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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네모난 세상

‘인터뷰 게임’폐지, ‘절친노트’논란이 말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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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게임’폐지, 불황기 TV의 선택 옳은가

‘인터뷰 게임’이란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마이크, 그 마이크를 들고 어색하게 서서 역시 어색한 목소리로 화면을 보고 말하는 일반 출연자. ‘인터뷰 게임’의 외형은 세련되지 않다. 깔끔하게 구성된 화면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되도록 숨겨진 마이크, 그리고 인터뷰어의 능수 능란한 리드로 매끄럽게 진행되는 인터뷰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 프로그램의 어색함은 낯설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인터뷰 게임’과 ‘절친노트’, 그 서로 다른 진정성
하지만 그 어색함은 ‘인터뷰 게임’에 오면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리얼리티 전략의 일환으로 사용된다. 화려한 외형은 견고한 껍질과 같아, 그 내면을 바라보는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게임’은 이처럼 외형에 집착하는 프로그램들의 틀을 과감히 깨고, 오로지 출연자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다. 이 프로그램 속에서는 출연자의 떨리는 손이나, 말실수 같은 것들은 옥의 티가 아니라 진정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으로 포착된다.

이러한 형식 속에서 설정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카메라는 세트(특정 공간을 포함하여)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그 출연자의 일상으로 들어가고, 그의 시선과 마음 줄을 따라간다. 자신이 알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출연자는 그 주변을 탐문하듯 좇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출연자가 알고싶은 그 마음이 먼 거리에 떨어진 완전한 타인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속내를 알고 싶어한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소통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절친노트’도 마찬가지다. 그 기획의도는 ‘인터뷰 게임’의 그것처럼 소원해진 관계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그 바탕에 진정성을 태도로 깔고 있지만, 이 두 프로그램은 그 형식의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프로그램으로 인식된다. 일단 ‘절친노트’는 예능 프로그램이며, ‘인터뷰 게임’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다. 전자가 오락에 초점을 맞춘다면, 후자는 교양에 초점을 맞춘다.

그밖에도 차이는 많다. ‘절친노트’는 세련되게 설정된 공간(절친 하우스 같은) 속에서 일반인이 아닌 연예인이 출연하며, 인위적으로 제시되는 미션을 통해 관계의 회복을 꿈꾼다. 절친송의 “우리는 절친입니다”라는 선언은 실제상황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당위와 기대의 표현이다. 초기 이 프로그램은 실제로도 잘 알려진 김구라와 문희준의 껄끄러운 관계를 통해 그 정체성을 확보했다. 그 후에도 이지혜와 서지영, 이성욱과 성대현이 출연해 그 진정성을 이어갔다.

‘절친노트’의 판타지, ‘인터뷰 게임’의 리얼리티
하지만 그 인위적인 구성 때문일까. 절친하지 않은 연예인들이 프로그램의 전제가 되어있는‘절친노트’는 실제 그런 상황의 연예인들을 섭외하는 데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절친의 의미는 그 무게감을 잃어버리고 조금은 가벼운 의미로 변질된다. 그리고 결국 끼여들게 되는 것은 설정의 유혹이다. 절친 하우스에 모인 출연자들은 초반부에 어떻게든 소원하고 어색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과도한 설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지, 솔비의 설정 논란은 이 진정성이 점차 휘발되던 시기에서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다. 프로그램의 상업적인 속성이(실로 요즘은 진정성도 상업적으로 포장되는 시대다) 진정성을 압도할 때, 문제는 불거지게 된다. 이 상황이 되면 진정성과 리얼리티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상업성과 판타지가 자리하게 된다. 절친은 상업적인 목적을 위한 하나의 판타지로 제시될 뿐, 그 어떤 진정성도 발견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인터뷰 게임’은 그 어떤 판타지도 발견하기 힘들다. 100%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진정성이 주는 감동은 발견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출연자들의 화해를 유도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물론 소통의 욕구를 가진 이 프로그램이 그 소통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을 때, 시청자들은 어떤 안타까운 실망감을 가질 수도 있다.

‘인터뷰 게임’폐지, 진정성보다 상업성을 선택한 방송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속에 있는, 소통을 원하는 마음을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소통에 실패해도 또 다른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진정성의 힘을 믿는 이 태도는 사실상 프로그램 속에서 소통을 이루거나 실패하는 출연자들의 에피소드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놀라운 것은 이 재미를 포기한 듯한 ‘인터뷰 게임’의 시청률이 교양 프로그램으로서는 꽤 높은 10%대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TV를 보는 시청자들 역시 그 진정성의 태도를 바라보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미와 의미를 모두 담보한 ‘인터뷰 게임’의 폐지는 그만큼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청자와 제작자가 동시에 꿈꾸며 연결하려 해온,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소통의 욕구가 상업적인 잣대로 인해 끊어져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절친노트’의 진정성 논란과 거의 동시에 불거진 ‘인터뷰 게임’의 폐지논란은, 이제 진정성 마저 상업적으로 포장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씁쓸한 방송환경을 바라보게 만든다. 방송이 진정성과 리얼리티를 버리면 남는 것은 자극과 판타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