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엄뿔', 이 시대 가족의 뿔을 보듬다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엄뿔', 이 시대 가족의 뿔을 보듬다

D.H.Jung 2008. 9. 2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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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 새로운 가족 제시한  '엄마가 뿔났다'

김수현 작가의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가족에 대한 두 가지 시점이 교차한다. 그 하나는 고전적인 가족드라마 속의 가족으로 드라마 초반부에 보여주었던 가족관이다. 장남 영일(김정현)은 어느 날 불쑥 자식까지 가진 여자를 집으로 들여 아내로 맞고, 도무지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노처녀인 장녀 영수(신은경)는 이혼남을 사랑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 키워낸 막내 딸 영미(이유리)는 부잣집 아들과 결혼해 품격 운운하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식들을 가진 엄마, 김한자(김혜자)의 뿔 이야기는 지금껏 가족드라마들이 늘 다루었던 것들. 하지만 '엄마가 뿔났다'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다.

장남 영일이 들인 며느리, 미연(김나운)은 특유의 붙임성과 선함으로 가족 속으로 쉽게 융화되었고, 영수는 사려 깊은 종원(류진)과 그녀를 이해해주는 백점짜리 시어머니 종원 모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오히려 종원의 이혼으로 해체된 가족을 더욱 강력하게 봉합하는 역할을 해낸다. 영미는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점점 이력이 나고, 그러려니 하며 지내게 되면서 오히려 시어머니의 귀여움 같은 것을 발견한다. 김한자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났던 뿔은 모두 기우였던 셈이다.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살아왔던 시간들에 대한 회한이 남을 법한 상황. 그녀가 가족을 벗어나 '1년 간의 휴가'를 선언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족 중심에서 나 중심으로 돌아보다
이 드라마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주부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살아왔던 김한자가 프리선언을 하고, 재벌집 며느리와 결혼해 숨죽이며 살아온 김진규(김용건)가 돌연 자신의 인생을 찾겠다고 집을 나가며, 집안의 어른으로 품위 있게 마감할 인생만을 생각해왔던 나충복(이순재)이 로맨스그레이에 빠지고, 친엄마라는 가족관계의 틀 속에서 새엄마를 무조건 부정하기만 해왔던 소라가 새엄마가 될 영수를 받아들이는, 지금껏 가족드라마가 그려내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니까 초반부 전형적인 기존 가족드라마 틀 속에서의 이야기는 후반부 달라진 가족의 전제가 되는 셈이다. 초반부에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의 나를 그렸다면, 후반부에는 나를 중심으로 가족을 다시 재편하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은 이 드라마가 제목에서 내세운 '뿔'이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 매몰되는 상황에서 김한자는 불쑥불쑥 솟아나는 뿔을 느끼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저 혼자 독백을 통해 속으로 풀어낼 뿐이다. 이것은 김진규가 처한 허수아비 같은 자신의 삶 속에서도 그렇고, 나이 들어 갖는 연애감정을 주책으로 취급받는(심지어 가족에게도) 나충복의 삶에서도 그렇다. 점점 개인주의화되어가는 가족 속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자식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소라 역시 뿔이 나기는 마찬가지다.

김수현 작가가 보여준 가족에 대한 낙관
그것은 뿔이기 때문에 드러내는 순간, 그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그러니 과거 가족 드라마들의 미덕은 가족을 위해 그 뿔을 숨기고 혼자 삭이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뿔났다'는 정반대의 방식을 취한다. 그 뿔을 드러내고 가족들에게 자신의 뿔의 이유를 말하며, 그 문제의 해결을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이때 가족들이 이 뿔을 대하는 태도다. 김한자가 프리선언을 했을 때, 시아버지인 나충복은 흔쾌히 그것을 허락해주고 남편 나일석(백일섭)은 손수 집을 알아봐주기까지 한다. 김진규가 집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도도하기 그지없던 아내 고은아(장미희)는 무릎까지 꿇으며 그를 잡는다. 나충복의 연애사실이 알려졌을 때, 가족들은 은근히 뒤에서 지원을 해준다. 소라가 엇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새엄마인 영수는 소라를 보듬어준다. 이 드라마가 그간 숨겨 놓았던 가족들의 뿔을 마음껏 끄집어내는 것은 가족에 대한 김수현 작가의 무한한 낙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이것은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생겨난 뿔이기에 가족이 또한 감당해야할 문제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엔 평탄해 보이는 모습들과는 달리, 가족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과거의 가족관계가 만들어낸 뿔들이 존재하기 마련.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을 때 상황은 더 어려워진다. 작은 물방울들도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둑을 무너뜨리는 법이다. 그간 숨겨졌던 뿔들을 드러내고 보듬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이 드라마가 어느 때보다 그 울림이 큰 것은 지금 현재 가족 중심주의에서 나 중심주의로, 어느 누구의 희생에서 각자의 행복으로 바뀌어나가는 가족의 가치관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