는 낯으로 대할 때 그들은 “엄마 벌써 풀렸구나”하며 으레 그래왔고 그래야 할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렇게 뿔난 그녀를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관성적인 살림의 손길 때문이다. 그녀는 늘 손이 바쁘다. 흔히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입으로는 연실 자식 걱정과 뿔난 심사를 수다로 뽑아내면서도 손은 쉴 틈이 없다. 같은 날 태어난 남편과 시누이의 생일 상을 차리면서, 아이까지 데리고 들어온 며느리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면서, 맏딸 영수(신은경)의 오피스텔에 반찬거리를 가져가면서, 갑자기 찾아온 막내 영미의 남자친구 정현(기태영)을 위해 저녁거리로 뭘 준비할까 고민하면서, 아기 목욕을 시키고 콩나물을 다듬고, 빨래를 끓이면서 나오는 그녀의 수다를 듣다보면 말과 행동이 서로 상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안한다. 못한다 하면서도 몸은 늘 그녀를 뿔나게 하는 가족들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그것이 가족을 위해 살림하는 엄마들의 마음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 속에서 뿔난 엄마는 김한자뿐만이 아니다. 이제 앞으로 결혼문제로 그녀와 부딪치게될 정현의 엄마, 고은아(장미희)도 제 맘대로 되지 않는 아들 때문에 잔뜩 뿔이 나 있다. 격에 맞지 않는 아들의 여자친구도 여자친구지만, 한 번도 그녀의 말을 어기지 않던 아들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배신감이 더 클 터이다. 그녀는 “드라마에 나오는 편견에 가득 찬 교양 없는 시어머니 역할”은 하기 싫다 말하면서도 결국은 자식 욕심 앞에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식 앞의 부모마음이야 김한자나 고은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문제는 그 뿔난 심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드라마는 두 뿔난 엄마의 서로 다른 문제 해결 방식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녀들의 상반된 일상과 관련이 있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고은아는 살림과는 거리가 먼 여자다. 그 집안의 살림은 ‘미세스 문’이 해주고 있는 상황에 그녀는 교양 있는 포즈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의 전부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왔던 그녀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늘 떠오르는 엄마라는 존재보다는 군림하고 시키는 사모님이라는 존재로 그려진다. 누구에게 양보할 수 없는 그녀가 하는 문제 해결 방식이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의 여자를 불러, 남편 말대로, ‘웃는 얼굴로 포를 뜨는’ 일이다.
반면 김한자는 그 뿔난 심사의 위안을 살림 그 속에서 찾는다. “속상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며 잠자리에서 이불을 들고 나와 펴는 부엌은 그녀에게 삶의 힘을 다시 되찾게 해주는 공간이다. 부족하고 마음에 안 들지만 ‘거둬 먹이는’ 엄마의 마음 그 속에 자신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긋지긋한 노동이 분명하지만 관성이 되어버린 살림의 손길은 때론 자신을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엄마가 뿔났다’가 그려내는 두 명의 뿔난 엄마. 그 엄마들의 뿔은 모두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자식들로 인해 비롯된 것이지만 서로 다르다. 김한자의 뿔은 안으로 자라나 자신을 찌르는 반면, 고은아의 뿔은 밖으로 자라나 그 누군가를 찌른다. 고은아가 뿔난 심사를 토로할 때 옆에서 그걸 받아주는 것이 구관조 하나인 반면, 김한자의 옆에는 늘 가족들이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니가 최고여!”라고 말하면서 울면 한 그릇이라도 따뜻하게 사주는 시아버지 나충복(이순재), 혹여나 상처가 깊을까봐 붕어빵이라도 사서 아내를 찾는 남편, 든든한 말벗이 되어주는 시누이 나이석(강부자), 엄마의 가시 돋친 말에도 그저 뽀로통한 얼굴만 하고 넘기는 맏딸 영수, 그리고 엄마의 마음을 풀어줄려고 분위기를 맞추는 예쁜 딸, 영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엄마의 뿔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이 드라마를 보는 엄마란 존재를 가진 모든 이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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