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들의 이승기, 형들 사이에서의 이승기
백두산을 오르는 험난한 여정. 두 발로도 힘겨워 두 손까지 써가며 기다시피 오르는 그 길. ‘1박2일’의 출연진들은 말 그대로 땀 범벅이다. 그런데 그 길 위에서도 따가운 태양에 혹시나 탈까봐 얼굴에 선 크림을 바르는 친구가 있다. 예쁘장한 외모에 착한 동생 같은 이미지로 이미 누나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이승기다. 그는 한 겨울 혹한 속에서도 얼음장같은 물로 꼭 머리는 감아야 하고, 야생의 하룻밤에 퉁퉁 붓는 얼굴에 휴대용으로 갖고 다니는 얼굴마사지기로 마사지를 하던 인물로, 최근 자신을 가꾸는 데 적극적인 남자들, 이른바 그루밍족의 표상이다.
‘1박2일’ 같은 야생 버라이어티에서 그루밍족 같은 도시적(?)인 캐릭터가 필요했던 이유는 당연히 그 대비효과 때문이다. 도시의 샌님들을 그대로 시골에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 그 부적응이 보여주는 재미는 상당할 수밖에 없다. 이승기는 초기 이런 프로그램의 의도에 제대로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너무하다거나 어이없다는 표정은 비교적 야생에 적응된 다른 출연진들이 곯려주며 재미있어하기에 딱 어울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승기는 이 프로그램의 출연진들 속에서 막내다. 가장 도회적인 캐릭터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할 상황에 서 있다는 것, 이것이 ‘1박2일’에서 이승기의 존재기반이 된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여기까지가 ‘1박2일’의 의도에 해당하다면, 그 프로그램 속에서의 적응은 이승기의 반격(?)에 해당할 것이다. 이승기는 야생의 상황 속에 자신을 놓아버리는(?) 다른 캐릭터들과는 상반되게 끝까지 자신을 지키는 방향을 선택한다. 그러자 애초에 이승기의 도회적 이미지를 야생의 이미지로 탈바꿈하려던 시도는 엉뚱하게도 이승기의 도회적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오히려 이승기가 있음으로 해서 거꾸로 다른 캐릭터들은 더욱 더 야생의 냄새를 부각시키게 된다.
게다가 시켜먹고 곯려먹기 좋은 막내로서의 이승기는 점차 형들 사이에서 귀엽고 챙겨주고 싶은 막내로 탈바꿈한다. 바로 이 이미지는 사실상 이승기가 ‘1박2일’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그간 누나들의 이승기는 이 이미지를 통해 형들 사이에서 귀여움 받는 막내로서의 이승기 이미지를 부가시킨다. 이것은 그루밍족을 호감으로 받아들이던 누나들은 물론이고, 그다지 호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남성들, 즉 형들의 마음까지 호감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이승기 한 사람만의 수확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루밍족이 이 시대의 남성들이 추구해야할 단 하나의 바람직한 남성상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은 마초적인 남성상이 갖는 시대착오적 오류들을 상당부분 여성성으로 극복해주는 부분이 있다. 사실상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제일 먼저 자신에 대한 배려와 투자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내가 소중할수록 타인의 소중함도 이해된다는 말이다. 이승기에 대한 이 세상 형들의 호감은 바로 이 과거적 남성성의 한 부분을 허무는 신호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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