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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명랑TV

이젠 작가가 그 사극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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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사극시대, 작가로 즐기는 사극

최근 드라마 중 사극만큼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 정사 위주의 정통사극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가능해진 일. 이른바 퓨전사극은 역사적 사실, 혹은 역사적 텍스트에 상상력을 덧대, 사극의 외연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이제 사극은 어떤 역사적 시점을 다룰 것인가 보다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사극의 작가주의가 거론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사극은 작가들의 상상력과 감독의 연출력에 의해 그 색채를 달리하게 되었다.

이병훈표 성장 사극, ‘이산’
월화의 밤을 평정한 MBC 사극 ‘이산’은 이병훈표 사극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매 2회 정도 분량으로 주어지는 미션과 해결을 통한 캐릭터의 성장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선악구도가 극명한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이병훈 PD의 색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조라는 왕을 주인공으로 세운 점이 과거 주로 평민이었던 주인공과 다른 점이지만, 차라리 평민으로 살아가는 게 나을 법 싶은 정조의 상황을 보면 그다지 달라진 것도 아니다.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는 영조 캐릭터 또한 ‘대장금’의 왕과 오버랩되며, 묵묵히 뒤에서 주인공을 돕는 성송연(한지민) 역시, ‘대장금’의 민정호(지진희)를 빼닮았다.

이렇게 비슷한 구조에 비슷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여전히 힘을 발하는 것은 이병훈표 성장 사극의 틀이 내포하고 있는 저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시점을 다루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현대인들의 욕망들이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 성군을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이나, 신분과 남녀 차별을 뛰어넘는 성공담은 지금 시대의 환타지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왕으로 서게 될 정조 이산(이서진)이 나갈 방향성이다. 지금까지 이병훈표 성장 사극 속의 주인공들은 그 꼭대기에 서는 순간 미션 완료하며 끝났지만 ‘이산’은 앞으로도 한참 더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홍자매표 패러디 사극, ‘쾌도 홍길동’
수목의 밤을 웃게 만드는 홍미란, 홍정은 작가의 ‘쾌도 홍길동’은 패러디 사극이다. 그간 여러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패러디를 통한 웃음을 선사했던 홍자매는 ‘쾌도 홍길동’에 와서는 고전인 ‘홍길동’ 자체를 패러디 한다. 사극이라 하기엔 역사적 시공간이 부재한 이 드라마는 따라서 ‘홍길동’이란 고전의 현대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사극 속에서 웨이브춤과 골프 장면은 물론이고 주인공들의 펑키한 패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사극 자체를 패러디해 현재를 풍자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무협지의 틀과 만화적 상상력이 홍길동이란 텍스트 위에서 작가들의 상상력과 만난다. 작가에 의해 새롭게 재해석된 등장인물들은 저 마다 현대인들의 그것을 표상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운명론이나 태생적 결정론 같은)과 부딪치면서 그 전복을 꿈꾼다. 나라를 훔친 도적과 맞서 그들의 재물을 훔치는 도적, 홍길동은 이 시대의 가치관들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수퍼히어로로 부각된다. 홍자매의 발칙한 상상력이 사극에서도 고스란히 발현되는 순간이다.

윤선주표 본격 정치사극, ‘대왕 세종’
주말 밤을 장악한 ‘대왕 세종’은 본격 정치사극의 가능성을 엿보게 만든다.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윤선주라는 작가에서 나온다. ‘불멸의 이순신’으로 주목을 받고 ‘황진이’로 자기 색깔을 굳혀온 윤선주는 ‘대왕 세종’에서 본격적인 정치의 세계로 뛰어든다. 윤선주 작가가 써온 작품의 특징은 그 주인공의 행보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신분이나 서열로 인해 내적인 한계 상황을 가진 주인공이 그 열등감과 차별을 이기고 가장 높은 자리에 서는 과정을 그린다.

이순신은 우리가 위인전에서 보아왔던 완벽한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며 그럼에도 그것을 뛰어넘어 불멸로 달려가는 실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조 몇 편으로 기억되는 황진이 역시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서는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대왕 세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한글 창제로서 각인된 세종대왕은 이 작품을 통해 치열한 정치세계 속에서 생존해나가는 현실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이러한 주인공의 내적 갈등에 대한 탐구는 역사적 사실에만 박제되어 있던 위인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재탄생시킨다. 윤선주 작가의 이 같은 인물 탐구를 통한 치밀한 심리묘사는 ‘대왕 세종’이 그리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정치적 입장을 다각적으로 표현하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화학반응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그 정치적 입장이 너무나 다양하고 대사의 중의적인 의미들이 너무 깊어 이해가 쉽지 않은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그 어려움이 진짜 복잡한 정치의 세계라는 점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혹은 연출자들의 역량이 더 중요해진 퓨전사극 시대에, 물론 역사왜곡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극은 기본적으로 역사 자체가 아니라 창작의 산물인 드라마라는 점에서 이러한 작가의 탄생은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 오히려 ‘사극은 역사 자체’라는 사고방식을 뒤집어 ‘사극은 드라마’일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후, 사극의 좀더 자유로운 실험이 이루어지고, 한 편으로는 그로 인해 환기된 진짜 역사에 대한 논의들이 병렬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작가가 사극을 말해주는 사극의 작가주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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