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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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유쾌하고 이상한 놈, ‘놈놈놈’

D.H.Jung 2008. 7. 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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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게티 웨스턴, 만주 웨스턴, 김치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시공간적 배경은 일제시대 만주다. 일제시대에 만주라는 공간이 함유하는 의미는 말 그대로 의미심장하다. 당대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만주는 대륙으로의 진입로이자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일제시대라는 독특한 시간적 배경은 그 가능성의 공간 위에 이질적인 문화들을 공존시킨다.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는 물론, 호전적인 북방민족들과 러시아 그리고 각종 신기한 문물들을 들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인들까지 공존하는 일제시대의 만주는 요즘으로 치면 퓨전문화가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법이나 규범보다는 총이 앞서는 무법천지로서의 만주는 오히려 국가 간의 분쟁이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는 자유에 가까운 공간으로 인식된다. 즉 나라와 나라,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같은 경계지움의 시대에 만주는 그 경계를 탈주하는 공간으로서 민족주의를 넘어 개인적 자유를 희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스파게티 웨스턴, 미국 중심적 사고방식을 비웃다
경계를 탈주하는 공간으로서의 만주는 정통 웨스턴 무비를 비웃으며 이태리에서 만들어진 스파게티 웨스턴의 멕시코라는 공간과 유사하다. 존 포드 감독과 존 웨인으로 상징되는 초창기 미국 정통 웨스턴들은 분명한 선악구도를 내세우면서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표제 아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거기에는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고, ‘좋은 놈’은 늘 멋지게 ‘나쁜 놈’을 해치웠다. 관객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물론 ‘나쁜 놈’을 선택하는 자는 없겠지만), 그 선택을 하는 순간 선택받지 못한 자는 철저히 응징되어야 하는 존재로 부지불식간에 구획되어진다.

정통 웨스턴이 가진 이러한 미국 중심적 사고방식과 흑백논리는 변방의 입장에서 보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 이태리에서 들고 나온 스파게티 웨스턴의 대표주자로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의 원제가 ‘좋은 놈, 나쁜 놈, 못생긴 놈(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인 것은 이 이분법의 구도를 깨버리면서 정통 웨스턴 무비가 가진 이데올로기를 비웃는다.

‘쇠사슬을 끊어라’, 만주 웨스턴의 민족주의를 끊다
1960년대 이른바 ‘만주웨스턴’이 우리네 영화사 속에 자리매김했던 것은 물론 당대의 웨스턴 무비의 영향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내의 정치적 사정과 그 반작용이 맞물린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정통 웨스턴 무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만주웨스턴’은 대부분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영화들로 당대 친정치적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그 주제의식을 빼놓고 나면 만주라는 공간에서의 탈법적인 행위들을 통한 당대 답답한 현실의 대리충족 기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1971년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는 정통 웨스턴의 국가주의적 색채를 저 스파게티 웨스턴이 잔뜩 비꼬았던 것처럼, 만주웨스턴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끊어놓는다. 즉 주인공들은 애국자인양 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로 분하는 것이다.

김지운 감독 스스로 밝힌 것처럼 ‘놈놈놈’이 만주라는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도 바로 이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쇠사슬을 끊어라’의 연장선상에 있다. 거기에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입장이 다른 세 인물들이 서로 보물을 차지하려 싸울 뿐, 민족주의도 대의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쇠사슬을 끊어라’가 그랬던 것처럼 ‘놈놈놈’은 과연 어떤 경계로부터 탈주하려는 것일까.

우리 영화의 ‘이상한 놈’, 잘 만든 오락영화를 꿈꾸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못생긴 놈’에서 주인공은 분명 좋은 놈(클린트 이스트우드)이었지만 정통 웨스턴과 비교했을 때 주목해야할 캐릭터는 못생긴 놈이다. 이것은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이분되는 선악구도를 이도 저도 아닌 상황으로 만들어버리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에서 주목해야할 캐릭터도 이상한 놈(송강호)이다. 그리고 ‘놈놈놈’은 실제로 이 이상한 놈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좋은 놈과 나쁜 놈이 장르영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 정형화되어 있다면 이와는 상반되게 이상한 놈은 독특한 캐릭터를 갖추고 있다. 이상한 놈이란 캐릭터 속에는 만주라는 공간과 일제시대 조선이라는 상황이 혼재되어 있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벗어나 지극히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미를 버리지 않는 모습이 내재되어 있다. 액션이라고 하기보다는 몸 개그에 가까운 해학이 있으며, 그 웃음 이면에는 섬뜩한 부분도 숨겨져 있다.

이 도드라진 부분이 김지운 감독이 탈주하고픈 경계가 아닐까. ‘놈놈놈’이라는 김치 웨스턴이라는 이상한 장르영화는 바로 이 이상한 놈의 캐릭터처럼 도드라지고 기이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한국영화라는 지형에서 보면 ‘놈놈놈’은 이상한 놈이다. 흔히 “한국영화가 망하게 생겼다”는 상업적 가치를 가장 큰 위기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락영화를 백안시하는 우리 영화의 지형 속에서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말마따나 그 ‘오락영화에 혼신의 힘을 담은’ 이상한 영화다.

한국영화를 말할 때, 늘 발목에 꼬리표처럼 달리는 작품성이나 예술성 같은 것들은 오히려 상업적일 수밖에 없는 대중영화의 토대자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영화라는 사실상의 무한 자유의 공간에 그어놓은 경계가 아닐 수 없다. 드러내놓고 “열심히 재미있게 만들었다”는 그 말에 박수가 쳐지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 오락영화에 대한 편견의 경계를 넘게 해주기 때문이다. ‘놈놈놈’이 만주까지 가게된 것은 그 정도까지 달려가서야 비로소 한국영화라는 족쇄를 풀어내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보기 드문 수작의 ‘오락영화’는 한국영화의 경계를 벗어나 스스로를 ‘이상한 놈’으로 자리매김하는 그 지점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