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청률 추산을 왜 하나

 

불과 2,3년 전과 비교해도 작금의 시청률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이런 변화는 특히 드라마에서 두드러진다. 과거 같으면 기본이 20%에서 시작해 잘된 작품은 4,50%를 넘기기 일쑤였던 사극의 시청률이 대표적이다. <마의> 같은 이병훈 사단의 웰메이드 사극도 겨우 17%의 시청률에 머물러 있다. 종영한 <신의>도 10%대 시청률에 머물렀고 <대풍수> 역시 한 자릿수 시청률이다. 물론 이 작품들은 완성도에 그만한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낮은 시청률의 원인이 온전히 작품의 문제만이었을까.

 

'추적자'(사진출처:SBS)

흔히들 사극이 죽었다는 얘기들을 하지만 사실상 죽은 건 드라마 전체의 시청률이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를 빼놓고 20%를 넘기는 드라마가 귀하게 되었다. <착한남자>처럼 극성 강하고 완성도도 높은 드라마도 18% 시청률로 종영하는 상황이다. 사극이 죽었다고까지 표현된 데는 과거 높은 시청률을 올렸던 잔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낙폭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란 얘기다.

 

이런 사정은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만 해도 20%를 넘어 30%에 육박하는 예능 프로그램들(<1박2일>이 그랬고 <무한도전>도 그랬다)이 있었지만 지금은 주말 예능에서조차 20%를 넘기는 프로그램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개그콘서트>가 그나마 20%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 주중 예능 시청률은 더 상황이 안 좋다. 토크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월요일 밤 예능들은 언젠가부터 10% 시청률 기록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다. 도대체 왜 이런 시청률 대폭락이 일어난 걸까.

 

시청률이 이렇게 뚝 떨어진 것은 콘텐츠가 질적으로 하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시청률 산정 방식이 점점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 시청 패턴이 TV 중심에서 인터넷, IPTV, 모바일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는 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이런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AGB닐슨미디어리서치를 예로 들면 현재 시청률 산정은 매일 전국 13개 지역, 3천여 가구를 대상으로 시청률을 산출해낸다고 한다. 각 가구에 설치된 피플미터기(시청률 산출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수치가 집계되는데 이 해당 시간 콘텐츠 자료를 통합하는 방식으로 시청률이 산출되는 것. 물론 과거에는 이런 산정방식이 어느 정도 유효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는 TV 방송을 본다는 것이 브라운관 앞에 앉아있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였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미 인터넷을 통한 다운로드로 방송을 보는 시청층들도 상당히 많아졌고, 시간에 맞춰보기보다는 IPTV를 통해 자유롭게 자기가 보고 싶은 시간에 보는 이들도 많아졌다. 또 최근에는 모바일이 확산되면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보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이렇게 방송을 보는 방법이 다양화되었는데 여전히 오로지 TV에만 맞춰져 있는 시청률 산정은 달라진 시청자의 기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편향적인 시청률은 광고의 잣대가 되기가 어렵다. 실제로 시청률과 광고가 비례적으로 올라가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즉 시청률이 제아무리 40%를 넘긴다고 해서 광고가 더 많이 붙지 않는다는 것. 또 반대로 시청률이 10%에 머물고 있어도 광고를 완판하는 드라마들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서 상반기에 방영되었던 <추적자> 같은 경우는 시청률이 10%대에 머물러 있었는데, 종영까지 광고가 완판된 사례다. 이 드라마는 국민드라마라는 칭호까지 받았는데 그것은 시청률은 조금 낮았지만 화제성이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이라는 수식어의 기준도 시청률에서 화제성으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다.

 

문제는 이러한 시청률 산정 기준이 가져오는 폐해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의 시청률 산정 기준으로는 TV 방송 프로그램을 급격히 노화시킬 수밖에 없다. TV를 통해 보는 시청층이 중장년층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1일 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10년 사이에 10-30대의 시청률은 절반 이상이 줄었다고 한다. 2002년 13%였던 이들 세대의 평균 시청률이 올해는 5%대에 머물고 있다는 것. 이제 현재의 시청률 산정 기준은 고작 중장년층들의 기호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막장드라마라고 불리는(여기에는 젊은 층들의 비아냥이 섞여 있다) 전형적인 과거의 자극적인 코드들을 답습하는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이러한 시청률 산정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 소위 막장드라마들의 주 시청세대는 중장년층이기 때문이다. 출생의 비밀이나 불치병, 기억상실, 신파 같은 코드들은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이템들이다. 결국 젊은 세대의 기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현재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방송 콘텐츠가 질적으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정체되는 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류 콘텐츠의 퇴보로도 이어질 수 있다. 지금 같은 중장년층에 편향된 시청률에 좌지우지되는 방송 환경 속에서 젊은 세대들의 눈에 걸맞는 새로운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시청률 산정에는 포착되지 않는 화제성 높은 젊은 드라마들을 마니아 드라마로 치부하는 것은 방송 콘텐츠에서 젊은 세대를 소외시키는 행위다. 세상에 마니아 드라마가 어디 있는가. 단지 작금의 시청률 산정이 그 기호를 반영하지 못할 뿐이다.

 

중요한 건 이제 중장년층들조차 이렇게 다양화된 시청패턴에 적응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은 여전히 방송을 TV로 보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지만, 이미 90년대 인터넷을 경험한 3,40대의 경우 인터넷 시청이나 모바일 시청이 낯선 일이 아니게 되었다. 또 이른바 본방사수라는 실시간 시청보다 자신이 편안한 시간에 보는 ‘다시보기’ 시청 패턴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결국 지금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중장년층의 기호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시청률 산정 기준이 나이든 세대의 기호만을 반영하고, 따라서 그런 방송 프로그램들만 높은 시청률이란 왕관을 쓰고 더 많아지는 것은 자칫 TV콘텐츠의 보수화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이렇게 되면 볼 것 없는 젊은 세대들은 TV가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한 콘텐츠를 찾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TV의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지금의 미디어 발달 속도로 볼 때 이런 이탈의 속도 또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커다란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 세대의 기호를 반영하지 못하고, 광고 산정 기준도 되지 못하며 그저 고정적인 TV 시청층의 취향만을 보여주는 이런 시청률 추산을 왜 하는 걸까. 설마 여기에도 매체를 하나의 정치적인 도구로 바라보는 구태적인 시선이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의 유명무실한 시청률 산정 기준은 빠른 시일 내에 달라져야 한다. IT 강국, 한류를 전면에 내세우는 우리에게 이 두 분야가 합쳐질 수 있는 인프라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인프라 위에 제대로 거기에 맞는 콘텐츠를 세울 수 있는 새로운 평가방식이 등장해야 한다.

<최후의 제국>이 대선주자들에게 건네는 말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울렸을까. SBS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단 몇 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아주 작은 섬 아누타에서 촬영을 마치고 떠나는 제작진들을 향해 원주민들이 통곡을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우리 주변의 누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도시인들에게 그저 이별이 아쉬워 통곡하는 원주민들의 모습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최후의 제국'(사진출처:SBS)

아마도 제작진도, 그 장면을 보는 시청자들과 똑같은 마음이었을 게다. 그들은 처음에는 멍해졌다가 차츰 그 통곡이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어느새 그 울림이 닿은 제작진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장면을 본 시청자도 마찬가지의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말이 오고갔던 것도 아닌 그저 진심을 담은 마음 하나만으로 그들은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최후의 제국>. 영어 제목은 <The Last Capitalism>으로 ‘최후의 자본주의’를 뜻한다. 즉 자본주의의 위기를 다루는 이 다큐멘터리는 왜 그 멀고도 먼 외딴 섬 아누타까지 찾아갔을까. 그것은 아누타 섬이 자본주의에 의해 돈으로 모든 가치가 평가되는 세상과 정반대되는 가치를 보여주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제작진 앞에서 펑펑 눈물을 흘리는 그들이 보여준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깊은 공감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그 공감의 가치는 서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가치로 이어지고 있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의 세계는 아누타 섬과는 정반대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돈으로 가치 매겨지는 세상은 자신의 몸매 관리를 위해 대리 수유모를 사는 부자 엄마와 당장 벌이를 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 대신 남의 대리 수유모가 되는 가난한 엄마를 이어주었다. 급격한 자본의 물결이 몰아닥쳐 신흥 부자계급이 생겨난 데다, 멜라민 분유 파동으로 모유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중국의 새로운 풍경이다. <최후의 제국>은 이 풍경에 대해 묻는다. 과연 돈은 모성도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고등학교는 수업에 빠지지 않고 숙제를 잘 해온 학생들에게 돈을 준다. 제 아무리 청소년 범죄를 줄이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주려는 학교의 고육지책이라고는 해도 이런 교육은 결국 학생들에게 돈이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이 가치의 본말이 전도된 교육은 과연 이 학생들이 살아갈 세상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라는 미국이 34개 OECD 국가 중 빈곤율 4위라는 충격적인 보고에서 드러난다. 다큐멘터리는 플로리다주의 모텔에서 살아가는 굶는 아이들을 조명하며 이 아이들이 왜 이런 불행에 처하게 됐는지를 꼬집는다.

 

아마도 그토록 멀리 떨어진 아누타 같은 외딴 섬까지 찾아가서야 비로소 자본이 아닌 인간을 찾아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계의 불행을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1%의 부와 99%의 가난. 미국에서 월가를 점령했던 그 유명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이 전 지구적인 위기 상황을 만들어낸 자본주의의 불편한 풍경들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과 이기심보다 중요한 공존의 가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돈이라는 번쩍거리는 괴물에 가려 바라보지 않던 그 불편한 진실을 우리 눈앞에 들춰냄으로써 급기야 공감하게 만드는 <최후의 제국>은 그래서 그 어떤 거창한 정상들의 회의나 연설보다 더 우리를 울리는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양극화가 극에 달하고 있는 지금, 저 미국의 풍경이 어찌 우리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선에 즈음하여 모든 대선 주자들이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이 단순한 수사에 머무르면 안 될 것이다. <최후의 제국>은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들고 또 실천에 옮기게 만드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돈에 미친 세상에 던지는 다큐의 일침. 이것이 <최후의 제국>이라는 명품다큐가 보여주는 가치다.

방문진 김재철 해임안 부결이 가져올 파장

 

결국 또 <무한도전>을 못 보게 되는 것인가. 사실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대중들도 MBC 파업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힘겨운 현실에 서민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는 게 그나마 방송이기 때문이다. MBC의 <무한도전>이 마치 파업의 상징처럼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대중들은 복잡하고 거창한 정치 이야기보다 소박하게 <무한도전> 같은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왜 자꾸 못 보게 되는가에 더 관심이 많다. 물론 방송정상화를 위해 선택한 <무한도전>의 불방조차 지지하는 쪽이지만.

 

'뉴스데스크'(사진출처:MBC)

대중들이 갖고 있는 MBC 경영진에 대한 감정은 그 시청률 하락을 통해서도 보여지고 있고, 또 드라마나 예능 같은 MBC 콘텐츠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을 통해서도 보여지고 있다. 제 아무리 괜찮은 콘텐츠를 만들어도 대중들은 시큰둥해 한다. 방송사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뉴스 프로그램에 대해 보이는 대중들의 반응을 보면 방송사로서는 너무 치명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뉴스데스크>가 9시에서 8시로 옮겨진다는 사실 자체가 MBC의 치욕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옮긴 8시 <뉴스데스크>의 일련의 실수들(자막부터 방송사고까지)에 대해 대중들이 보내는 야유는 그 정서를 이해하게 한다.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 이사회가 지난 8일 김재철 사장 해임안을 찬성 3표, 반대 5표, 기권 1표로 부결시켰다는 사실은 이러한 정서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문제는 이 사태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대선 정국에 뜨거운 이슈로 떠오를 거라는 점이다. 해임안이 부결된 직후 양문석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김충일 방문진 이사에게 청와대 하금열 대통령실장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김무성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이 '김재철을 지켜라'라는 내용의 압박성 전화를 했다"고 밝혔다. 김사장 해임안 가결을 놓고 논의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하금열 실장과 김무성 본부장이 개입하면서 이 논의가 무산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또 야당 측 이사들과 문화방송 노조는 지난 6월 파업을 철회하는 과정에서도 방통위 상임위원들로부터 김사장 퇴진을 위해 노력한다는 비공개 합의서를 만들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결국 당시의 약속들이 손바닥 뒤집듯 하나도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해임안 부결에 대해서 김충일 이사는 “외압은 없었다”고 밝혔고, 하금열 실장 역시 “(김충일 이사와) 통화를 많이 하지만 김재철 사장의 연임과 관련한 전화 통화는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MBC의 문제가 정치권의 이슈로 떠오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대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야권에서 주장하듯이 이번 사태는 대선에도 영향을 줄 여권의 언론장악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대중들의 MBC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는 게 사실이다. MBC 관련 기사에 댓글이 1천개씩 달리고 그 대부분은 비판과 성토라는 그 대중정서가 얼마나 나빠져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 잘 모르는 이들까지도 요즘 MBC 왜 그러냐고 말이 나올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MBC의 문제가 대선 정국과 긴밀하게 관련을 갖기 시작한다면 아마도 정치권에서 이 문제에 대한 부담감도 커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어쨌든 이번 사태로 또 <무한도전>을 못 보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파장은 의외로 대선에서 터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대중은 그렇게 바보가 아니다.

유력 대선 후보들의 TV토론이 필요한 이유

 

박근혜와 문재인이 출연했을 때, <힐링캠프>는 마치 대선캠프나 된 것처럼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보통 6%에 머물던 시청률이 12%, 10%를 넘어섰다. 놀라운 수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대선 후보로 지목되던 박근혜는 그간 너무 침묵으로 일관해왔기 때문에 그 진면목을 보고 싶다는 대중들의 열망이 있었고, 문재인은 여기저기서 박근혜의 대항마로 지목되는 야권 후보였지만 대중들에게는 덜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 안철수는 대선에 출마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대중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힐링캠프'(사진출처:SBS)

물론 <힐링캠프>라는 예능 프로그램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문재인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질문에도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낸 반면, 박근혜는 정치적인 질문에조차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힐링캠프>는 토론 프로그램이나 정책비전을 보여주는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니까. 이것은 이미 <무릎팍도사>를 통해 대중들에게 많은 공감을 사고 지지를 얻었던 안철수가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안철수는 당시 상식과 비상식을 설파하며 복지, 정의, 평화라는 3대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그의 정치적 소견과 비전에 대한 대중들의 갈증이 해소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박근혜, 문재인에 이어 안철수까지 연달아 출연한 <힐링캠프>는 다른 정치인들에게는 애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문수 새누리당 경선 후보가 자신의 출연이 거부된 <힐링캠프>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토로한 것은 이제 방송출연이 갖는 정치적 함의가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원하는 방송이 더 이상 <100분토론> 같은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토크쇼 같은 대중들이 선호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어 한다.

 

이유는 대중 정치의 시대에 대중들과의 소통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들의 언어로 "새우와 고래가 누가 세냐"며 "새우는 깡이 있고 고래는 밥이다"라는 식의 농담도 준비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자신이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이것은 예능 프로그램의 한계가 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일반인으로서의 소통일 뿐이다. 그 진솔한 태도는 물론 중요하겠지만 정치인의 소통이란 정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천해 보일 때 비로소 이뤄지는 것이다. <힐링캠프>가 보여준 소통이란 어쩌면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 소통하는 이미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그 힘이 지대하다는 것은 이들 세 인물이 향후 대선의 3강 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부터 중요한 건, 이들이 TV라는 대중 매체를 통해 좀 더 자신들의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고 소통하는 자리다. 대선이 가까워오고 있고 TV만 켜면 여전히 대선후보들의 행보를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정작 이들이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나라의 미래에 대해 비전을 제시하는 모습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최근 KBS는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유력 대선 후보 3인의 순차토론을 준비해오다 무산됐다고 한다. 문재인, 안철수 후보는 참석하겠다는 공문을 보냈지만 박근혜 후보쪽은 세 후보의 토론 순서를 추첨으로 정하도록 한 KBS의 제안이 불공평하다며 공문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박근혜 후보 측에서 심기가 불편한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것은 문재인과 안철수 두 후보가 단일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단일화 문제에 더 관심이 집중될 수도 있고, 3자 토론을 할 경우 박근혜 후보에게 불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KBS가 제안한 건 3명을 연달아 불러 진행하는 개별 토론이다. 결국 KBS는 박근혜 후보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공정성에 위배될 수 있다며 토론 자체를 취소해버렸다. 공영방송으로서 여당 후보의 눈치 보기를 했다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대중들이 이제 40여일을 앞두고 있는 대선주자들의 정치인으로서의 진면목을 보고 소통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그 어느 선거운동보다 뜨거운 것이 바로 TV토론이다. 그 날 그 날의 이슈에 대한 후보들의 정책 대결과 토론은 연일 TV를 통해 미국 전역에 보여지고 그로 인해 지지율이 등락하는 모습은 우리로서는 심지어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TV라는 대중매체가 가진 어쩌면 가장 효과적인 쓸모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도대체 우리네 후보들은 언제쯤 대중들에게 TV라는 친숙한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정책적 비전을 보여줄 것인가. <힐링캠프>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가족 얘기를 하거나, 뉴스를 통해 재래시장을 다니며 악수나 하는 그런 모습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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