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뉴스데스크

 

MBC <뉴스데스크>가 오는 11월부터 시간대를 9시에서 8시로 당기기로 결정했다. 시청자들의 생활패턴에 큰 변화가 있다고 판단해 달라진 패턴을 반영했다는 것이 MBC측의 <뉴스데스크> 시간대 변경의 변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끊임없는 시청률 하락일 것이다. <뉴스데스크>는 지난해 평균 11% 대의 시청률에서 올해 5%, 심지어 3% 대 시청률까지 곤두박질쳤다.

 

'MBC 뉴스데스크'(사진출처:MBC)

MBC는 이 시청률 하락의 주요 원인이 그 시간대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8시에 SBS가 뉴스를 먼저 하기 때문에 9시대의 뉴스 시청률이 하락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KBS가 9시 뉴스를 고집하면서도 20% 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MBC의 시간대 변경의 변을 무색하게 만든다.

 

실제로 8시로 <뉴스데스크>가 옮겨간다고 해도 시청률 반등이 쉽지 않을 거라는 의견들이 많다. 이미 주말에 8시 방영되는 <뉴스데스크> 역시 시청률에서 3-4%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 방영되는 <SBS 8시뉴스>는 9-11%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주말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볼 때, 주중 8시에 SBS와 맞붙게 될 MBC <뉴스데스크>가 쉽게 시청률 회복을 하기 어려울 거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SBS 8시뉴스>는 시청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8시라는 파격적인 시간대를 편성하고도 평균 5-7%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SBS 8시뉴스>를 폐지하라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역전되었다. <SBS 8시뉴스>는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뉴스데스크>는 끝없는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세대 중 20-40대의 시청률 하락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한다. 젊은 세대들이 <뉴스데스크>를 외면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시청률 하락의 주요 원인은 시간대가 아니다. 그것은 MBC라는 방송사의 신뢰도가 그만큼 떨어졌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뉴스 프로그램은 아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지는 않지만 그 방송사의 상징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된다. 결국 방송사가 가지는 매체로서의 공신력에 의해 뉴스 프로그램에 대한 호응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40년 만의 시간대 이동은(그것도 시청률에 밀려) 작금의 MBC가 대중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잃고 있는가를 스스로 보여주는 일이다.

 

사실 과거 MBC 뉴스만큼 철저히 대중들의 편에 서서 그 목소리를 담아내던 뉴스도 없었다. 권력과 잦은 부딪침을 겪은 것도 단연 MBC 뉴스의 몫이었다. 그만큼 대중들은 MBC 뉴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단 몇 년 사이에 그 지지는 비아냥과 조롱으로 바뀌었다. 날선 언론으로서의 비판 의식은 사라진지 오래고, 최근에는 지나치게 친 정부적인 뉴스로 보수화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뉴스데스크> 시간대 변경은 MBC가 갖고 있는 현 위기 상황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다. MBC가 해야 할 것은 방송의 시간대 변경 같은 프로그램 외적인 변화가 아니다. 방송이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을 하는 방송편성과 프로그램의 내적인 변화가 있어야 MBC에 대한 대중들의 공신력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 방송사의 공신력이 생긴 이후에야, 예능이든 드라마든 다른 영역의 시청률도 반등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방송 프로그램의 시청률에서 방송사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큰 법이다. 제 아무리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도 그걸 품는 방송사에 대한 지지가 없다면 냉담한 반응만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이것이 현재 <뉴스데스크>를 포함해 MBC의 모든 프로그램이 난항을 겪고 있는 진짜 이유다.

광대는 어떻게 대중들을 대변했나

 

이병헌 주연의 영화 <광해>는 자꾸만 ‘광대’로 읽힌다. 그 영화 속 주인공이 다름 아닌 기방에서 왕 흉내 내며 웃음을 주는 대가로 살아가는 광대다. 그 광대가 광해를 대신한다. 처음엔 연기였는데 하다 보니 점점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해나가기 시작한다. 광대가 광해가 되어 광해보다 더 민초들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게 되는 이야기. 1천만 관객 돌파에 스크린 독점과 지나친 마케팅이 일조한 것이 사실이지만 <광해>의 흥행에는 바로 이 ‘광대’라는 위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강남스타일'과 '광해'(사진출처:YG엔테테인먼트, 영화 광해)

지금으로 치면 연예인에 해당할 것이다. 대중들에게 값싼 대중문화를 통해 심지어 희망까지 주는 존재. 청소년들 세 명 중 한 명이 희망하는 직업. 물론 그만큼 치러야할 대가도 만만치 않지만 대중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그런 사람들. 영화 <광해> 속 하선(이병헌)은 분명 작금의 연예인을 빼닮았다.

 

요즘 연예인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고 그런 발언이 대중들의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 하선이 던지는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명분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라는 대사는 SNS 시대에 때론 소셜테이너들이 던지기도 하는 속 시원한 한 줄 촌철살인 그대로다. <광해>는 여러모로 광대로 읽힌다.

 

또 한 명의 광대가 있다. 이 시대를 온통 말춤으로 들썩거리게 만든. 바로 싸이다. 광대나 딴따라라는 표현은 어딘지 비하적인 뉘앙스가 있어 많은 연예인들이 피해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싸이는 아예 자신이 광대임을 드러냈다. “내 직업은 광대, 떴다고 모범적으로 살지 않겠다.” 싸이의 이 발언은 아예 광대의 본분과 철학을 담고 있다.

 

월드스타니 한류스타, 혹은 국민가수(?) 같은 호칭을 거부하고 국제가수라는 애매한 명칭을 스스로 부여한 것에도 광대의 철학이 묻어난다. 국제가수라는 명칭에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뉘앙스가 없다. 그저 해외에도 활동하는 가수라는 의미만 있을 뿐. 광대는 국가나 민족의 부름에 구획되어 모범적으로 억지로 살고 싶지 않았던 거다. 저 하선이 저잣거리에서 왕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웃음거리로 만들며 살아가듯이. 저 하던 대로 그대로.

 

사실 ‘강남스타일’이 미국에서 빵 터지기 전까지 국내에서 싸이에 대한 관심은 그냥 그랬다. 국가가 관심을 가졌던 적도 없다. ‘라잇나우’ 같은 곡에 19금 딱지를 붙이는 것이 국가가 가진 관심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비롯되어 전 세계로 싸이에 대한 관심이 번져나가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시청 앞 광장이 월드컵을 재연하고, ‘라잇나우’는 19금 딱지를 떼었으며 심지어 국가는 싸이에게 훈장을 부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해외에 그만큼 우리나라를 알렸으니 훈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이 시대의 광대들을 위해 해주는 것이 고작 결과를 만들어낸 자들을 공치사 하는 일 밖에 없는가 하는 의구심은 있다. 이것은 싸이의 공을 치하하는 것인가 아니면 싸이에게 훈장을 줌으로써 정부도 한 일이 있다는 식의 또 다른 숟가락 얹기인가.

 

사실 정치인들보다 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이 시대의 광대, 연예인들이다. 하지만 지금껏 연예인들은 정치적인 상황에 이용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거다. 정치가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연예인들을 딴따라 취급하며 저 발톱의 때처럼 바라보던 시대가 가고, 이제는 대중문화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올해 대선에서 3강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가 모두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제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면 대중문화라는 말 등 위에 올라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저마다 말 춤을 추며 광대 싸이를 코스프레 하고 있다. 이것이 대중의 시대의 새로운 정치 스타일이다.

 

<광해>가 광대로 읽히고, 싸이가 스스로를 광대로 내세우게 된 건 대중문화가 이제 우리네 정치적 입장까지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니 제발 대중문화나 광대를 우습게 보지 말라. 선거 때 반짝 광대 흉내 내고는 막상 정치권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 싶게 저 <광해>의 신하들처럼 저들 이익에만 휘둘리면서, 대중문화의 토대와 저변을 마련해주기 보다는 뜬 대중문화에 서둘러 숟가락이나 얹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 저 왕을 연기한 광대가 대중들의 입을 빌려 한 그 준엄한 꾸짖음을 잊지 말라.

유재석과 김병만, 우리 시대의 리더십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대선주자들의 공약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언제 공약이 없어서 나라가 이 지경이 됐나. 아마도 대선을 대하는 대중들의 마음은 천만 번의 공약보다는 단 한 번의 실천에 더 진정성을 느낄 게다. 이러한 대중들의 정서를 가장 잘 말해주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유재석과 김병만이다. 이 두 대중들의 영웅은 이 시대가 원하는 리더십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예능 프로그램이 리더십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성을 갖게 된 것은 프로그램들이 집단 MC체제로 운영되고, 그 안에 매번 도전적인 미션을 부여하게 되면서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시대를 연 <무한도전>이나 <1박2일>이 대표적이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대중들이 몰입할 수 있는 서민을 대변하는 캐릭터들을 팀으로 모았다. 그러니 그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에 때론 대중정서가 작동하는 방식은 정치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유재석은 우리에게 겸손과 성실과 배려의 아이콘이다.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어떤 이들에게도 소홀함이 없다. <무한도전>이나 <런닝맨> 속에서 단 몇 초로 지나가 버리는 유재석의 ‘착한 손’은 어김없이 대중들의 눈에 발견되어 칭찬받는다. 그것은 억지로 흉내 내거나 의도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습관처럼 배어있는 품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방송이 스쳐 보낸 것도 대중들은 굳이 찾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무한도전> 300회 특집에서 유재석이 후배들에게 자신이 사라질 때를 대비해 ‘준비를 하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그의 겸손과 성실과 배려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재석의 리더십이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그의 리더십이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공존의 의미를 드러낼 때다.

 

과거 스키 점프대를 오르는 <무한도전>의 미션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가는 길을 밑에서부터 받쳐주며 “포기하겠다는 말만 하지 마라”고 했던 장면은 그의 함께 하는 리더십이 가장 잘 드러났던 사례다. 또 <런닝맨>에서 <슈퍼7> 콘서트 논란으로 하차선언을 하기도 했던 개리에게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라고 소리쳤던 장면에서도 그 리더십은 빛을 발했다.

 

이런 유재석의 면모를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이가 바로 김병만이다. 유재석이 <무한도전>과 <런닝맨>의 팀을 꾸려가고 있다면, 김병만은 병만족의 족장이다. 정글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는 리더십을 발휘해 모두를 생존하게 해야 한다. 이 <정글의 법칙>의 환경은 고스란히 작금의 대중들이 매일 겪고 있는 혹독한(심지어 진짜 정글에 로망을 느낄 정도로) 도시 정글의 삶을 대변한다. 김병만이 이 시대 대중들이 원하는 리더십과 만나는 지점이다.

 

그가 정글에서 부족(?)을 이끄는 방식은 묵묵히 성실하게 일을 하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솔선수범해 나서고, 환경에 생존 적합한 주거공간을 뚝딱 뚝딱 만들어내고 그 안에 부족들이 살을 부비고 살아갈 따뜻한 온기를 부여한다. 그러면서도 그 힘든 환경에서조차 그 힘겨움을 소재로 부족원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정글을 빠져나오며 정작 자신도 힘들어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하지만 그런 모습이 부족들을 힘겹게 할 거라는 걸 알기에 그는 늘 담담한 얼굴에 광대 같은 웃음을 짓는다.

 

<정글의 법칙>을 자세히 보면 놀랍게도 김병만의 멘트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제작진들이 “이제 일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정글에 들어가면 묵묵히 누가 시키지 않아도 구석에서 일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의 과묵할 정도로 일에 빠져 있는 모습은 편집 과정에서 자막이 김병만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장면으로 자주 쓰이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만족들은 김병만에게 의지하고 그의 말을 따른다. 그의 경험을 믿는 것이고, 그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준 것에 대해 부족들이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유재석과 김병만이 이 시대의 정치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저 말이 아니라 실천력 있는 행동이며, 땀이 주는 신뢰다. 말로는 함께 가겠다 하고는 혼자만 배를 채우는 그런 사리사욕이 아니라 심지어 자신이 떠난 후의 시간을 배려할 정도로 함께 가는 리더십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개미 같이 작아 보이는 서민들을 진짜 개미 취급하는 게 아니라, 항상 낮은 자리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낮추는 겸손과 배려의 리더십이다. 지금 대선주자들은 과연 이러한 리더십을 갖추고 있는가.

싸이, 국민가수가 될 필요 있을까

 

“공항에 들어왔을 때, 이건 말도 안된다. 메달 딴 것도 아닌데. 나는 온라인을 믿어본 적 없다. 현장반응이 내겐 더 크게 와 닿는다. 빌보드보다 더한 감격은 여러분이다. 감사드린다.” 싸이가 한 이 진술 속에는 꽤 많은 그의 소회가 들어있다. 그것은 메달 딴 것 마냥 국민적인 성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감격과 동시에 느껴지는 부담감이다. 그는 단 몇 달 만에 월드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그를 국민가수가 되게 했다.

 

'강남스타일'(사진출처:YG엔터테인먼트)

세계의 정상에 다가가면서도 소탈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해외 거주 한국인들에게 자긍심을 세워주고 있다는 점이 국민적인 성원을 불러일으킨 원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빌보드 차트 2위라는 놀라운 소식은 전 국민적인 응원 분위기를 만들었다. 게다가 곧 1위를 탈환할 것이라는 소식, 그것도 마룬 파이브나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팝 본고장의 스타들과 1위를 겨루고 있다는 것. 이런 사실들은 평소 팝을 잘 모르던 대중들까지 그를 국민가수로 세우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에 귀국행을 결정했다. 국내 대학 축제 스케줄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미국에서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유명 프로그램 출연이 가능한 상황에서 국내 스케줄을 조정하려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귀국한 그는 스케줄을 소화해내면서 불평보다는 국내 팬과 활동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서울시청 광장에서의 시민들을 위한 무료 콘서트도 펼쳤고, 춘천, 부산, 대구 등지에서 공연이 준비되어 있다. 진정 국민가수라 불리는 이다운 선택을 한 것이지만 월드스타를 기대하는 한편에서는 아쉬운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사실 국민가수든 월드스타든 국내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동일하다. 마치 국가대표나 된 듯 국가와 국민을 호명하며 그를 세워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구시대적인 시각은 자칫 한 가수의 음악 활동 자체를 왜곡시킬 수도 있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어떤 행위를 한 것이 아니고 그저 자신의 직업에 걸맞게 노래를 한 것뿐이다. 그는 심지어 미국에서 뜨기 전에는 그렇게 주목받지도 못했다. 국민가수로 인정받은 후 월드스타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미국이 그를 월드스타로 만들었고(이것은 국가대표식이 아니라 철저히 상업적인 방식이다) 우리는 여기에 힘입어 뒤늦게 그를 국민가수로 추대했다.

 

물론 이것은 싸이로서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건 그에겐 의외의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국가와 국민이라는 칭호가 붙기 시작하면 거기에 걸맞는 책임과 의무도 따르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세계적인 행보에 비해 사소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대학축제라도 일정조정을 하는 것이 구설수를 만들 수도 있고, 국민적 행사에 나와 달라는 요구 역시 거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실제로 독도 홍보로 ‘강남스타일’을 활용하자는 안이 나왔을 때 그것이 오히려 싸이에게 숟가락 얹기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었지 않은가.

 

우리는 유난히 순위에 민감하다. 세계 몇 위라는 발표는 그 자체로 그 대상에 ‘국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만든다. 그것이 국민적인 일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던 7,80년대 개발시대의 잔재가 아닐 수 없다. 월드스타는 국민이라는 수식어의 또 다른 버전이다. 해외에서 어떤 수확을 해왔을 때, 우리는 부끄럽게도 국내에서 거들떠도 보지 않던 것에 심지어 국민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하지만 문화에 순위를 붙이거나 국민이라는 수식어로 치장하고 상찬하며 샴페인을 터트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제2의 싸이가 나올 수 있게 자유로운 문화적 풍토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싸이가 국민가수나 월드스타 같은 무거운 옷을 벗어던지고 한 가수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그 직분에 맞는 가장 즐겁고도 효과적인 행보를 보이기를 원한다. 국민가수라는 칭호가 그를 거기에 걸맞는 틀에 규정하기보다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그 누구도 하지 않은 뾰족한 길을 걸어가길 바란다. 바로 그 지점에 싸이 같은 세계적인 성공도 가능할 것이니. 그리고 대중들도 그런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는 싸이를 국민보다는 팬으로서 응원하기를 바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