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불황기, 영화는 진정성으로, 드라마는 막장으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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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기, 영화는 진정성으로, 드라마는 막장으로

D.H.Jung 2009. 2. 1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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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와 막장드라마, 그 불황기 영화와 드라마의 상반된 선택

이미 60만 관객을 넘어서 독립영화로서는 꿈의 100만 관객을 넘보고 있는 ‘워낭소리’. 소를 닮아버린 할아버지와 사람을 닮아버린 소가 함께 걸어가는 그 느린 걸음걸이에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한편 수줍게 “좀 하는” 영화라며 지난 겨울 살며시 다가 온 ‘과속스캔들’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현재 800만 관객을 넘어섰다. 블록버스터의 화려한 외관들 속에서 수수한 얼굴로 다가온 ‘과속스캔들’은 따뜻한 가족애를 그리며 불황기 찬바람에 서늘해진 관객들의 가슴을 적셨다.

진정성을 선택한 영화, 막장을 선택한 드라마
어찌 보면 이 두 영화의 성공은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작은 영화들의 반란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타고 전해진 따뜻한 이야기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불황기 영화의 새로운 대안으로까지 보여진다. 극장 밖에서 세파에 흔들리며 버티던 관객들은 극장 속 몇 천 원의 도피처 속에서 위안과 성찰을 요구했다. ‘과속스캔들’은 이제 한물 갔다고 생각하는 소시민들에게 “아직 당신은 꽤 하는 사람”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워낭소리’는 먹고살기 급급한 현재, 오히려 그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노동의 신성함을 성찰하게 해주는 감동의 시간을 선사했다. 실로 진정성의 성공이었다.

반면 같은 불황기 속, 안방극장은 이와는 정반대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지난 2월9일자 일일 시청률표를 보면 그 1위가 SBS의 ‘아내의 유혹(34.3% AGB닐슨 자료)’, 2위가 KBS의 ‘꽃보다 남자(26.2%)’, 3위가 MBC의 ‘에덴의 동쪽(23.3%)’이다. 이것은 지난 한 주의 주간 시청률과 거의 같은 결과(주간시청률에는 SBS의 주말극장 ‘유리의 성’이 하나 떠 끼어있을 뿐이다). 이 시청률표가 말해주는 것은 지금 현재 방송3사의 대표주자가 바로 드라마라는 점이며, 그 드라마들은 막장이라 불려지거나, 각종 논란 속에 허우적대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느리게 걷는 ‘워낭소리’와 속도에만 편승한 ‘아내의 유혹’
영화가 선택한 진정성, 드라마가 선택한 막장. 불황에 대한 이 상반된 선택이 말해주는 것은 무얼까. 이것은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서로 다른 매체성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이것은 두 매체의 과금 체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는 순수하게 관객이 돈을 지불함으로써 수익을 얻는 매체인 반면, 드라마는 시청률이라는 간접적인 잣대를 통해 광고로 수익을 얻는 매체다.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요구는 당연히 영화에 더 무게중심을 둘 수밖에 없다(그것이 오락을 위한 것이라 할 지라도).

반면 드라마는 작품성보다는 화제성에 더 치중하게 된다. 즉 완성도가 떨어져 욕을 먹으면 영화로서는 사형선고가 될 수 있지만, 드라마로서는 오히려 논란을 통한 시청률 상승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완성도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워낭소리’와 ‘아내의 유혹’의 상반된 속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워낭소리’의 속도는 말 그대로 소걸음에 가깝다. 그 느린 걸음을 따라 걸으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담담히 쌓아놓은 것이 ‘워낭소리’의 미덕이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작품의 개연성이나 인물의 일관성 같은 것마저 휘발시킬 정도의 속력으로 자극에만 몰두한다. 여기서 속도감은 지속적인 자극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완성도의 구멍을 메워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영화처럼 불황기 속에서 어떤 진정성을 갈구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4부작이었지만 호평을 받았던 ‘경숙이, 경숙아버지’에 쏟아진 찬사는 여전히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통해서도 어쩐 진실된 감동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완성도나 작품성과는 상관없는 시청률의 양적 판단에만 의존하는 작금의 드라마 시스템은, 드라마를 시청자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언제까지 욕하면서 보는 이 병적인 시청으로 휘둘려야 할까. ‘워낭소리’처럼 그 따뜻한 울림이 대중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드라마에서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