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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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고향’인데...왜 안 무섭지?

D.H.Jung 2008. 8. 1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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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고향’, 재해석이 필요한 이유

너무 무섭고 엽기적인 것들에 익숙해져서일까. 다시 돌아온 ‘전설의 고향’이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은. 아마도 수없이 많아진 공포의 코드들에 자극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에게 ‘전설의 고향’이 보여주는 전통적인 공포의 이야기 구조는 싱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1편으로 방영된 ‘구미호’가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구미호 이야기를 가져온 것은 의미가 있다. 갖은 고생 끝에 사람이 되려는 전통적인 ‘구미호’의 이야기는 억눌린 자의 두 가지 얼굴(아내와 요물)이 공포의 핵심이다. 즉 구미호가 공포의 주인공인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해석된 ‘구미호’에서 공포의 주체는 구미호가 아니다. 물론 꼬리 아홉 달린 기괴한 모습으로 나오지만 이 사극의 진짜 공포는 인간이다. 구미호의 내단과 피를 먹으면서까지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인간의 욕망이 더 공포스럽다는 이 해석은 전통적인 구미호가 주는 공포의 재미는 주지 못하지만, 현대적인 의미에는 잘 부합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금은 귀신보다는 사람이 더 공포의 대상이 되는 시대다.

2편 ‘아가야 청산가자’는 좀더 정통적인 ‘전설의 고향’ 특유의 공포를 선사했다. 이것은 우리네 귀신만이 가지는 특징을 잘 포착했기에 정통적이면서도 공포스러울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네 귀신의 특징이란 원한이 가족애와 맞닿는 지점에 있다. 자신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 다른 아기를 죽이는 것이나, 그 죽은 아기 때문에 귀신으로 나타나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는 것은 모두 어긋난 가족애의 하나다. 이 모성은 시대가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 ‘아가야 청산가자’는 바로 그 부분을 잘 포착하면서 전통과 현대를 이었다.

반면 3편 ‘사진검의 저주’는 현대적인 해석이 들어있지도 않았고, 또 그렇다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가치관에 천착하지도 않았다. 만일 억울하게 희생양이 된 귀신과 그 딸 사이의 절절한 모정을 좀더 부각시켰거나, 아니면 살인사건을 추격하는 별순검류의 접근방식을 통해 미신 앞에 비정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야장들을 좀더 중심에 두고 그렸다면 이야기는 좀더 공포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그저 알 수 없는 살인이 벌어지고, 그걸 누군가 추적하며, 알고 보니 귀신의 짓이었고, 그 추적하는 자가 귀신의 사연을 알게되고, 귀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식을 향한 모정 때문에 복수를 포기하게 되며, “네 아픔, 고통, 한을 이해한다”는 말에 마음을 움직인 귀신이 자신이 갈 자리인 저승으로 떠나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는 지금 시대와는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복수를 하지도 못하며,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어져, 한을 토로하는 소극적인 저항을 하다가 결국에는 저승으로 가게 되는 이 마음 착하고 체제 순응적인  지금 시대에 횡행하는 어떤 얘기도 통하지 않는 괴물 같은 살인자들보다 더 무서울 수 있을까. ‘전설의 고향’이 무섭지 않은 것은 그 이야기 구조가 낡아서가 아니라, 어쩌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현실(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대적인 해석은 이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