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사랑해’, 디지털 시대 꿈꾸는 아날로그 사랑 본문

옛글들/명랑TV

‘사랑해’, 디지털 시대 꿈꾸는 아날로그 사랑

D.H.Jung 2008. 4. 8.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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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C 시대의 사랑, ‘사랑해’

번호 몇 개만 누르면 손쉽게 누구에게나 연결될 수 있는 세상, 그래서 당신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가. 혹 당신은 그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 두려운 것은 아닌가. 그 쉬운 연결에서 ‘사랑’보다는 ‘사건’을 떠올리지는 않는가. 디지털 시대, 사랑은 아날로그를 꿈꾼다. 허영만 원작의 100% 사전제작드라마 ‘사랑해’가 꿈꾸는 세상이다. 그 곳에는 사건을 사랑으로 만드는 남녀가 있다. 사랑을 미친 짓이라 말하는 남자, 석철수(안재욱)와 사랑은 신이 준 가장 큰 선물이라 말하는 여자, 나영희(서지혜)가 그들이다.

그들의 만남은 UCC 시대의 ‘사건’으로 시작한다. 지하철 치한으로 몰려 누군가에 의해 찍힌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면서 곤경에 처한 석철수.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그녀를 찾는 그에게 인터넷은 섬뜩하리 만치 연결되어 있는 사회를 보여준다. 누군가가(아마도 같은 회사 라이벌인 듯한 여자) 그녀의 동영상을 찍어 올려주고, 그녀의 회사가 어디인지는 물론이고 개인정보까지 알려준다. 그리고 그 ‘사건’이 될 수도 있을 법한 정보들을 가지고 그는 그녀를 만난다.

하지만 그렇게 디지털 시대의 끔찍한 연결망의 도움으로 만나게 된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풋풋한 아날로그의 사랑을 전개한다. 그녀의 해명 동영상으로 멋진 2탄 UCC를 찍어 올리자, 차가운 디지털 세상은 금세 따뜻한 온기로 변한다. ‘잘 어울리는 것 같으니 한번 사귀어 보라’는 네티즌들의 반응은, 댓글 뒤편에서 세상의 일들을 ‘사건’으로 읽어내며 짐짓 차가운 척 날카로운 글을 올리던 그들이 사실은 모두 ‘사랑’을 꿈꾸는 이들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와 진정으로 연결되고 싶었던 것이다.

휴대폰 하나에 의지해 위험해 보이는 대리운전 일을 하는 영희의 삶은 디지털 세상의 또 다른 단면이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일의 세계 속으로 철수가 들어오자 그 일은 따뜻한 세계로 변신한다. 철수가 한밤중에 그녀를 불러내 대리운전 시키는 것은 차가운 자동차가 아니다. 그것은 살과 살이 맞닿으며 온기를 전해주는 자전거다. 그것은 멜로 드라마의 공식처럼 사용되는 오브제이지만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 속에서 그것도 대리운전이라는 엄연한 현실 위에서는 좀더 아날로그적인 소품으로 그려진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꿈꾸는 이들은 단지 미혼의 청춘들만이 아니다. 그것은 결혼을 한 부부인 도민호(공형진)와 나진희(조미령)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결혼과 함께 사랑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휴대폰은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아내가 위치추적을 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피곤한 일상에서 잠시 길 밖으로 벗어난 그들이 꿈꾸는 것 역시 촌스럽지만 풋풋했던 옛 시절이 아닐까. 손과 손이 닿는 작은 일로도 쉽게 열광하던 그 시절.

‘사랑해’는 디지털 시대의 차가운 일상 속에서 그 단순한 제목처럼 담담히 사랑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드라마다. 사랑이란 별다를 것 없이 만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그것이지만, 그 단순해 보이는 일상의 꺼풀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거기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 복잡하고, 뒤엉키고, 감정 과잉이 되게 만드는 드라마들은 바로 그런 사회의 모습들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 결과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랑해’가 그리는 건 그런 세상이 아니다. ‘사랑해’는 그런 세상을 그저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