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백의 신부’, 코미디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중증 강박장애였을 거에요. 완전무결을 위한 강박. 피해망상. 박상철 그 사람 계속 나를 만나고 싶어 했어요. 마지막 구조신호였을 거예요. 마봉열씨도 그렇고 이번 일도. 의사인 내가 봐야할 걸 보지 않고 들어야 할 걸 듣지 않아서 생긴 일들일까요?” tvN 월화드라마 <하백의 신부 2017>의 윤소아(신세경)는 하백(남주혁)에게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의 아픈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자신을 그렇게 자책한다. 

'하백의 신부(tvN)'

하지만 그녀는 또한 그렇게 정신이 아픈 이들의 삶에 연루되는 것을 버겁게 느낀다. 정신과 의사로서 누구보다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겪을 부담은 피하고 싶은 것. 그래서 하백에게 그 정반대의 감정을 토로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런 일로 책임감 갖거나 미안해하거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냥 내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요.”

하백은 그러나 그녀의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근데 하난 확실하지. 넌 네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할 거야. 넌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상황을 자전거 바퀴에 비유해 이야기한다. “내가 바퀴에 관심 있어서 좀 찾아봤는데 자전거라는 게 그렇더군.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쓰러지지 않아. 네 마음이 넘어지려는 쪽이 어딘지 너만 모르는 거 아냐? 자꾸 억지로 반대로 꺾으려 하면 쓰러져 골병든다.”

사실 <하백의 신부>가 가진 이야기의 기조는 판타지와 코미디다. 그래서 조금 썰렁한 코미디들이 반복되고 또 허공으로 붕 날아오르거나 고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는 소아를 하백이 끌어안고 구해내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량 위로 탈출해 내려오는 판타지적 장면들을 보다보면 흥미롭긴 해도 어딘지 너무 가볍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99%의 판타지 코미디적 설정들을 잘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1%의 진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왜 윤소아가 하필이면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로 설정되어 있고, 여기 등장하는 신들이 물과 하늘같은 자연(주로 기후와 관련이 있는)을 관장하는 신들이며, 하필이면 하백의 경쟁자로 등장할 후예(임주환)라는 인물이 리조트 개발 회사의 대표인가에서 드러난다. 

후예가 하는 리조트 개발이란 다름 아닌 자연을 파헤쳐 인공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것으로 부를 창출하는 사업이다. 그리고 지금 후예가 만들려는 리조트는 다름 아닌 하백을 대대로 받들어오던 윤소아의 조상들이 살던 터전이다. 그녀는 이 땅을 무려 7배의 가격으로 사겠다는 후예의 제안에 반색하지만 리조트 개발을 둘러싼 하백과 후예 사이의 대결구도는 어쩌면 윤소아를 흔들리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실로 자본의 세상에서 살아가며 돈이 신인 물신을 숭배하는 현대인들에게 <하백의 신부>는 하백이라는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행복한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윤소아는 어떤 길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까. 

신석을 잃어버린 무라(정수정)와 비렴(공명)은 하백과 대립하며 심지어 그의 신력을 시험하기 위해 윤소아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신(자연)이 갖는 무심함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세상으로 오며 신력을 잃어버린 하백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들과는 다르다. “배도 고프다며?”하고 묻는 비렴의 질문은 하백이 인간적인 고통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특별한 신이라는 걸 오히려 드러낸다. 

윤소아는 신과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며 헷갈려 한다.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의 환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면서도, 자신은 그런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그래서 궁금하다. “신들이 다 이 모양이라 세상이 이 꼬라지인지. 세상이 이 꼬라지라 신들이 포기하고 저 모양인지.”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희망 하나는 힘들게 살아가며 투덜대면서도 그런 삶조차 고마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고맙습니다. 또 살려준 거. 그리고 오늘 종일 바쁘게 해준 거.” 그녀가 하백에게 전하는 이 한 마디는 마치 우리가 힘겨운 현실에 나갔다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 작은 기도 속에 담는 희망을 닮았다. 99% 판타지 코미디의 외피를 갖고 있는 <하백의 신부>가 그 안에 촘촘히 숨겨놓은 1%의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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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백의 신부’가 전하려는 진심, 과연 통할 수 있을까

“잘 들어. 물의 신, 하늘의 신, 땅의 신. 우리들은 자연이다. 곧 나는 자연이다.” 하백(남주혁)의 이 대사는 낯설다. 현실적인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이 주인공이 하백이라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낯선 말을 하는 인물 앞에 선 소아(신세경)의 황당과 당황은 마치 시청자들이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게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그 말을 듣고는 이렇게 반문한다. “나는 자연인이라고요?”

'하백의 신부(사진출처:tvN)'

우리에게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의 제목이 “나는 자연이다”라는 대사보다 훨씬 더 익숙하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나는 하백이다”를 반복해서 말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드라마는 바로 그 비현실성 때문에 초반 몰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tvN <하백의 신부>라는 드라마는 그래서 이를 위해 병맛 코미디를 그 장르로 차용해 이 어려운 몰입을 유머로 넘어서려 한다. 

<하백의 신부>의 첫 방에 나오는 비판적 목소리들은 사실 예견된 것들이다. 이 작품은 원작 만화가 가진 ‘신계의 이야기’라는 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계로 내려온 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나 그 신을 연기한다는 건 사실 시청자들을 몰입시키기가 몇 배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저 소아의 입장이 된다. “나는 자연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하백에게 자꾸만 “나는 자연인이라고요?”라고 묻게 된다. 

이런 병맛 코미디 설정을 몰입을 위한 전략적 장치로 세우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왜 이런 하백이라는 신의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가 하는 그 의도일 게다. 사실 비현실적인 설정과 이를 넘어서려는 병맛 코미디라는 설정의 겉면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하백의 신부>는 첫 회에 상당 부분 그 의도를 대사 속에 드러내고는 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질문이다. 

“이봐 종. 넌 정말 가장 필요한 게 도오온이야? 인간에게 왜 그렇게 도오온이 필요한거지?” 하백이 묻자 소아는 말한다. “도오온이 있으면 행복해질테니까요.” 그러자 하백은 그녀의 말을 뒤집어 그 의미를 되새긴다. “이봐 종. 넌 가장 필요한 게 도오온인데 도오온을 가지면 행복해지니까. 가장 필요한 건 행복이군.”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소아에게 하백은 거꾸로 그녀가 진짜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하지만 그 단순한 사실을 그녀는 머리로는 이해할지 몰라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당장 대출을 연장하지 않으면 파산할 위기에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은 너무나 쉽게 아주 낮은 금리에 돈을 빌릴 수 있지만, 없는 이들은 어렵게 그것도 아주 높은 금리에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빌려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현실 앞에 그녀는 서 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행복일지 모르죠. 정말 지쳤거든요. 그러니 이제 그만 가주세요.”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지쳤다고.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을 그녀는 돈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산 속에 있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팔리지도 않는 땅이 전부이니. 

그 산 속에서 하백과 그녀가 마주하는 상황은 그래서 그 병맛 코미디 너머를 바라보면 자못 의미심장하다. 아무 것도 없는 그녀가 마주한 건 하백 스스로 얘기했듯, ‘자연’이니 말이다. 그 자연 속에서 네비게이션에 기대 길을 가던 그녀는 길을 잃는다. 그런데 그건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자연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된 것일까. 

지친 현실 속에서 돈이 구원이 될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때론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우리를 넉넉히 껴안아주는 자연이 주는 행복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하백의 신부>가 병맛 코미디 속에 숨겨 말하려는 진심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구나 다 가질 수 있지만 찾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자연처럼 행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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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 스컬아일랜드’가 건드리고 있는 미국의 트라우마와 중국의 야심

누가 세상의 왕인가. 영화 <콩 : 스컬아일랜드(이하 콩)>에서 패카드 중령은 ‘인간이 세상의 왕’이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이 <콩>인 것처럼 인간은 이 세상의 왕이 아니다. 그리고 패카드 중령(사무엘 잭슨)이 말한 ‘인간’이란 우리를 통칭한다기보다는 미국을 지목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사진출처:영화<콩:스컬아일랜드>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베트남전이 끝나는 지점이라는 건 이 영화가 미국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베트남전은 결국 미국의 패전으로 끝난 것이지만, 백전노장이라고 자칭하는 패카드 중령은 그것이 ‘패배’가 아닌 ‘포기’라고 표현한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지 쫓겨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패카드 중령이 굳이 베트남전에 대해 ‘패배’와 ‘포기’ 같은 표현에 집착한다는 점은 그가 이 전쟁에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스컬아일랜드 탐사 미션이 내려지자 국가가 그에게 그런 새로운 임무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한다. 

숨겨진 섬, 스컬아일랜드의 정글이 연상시키는 것은 그래서 베트남전에서 미군들이 그 곳의 정글에서 느꼈을 당혹감이다. 그들은 헬기를 타고 로큰롤 음악을 틀며 폭탄을 투하하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킬 반향을 생각하지 못한다. 스컬아일랜드의 왕인 깨어난 콩은 그래서 베트남의 정글이 미군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듯이 섬의 침입자들을 처단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지점은 과연 전쟁을 누가 일으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패카드 중령과 탐사팀이 이 섬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 섬에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콩의 보호(그는 마치 섬의 수호자 역할을 한다) 아래 평화로웠다. 섬을 위협하는 괴생물체들이 있지만 콩이 그 위협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패카드 중령은 콩을 죽이고 섬을 장악하겠다는 무리한 작전을 수행한다. 섬의 전쟁을 일으키는 건 패카드 중령의 전쟁 트라우마 그 자체다. 

영화 <콩>은 여러 영화들 속 모티브들을 가져와 한 데 엮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거기에는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의 장면들이 연상되고, 물론 <킹콩> 같은 괴생물체와의 대결과 <쥬라기공원> 같은 특정한 공간에서의 사투 같은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게다가 중국시장을 겨냥한 듯 이 작품에는 중국을 연상시키는 오리엔탈리즘이 깔려있고 중국배우 경첨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괴수들은 괴수물 마니아라면 열광할만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 많은 요소들을 가져와 <콩>이 하려는 이야기는 명백하다.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콩으로 대변되는 자연이라는 것. 그런데 이 이야기에 흥미로운 지점은 미국의 트라우마와 중국의 야심 같은 것들이 어른거린다는 점이다. 전쟁에 광분하는 패카드 중령이 늘 전쟁을 해온 미국을 표상한다면, 스컬 아일랜드의 수천 년을 괴수들과 싸워오며 이제는 거의 달관의 경지에 이른 원주민들은 마치 중국을 표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런 뉘앙스들은 다분히 중국시장을 염두에 둔 영화의 포석처럼 보이지만.

물론 <콩>은 그리 심각하게 볼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저 그런 괴수물의 스펙터클로 끝날 수 있었던 <콩>을 그나마 흥미롭게 해주는 지점은 바로 이 미국의 전쟁 트라우마가 담겨지는 부분이다. 많은 전쟁에서 미국이 계속해서 승리해온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승리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여전히 전쟁을 늘 입에 올리게 만드는 어떤 강박이 아닐까 하고 영화가 은근히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일찍이 <다음 침공은 어디?>라는 재기발랄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한국, 베트남, 레바논,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 벌인 미국의 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들은 2차 대전 이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지고 또 진 패배를 하나씩 짚어갔다. 엄청난 돈을 낭비하며 IS 같은 집단만 생겨나게 했고 그런 전쟁에서 얻은 건 또 다른 전쟁뿐이었으며 장담했던 석유조차 챙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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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왜 하필 어우야담의 인어이야기일까

 

넌 좋은 사람이야. 내 손 놓고 갈 수 있었는데 잡았잖아 여러 번.” 인어 심청(전지현)의 한 마디에 순간 허준재(이민호)의 눈빛이 흔들린다. 늘 입만 열면 거짓말만 늘어놓는 머리 좋은 사기꾼 허준재는 여자에게도 진심보다는 허세와 너스레만 늘어놨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달콤한 거짓말에 넘어가던 여자들과는 달리, 심청의 말은 너무 진심이라 오히려 그를 뜨끔하게 만든다.

 

'푸른바다의 전설(사진출처:SBS)'

SBS 수목드라마 <푸른바다의 전설>이 굳이 어우야담에 수록된 담령과 인어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이런 전설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현재에 새로운 인어이야기를 이어가려한 이유는 뭘까. 그건 어째서 동서양을 망라해 어디서든 인어의 전설이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왔고 그 전설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어란 인간과 바다의 경계에 선 존재다. 거기에는 인간의 세계와 바다의 세계가 교차한다. 인어 전설이 말하는 것은 바다가 가진 자연 그 자체의 순수함과 대비되는 인간 세계의 욕망이고 그 부딪침과 상생의 길이다. ‘어우야담에 기록된 담령의 이야기에서도 나오듯 <푸른바다의 전설>에서 인어를 잡은 양씨(성동일)인어에게서 기름을 취하면 무척 품질이 좋아 오래되어도 상하지 않는다날이 갈수록 부패하여 냄새를 풍기는 고래 기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자연을 생명으로 보기보다는 욕망을 채워줄 물질로 바라보는 시각.

 

그래서 인어 전설에 등장하는 인간과 인어의 사랑은 어찌 보면 단순한 연애담이라기보다는 자연을 대변하는 인어라는 존재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을 그려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을 묻는 심청에게 허준재는 사랑은 위험한 것이라며 그건 항복이고 지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욕망 자체가 없는 순수한 영혼의 심청에게 이기고 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는 바로 허준재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 말이 또 허준재의 가슴을 파고든다.

 

거짓말만 늘어놓지만 그 때마다 툭툭 던지는 심청의 진심이 담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를 흔들어 놓는다. 즉 허준재라는 사기꾼이 이 욕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들의 삶의 방식이라면, 자연을 대변하는 존재로 나타난 심청은 그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진심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짐으로써 그 삶의 방식이 어딘지 잘못되었다고 알려준다.

 

요즘 같은 시국이 보여주듯이 말이라는 것은 진심을 담기보다는 진실을 가리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처음 등장한 심청이 말을 하지 않고 표정과 행동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건 그런 의미일 게다. 그녀의 말 없는 진심은 허준재라는 사기꾼의 말 많은 거짓과 대립한다. 그러면서도 이 심청이란 존재는 허준재의 속 깊은 곳은 아직 남아있는 순수한 한 지점을 믿고 그걸 끄집어낸다.

 

백화점에서 신발을 사주고는 도망치려 했던 허준재의 발길을 돌려놓은 건 다름 아닌 그의 기억 속에 담겨진 어린 시절 엄마와의 기억 때문이다. 바다가 보이는 세상의 끝에서 자신에게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가버린 엄마에 대한 기억. 그 아픈 기억은 그에게 세상의 끝같은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최소한 간다는 말이라도 해주기 위해 심청에게 돌아온 허준재의 그 마음 한 자락은 그래서 그 거짓으로 포장된 그에게 남아있는 순수한 한 지점을 드러낸다.

 

심청이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허준재의 장면은 그래서 자연을 대변하는 인어가 가진 순수의 세계와 거기서 떠나왔던 인간의 세계가 손을 맞잡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허준재에게는 세상의 끝으로 여겼던 삶이 다시 바다로 이어지는 세상의 시작이 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인간이 사는 육지의 끝이 인어가 사는 바다의 시작이라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물론 <푸른바다의 전설>1600년대에 쓰인 어우야담의 한 대목을 가져와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로 엮어놓은 작품이다. 그래서 인어의 순수함은 바보스러움이거나 늑대처녀같은 말들로 표현되며 웃음을 주지만, 순간순간 그 인어가 꺼내놓는 진심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건 이 작품이 웃음 이면에 숨겨놓은 진지함이 그럴 때마다 슬쩍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말의 시대, 욕망의 시대 그리고 상실의 시대. 요즘 같은 시대에 그 순수함이란 전설로나 불리는 어떤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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