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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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바보', 구동백의 사랑법이 시사하는 것

D.H.Jung 2009. 5. 1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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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인 미래, '그바보'가 전하는 현재의 긍정

"전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어요." 톱스타 한지수(김아중)의 말대로 그녀는 벼랑 끝에 서 있다. 톱스타와 정치인의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진짜 연인인 김강모(주상욱) 대신 구동백(황정민)과 가짜 결혼을 해야 하는 그녀. 그녀가 현재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은 김강모가 해준 미래에 대한 약속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착각이다. 미래는 늘 오지 않는 거리에서 보여질 뿐이고, 사실 우리는 늘 현재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벼랑 끝에 세운 것은 김강모가 아니라, 그렇게 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그녀 자신이다.

그런 그녀 앞에 현재로 서 있는 인물은 구동백이다. 그는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를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불쑥 배가 고프다며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현재를 버텨내야 미래도 온다는 구동백의 전언이다. 그는 그녀가 들어주겠다는 세 가지 소원(이 동화적인 설정은 구동백이란 캐릭터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중 하나를 '그녀와 먹는 한 끼 밥'으로 쓴다. 이것은 구동백의 사랑법이 김강모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시제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강모가 늘 '미래 그 언젠가'라면, 구동백은 늘 '지금 현재'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그 현재를 긍정한다. 한 때 '있으나 마나'였던 자신의 별명을 얘기하며 한지수 덕분에 '사람들 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 또한 즐거움이라 긍정한다. '사람들 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한지수에게는 고통스런 현재 그 자체이지만 구동백은 "진짜 슬픈 인생은 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람에 날아가 바닷물에 빠진 한지수의 모자를 건져내며 정작 자신의 바지가 온통 젖었어도 "모자가 젖었네요"라고 말하는 구동백에게 한지수라는 존재는 그의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이 된다.

실로 우리네 삶은 미래의 불안 때문에 아무리 절망 속에 있어도 또 그 정반대의 상황에 있어도, 우연히 해파리에 다리를 쏘이면 아프고, 몇 끼를 굶으면 배가 고픈 현재에 붙박여 있다. 이것이 엉거주춤 걸어가는 구동백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이 터지는 한지수가 "이런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네요. 어떻게 이렇게 힘든데. 죽을 것처럼 힘든데 어떻게 웃음이 나올 수 있지?"라고 말하며 또 한편으로는 눈물을 흘리는 이유다.

'그저 바라보다가'가 구동백이라는 바보 같은 캐릭터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에 잠식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현재적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법이다. 쉽게 미래를 예단하는 자들의 특징이란 그 예측 가능성을 통해 어떤 이득을 취하려는 삶의 태도다. 하지만 그 예단하는 습성은 결국 거꾸로 그 자신을 바보로 만들 뿐이다. 한지수가 "구동백씨는 명쾌해서 좋겠어요. 나 어떻게 해야되죠?"하고 묻는 건 그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그 부제처럼 불리는 '그바보'라는 제목처럼 시종일관 구동백을 바보로 만들려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바보는 거꾸로 그런 세상을 바보로 드러내주는 거울 역할을 해준다.

따라서 막장과 자극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이 바보스런 드라마는 그대로 구동백을 닮아있다. 그저 거기 바보처럼 서서 오히려 세상이 바보임을 증명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