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아내의 유혹’, 그 막장의 실체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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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유혹’, 그 막장의 실체는?

D.H.Jung 2009. 1. 2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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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유혹’, 과정보다는 효과에 천착하는 드라마

‘아내의 유혹’을 막장드라마라고까지 부르는 이유가 뭘까. 막장이라면 도대체 뭐가 막장이라는 것일까. 이런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막장드라마라는 호칭은 시청률이 지상과제가 된 작금의 드라마 시장 속에서는 발전적인 비판이 아닌 면죄부만을 제공할 뿐이다. 앞으로 막장드라마가 하나의 통속적인 장르로서 굳어져 쏟아져 나오지 않으면서도, 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막장드라마라는 하나의 용액으로 뒤범벅되어있는 막장의 요소와 성공 포인트를 깔때기에 대고 걸러내는 것이다. ‘아내의 유혹’의 막장은 무엇이고, 또 성공 포인트는 무엇일까.

‘아내의 유혹’, 막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어찌 보면 ‘아내의 유혹’이 막장인 이유는 너무나 쉽게 찾아지는 것만 같다. 그 첫 번째는 가족들이 모여 볼 가능성이 높은 저녁시간대에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세계가 막장이다. 이 드라마의 관계설정을 드러내는 제목부터가 그렇다. 친구와 남편이 공조해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고, 그럼에도 간신히 살아남은 아내가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남편에게 접근해 그를 유혹한다는 이야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한 만큼 돌려주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시간대에 어울리지 않는 소재에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것이 드라마 내적인 비판으로 불려지는 막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만일 늦은 밤에 했다면 이런 소재도 그럭저럭 괜찮은 드라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형태에서 막장의 혐의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막장이란 말일까.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끌어온 소재와 지향하는 주제가 아니라, 그 소재와 주제를 다루어가는 과정에 있다.

‘아내의 유혹’은 이미 그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다 알면서 보는 드라마다. 은재(장서희)는 반드시 그를 죽음으로 내몬 교빈(변우민)과 애리(김서형)에게 당한 것과 똑같이 복수를 할 것이다. 하지만 파국적으로 치닫는 드라마 진행 끝에 그 복수의 궁극적인 결과가 해피엔딩으로 간다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이처럼 결과를 다 알면서 보는 드라마는 그 결과를 향해 가는 과정이 중요해진다.

‘아내의 유혹’은 그러나 이 과정이 온통 클리셰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오밀조밀한 심리적인 관계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기보다는 익숙한 설정을 숨쉴 틈 없이 빠르게 나열시킨다. 드라마의 과정은 이 클리셰들의 남발로 인해 휘발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주목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 무수히 쏟아지는 익숙한 과정 속에서 대면하게 되는 갈등의 효과에 집중하는 것이다. 과정은 어떻든, 시청자들이 원하는 그 대결장면을 재빠르게 구성해내고 그 지점에 집중시킨다.

애리가 마침 구해야만 하는 돈만큼의 금괴가 시댁 소파 밑에 숨겨져 있는 상황이나, 애리가 그걸 도둑질하는 상황에 마침 은재의 오빠가 그 집에 하늘(오영실)을 데려다줌으로써 누명을 쓰게 되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빈 모(금보라)가 은재네 집을 찾아와 쑥대밭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일련의 그럴 듯한 이야기 과정으로 보이지만 잘 뜯어보면 그 과정은 개연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유는 과정을 재빠르게 처리한 점과 그 과정의 결과가 시청자들을 중독적인 분노의 감정에 빠지게 하거나, 혹은 그 분노를 터뜨려 카타르시스를 주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유혹’, 그 성공의 요인은?
이처럼 과정보다는 효과에 집중함으로써 자극적인 대결구도가 매번 등장한다고 해서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할 가능성은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그래도 말하려는 가족 내에서의 아내가 가진 두 가지 얼굴에 대한 천착이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아이러니가 있다. 흔히 정상적인 가정 속에서 아내와 유혹은 그다지 내놓고 얘기할 만큼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이 도발적인 제목의 목적은 “아내가 남편을 유혹한다구? 왜?”하는 그 궁금증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이 아내에 맞춰져 있다는 점은 비슷한 시댁의 경험을 해본 이 땅의 아내들에게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드라마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환기시킬 수 있다. 즉 요조숙녀인 아내로 있던 은재는 요부 같은 애리에 의해 그 자리를 빼앗기고 다시 그 아내의 자리를 되찾으려 하며, 아내의 자리를 빼앗은 애리 역시 은재로 인해 그 자리를 빼앗길 위험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아내라는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두 여자의 쟁탈전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렇게 아내의 자리에 집착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그다지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혹시 아내라는 한 자리에서 동시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두 얼굴로서의 은재와 애리의 모습 그 자체가 중요해지는 건 아닐까. 요조숙녀와 요부는 은재와 애리가 상황이 바뀌면서 서로 얼굴을 바꿔가며 취하게 되는 입장이다.

조금은 자학적인 시청이 되겠지만 요조숙녀로서 겪는 시댁에서의 구박은 시청자들에게 어떤 막연한 공감을 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또 요부는 바로 그런 상황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해체시키는 역할이 된다. 즉 구박받는 요조숙녀와 그걸 깨뜨려버리는 요부는 남성중심사회에 의해 강요된 아내라는 입장의 삶 속에서 그녀들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해도 마음 한 구석에 트라우마처럼 남겨진 아픔이다. ‘아내의 유혹’은 바로 이 두 얼굴을 은재와 애리라는 인물로 캐릭터화시켜 분노와 해소의 두 코드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아내라는 자리가 갖는 비극적 상황을 전제하면서도, 심각하게 그 상황에 가라앉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휘발되듯 달려나가는 어설픈 과정에서 비롯된다. 과정이 치밀해지면 이 드라마는 마치 ‘에덴의 동쪽’처럼 그 무거움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과정에 멈추지 않는다. 끝없이 부딪치는 그 효과적인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이 모든 상황을 게임처럼 만들어버린다.

상대적으로 부부라는 관계경험을 해보지 못한 젊은 층들까지 이 드라마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대전게임처럼 반복되는 장면들의 재미에서 비롯된다. 악다구니를 쓰며 머리채를 휘어잡는 인물들의 막가는 게임 같은 드라마 진행은 또한 나이든 시청층들을 적절한 거리를 두게 만들어 심각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극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아내의 유혹’이 막장드라마로 떴다고 해서, 모든 막장드라마가 뜬다는 보장은 없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이것은 “시청자들이 막장을 좋아한다”는 섣부른 결론에 도달할 뿐이다. ‘아내의 유혹’은 드라마 과정이 막장이지만, 그 효과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게임적인 드라마 진행으로 인해 적절한 거리감을 갖게 만들면서 동시에 공감을 일으키는 성공 포인트에 도달할 수 있다. ‘아내의 유혹’은 막장으로 뜬 것이 아니라, 그 막장으로 보일 정도로 과정보다 효과에 집중한 데서 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