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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찬란한 유산', 한효주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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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주, '찬란한 유산'에서 빛을 발하는 이유

'찬란한 유산'에는 이질적인 두 세계가 공존한다. 그 하나는 철부지 같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착한 환(이승기)의 가족 속에서 은성(한효주)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빛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뒤로는 엄청난 비밀과 죄로 얼룩져 있는 승미(문채원)네 가족으로 인해 숨겨진 진실이 은성을 고통 속으로 빠뜨리는 어둠의 세계다.

이 두 세계의 교차는 이 드라마를 승승장구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빛의 세계가 긍정의 힘으로 대중들의 공감을 서서히 끌어올린다면, 어둠의 세계는 이 조금은 밋밋해질 수 있는 극에 계속해서 자극을 준다. 드라마가 일일드라마와 미니시리즈가 적절히 섞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은성에게 모든 유산을 상속하려는 장숙자(반효정)여사와 그 가족의 이야기는 일일 가족드라마의 속성을 가지지만, 은성에게 살아있는 아버지와 버려진 동생의 진실을 숨기려는 계모 백성희(김미숙)의 이야기는 미니시리즈를 속성을 가진다.

은성의 밝은 생활이 묻어나는 일일드라마 같은 편안한 느낌에 젖어 있다가, 갑자기 죽었다 믿었던 아버지가 백성희의 집을 찾아 얼굴을 들이미는 장면에서는 스릴러적인 긴박감이 넘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연기자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어떤 면으로 보면 이 두 가지 세계에 걸쳐 있다. 즉 한 쪽에서는 웃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쪽에서는 울어야 하며, 때론 그 두 감정이 한 상황 속에서 보여지기도 해야 한다.

한효주의 연기가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 두 세계의 교차점에 그녀가 연기하는 은성이 서 있기 때문이다. 은성은 밝고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면서도 그 속에는 깊은 아픔을 품고 있어야 한다. 동그랗게 뜬 눈은 명랑함을 연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드러난 진실로 인한 충격을 표현해야 하고, 아련한 눈빛은 어떤 고마움과 사랑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숨겨왔지만 내면에 자리한 깊은 슬픔을 담아내야 한다.

이제 스물 두 살의 연기자, 한효주가 연기하는 은성이 가진 감정의 스펙트럼은 이처럼 넓다. 하지만 이 복합적인 스펙트럼을 가진 '찬란한 유산'이 어쩌면 한효주에게는 '제 물'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윤석호 PD의 계절 연작 마지막 편인 '봄의 왈츠'를 통해 얼굴을 알렸지만 그 작품 속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그다지 살아나지 않았다. '봄의 왈츠'의 박은영은 '찬란한 유산'의 고은성처럼 역시 내면에 어린 시절의 아픔을 가진 생활력 강한 여성이지만 캐릭터 자체가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주인공 윤재하(서도영)에 이끌리는 면이 많았다.

한편 '일지매'에서의 은채는 캐릭터가 너무 단선적이었다. 한효주가 가진 또 한 면인 내면적 아픔은 이 드라마에서는 드러나지 않았고 오로지 쾌활하고 밝은 모습만 비춰졌다. 오히려 그녀의 연기를 담아내주었던 것은 영화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였다. '여자 정혜'와 '러브토크'로 여성들의 미묘한 심리를 포착해내기로 유명한 이윤기 감독의 이 영화에서 한효주는 그 슬픔과 쾌활이 뒤섞인 아련한 눈빛을 선보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요구하는 '찬란한 유산'은 그러나 한효주에게는 자기 옷 같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장숙자 여사 앞에서는 일일드라마가 보여주는 며느리감의 면모를 보여주고, 철부지 환이 앞에서는 그 마음을 뒤흔드는 멜로의 여성상을 그려낸다. 악녀인 계모 백성희 앞에서는 복수를 외치는 분노의 얼굴을 끄집어냈다가, 키다리 아저씨 같은 준세(배수빈) 앞에서는 싱그러운 미소를 피워낸다. '찬란한 유산'은 나이는 젊지만 연기는 이미 물이 오른 한효주라는 배우를 발견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