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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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 홍길동’, 이 시대 청춘의 초상

D.H.Jung 2008. 2. 14.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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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홍길동인가

경제개발을 통한 고도성장 시대 끝에 맞이했던 IMF까지, 숨가쁜 20세기를 살아온 우리네 아버지들과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청춘들은 지금 이 다른 시대를 어떻게 보고 살아가고 있을까. 겉으로 보기엔 유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지만 아버지 세대와는 전혀 다른 4차원 사고방식의 그네들은 혹 ‘저런 놈이 어디서 나왔나’하는 서자 취급을 받거나, 혹은 적자 대우를 받으면서도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 놓은 부조리하지만 굳건한 현실의 시스템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그 울분의 끝에 자신들만의 활빈당을 만들어 세상에 대한 변혁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왜 지금 ‘쾌도 홍길동’이냐는 질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 같지만 같은 그들의 처지
‘쾌도 홍길동’의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이다.
청춘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아픔을 속으로 숨기면서 겉으론 과장된 명랑함을 보여준다. 주색잡기에 저자거리에서도 악명 높은 날건달인 홍길동(강지환)은 늘 잘난 척을 해대지만 그것이 자신의 아픔을 숨기는 고도의 위장술이라는 것이 이내 드러난다. 그 아픔은 적서차별에서 비롯된다.

반면 창휘(장근석)는 왕위에 오를 적자였지만 서자인 형 광휘(조희봉)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궁 밖에서 복수의 나날을 보내는 인물이다. 자신이 오를 자리에 광휘가 앉아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만, 홍길동은 그런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왕위에 오르려는 이유가 그저 적자이기 때문이냐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은 적자와 서자이지만 밀려나 있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같다.

한편 허이녹(성유리)은 본래 병조판서의 외동딸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허노인에게서 자라나 저자거리에서 약을 팔며 떠도는 신세다. 그녀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늘 밝고 명랑하게 살아간다. 그녀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서은혜(김리나)는 조선 최고의 권세가의 딸로서 모든 걸 가졌지만 자신은 정작 새장 속에 갇혀 지내는 인물이다. 그녀는 그녀가 갖지 못한 저자거리의 자유를 꿈꾼다. 두 사람은 모든 걸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이지만 둘 다 자유를 꿈꾼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같다.

무엇이 그들을 아프게 하나
이들의 아픔은 따라서 그저 고전 ‘홍길동’이 보여주는 적서차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운명에 의해 구획되는 인생에 관한 것이다. 서자로 태어나면 서자로서 살아가야만 하고, 적자로 태어나면 그 이유로 왕이 되어야 하며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면 그 신분에 걸 맞는 부자유스러운 체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대한 불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일탈을 꿈꾼다. 무언가에 의해 규정되기보다는 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삶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 청춘들이 겪는 적자의식 혹은 서자의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또 그 이유 때문에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는 청춘들의 서자의식은 물론이고, 그 반대의 경우 즉 좋은 간판을 따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사회 속에 안착한 청춘들 역시 맞닥뜨리게 마련인 부조리한 삶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매겨지지 않고 그 사람의 외부적 조건으로 가치판단 되는 사회 속에서는 무수한 홍길동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청춘들의 눈에 비친 기성세대들의 세계는 부조리한 세계다. 역사적 시공간이 불분명한 ‘쾌도 홍길동’이 그려내는 세계는 도둑들의 세계이다. 홍길동과 창휘는 모두 자신의 삶을 도둑맞은 자들이다. 홍길동은 적서차별 아래 자신의 삶을 도둑맞은 인물이고, 창휘는 형에 의해 왕위를 도둑맞은 인물이다. 그들은 도둑맞은 것을 되찾기 위해 사회와 맞선다. 이것이 홍길동이 도둑을 터는 도둑이 되는 이유이고, 창휘가 찬탈 당한 왕위를 되찾으려 모반을 계획하는 이유이다.

도둑을 도둑질하는 사회, 그들이 잃은 것
재미있는 것은 ‘쾌도 홍길동’이 그리고 있는 상반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다. 홍길동의 아버지 이판(길용우)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길동의 물음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은혜의 아버지인 서윤섭은 스스로를 권력의 핵심이라 일컫는 부패한 관료로 대변된다. ‘쾌도 홍길동’에서의 아버지는 거부해야하고 맞서야 하는 부정적인 존재들이다.

반면 어머니는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에 도둑맞은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변되는데 홍길동과 창휘는 모두 그 어머니를 잃고 거리로 내팽개쳐진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는데, 홍길동의 의붓어머니인 김씨부인(이덕희)이 그렇고, 창휘를 어린 시절부터 도와온 노상궁(최란)이 그렇다. 그들은 그러나 모두 홍길동과 창휘를 모성으로 대하지 않는다. 김씨부인은 자신의 아들 인형(김재승)을 위해 홍길동을 도둑으로 몰아 사지로 밀어 넣는 인물이며, 노상궁은 창휘를 위해 어떤 짓이든 하는 인물이지만 그것은 비뚤어진 자신의 욕망일 뿐이다.

따라서 이 결핍된 두 인물 사이에 서는 허이녹이란 존재는 바로 이들이 찾는 모성을 대변한다. 홍길동과 창휘가 그녀에게 빠져드는 이유는 그녀가 가진 한없는 순수의 세계다. 저자거리의 아픈 아이를 그저 지나치지 못하는 그녀는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모두 품어주는 모성의 존재다. 따라서 ‘쾌도 홍길동’이 그리는 세계는 바로 이 모성이 사라진 세상, 그리고 아버지로 대변되는 권력 혹은 현실에 눈먼 도둑들의 세상에 남겨진 청춘들의 사모곡이다. 그것은 청춘들의 사랑으로 그려지지만 그 사랑이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사모곡에 가깝게 읽혀진다. 이러한 부정적인 부성과 긍정적인 모성의 대립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라기보다는,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놓았던 수직적 권력 시스템과 여성성으로 대변되는 작금의 수평적 시스템의 대립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고전 ‘홍길동’은 ‘쾌도 홍길동’으로 재해석되면서 그 안에 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 던져진 이 시대 청춘들의 방황과 사랑을 포착해낸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 사회생활은 고사하고 몇 년째 취업의 문턱도 넘지 못하는 청춘들,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떠한 기회조차 박탈해 가는 사회 속에서 고개 숙인 청춘들,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조건이 저 부조리한 사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청춘들까지 이 드라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쾌도 홍길동’이 그려내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은 이 변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굳건한 시스템과 맞서야 하는 우리네 청춘들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