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플렉스 시대, 무주 산골영화제의 특별한 체험

 

무주 산골의 어둠과 정적은 더 깊었다. 그래서 불을 끄면 마치 영화관 속에 들어와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영화관은 바람에 묻어나는 나무와 풀 냄새가 났고 간간이 반딧불이가 날아와 은은한 빛을 점멸하며 지나가곤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답답한 건물 천정 대신 확 트인 또 다른 스크린이 펼쳐졌다. 밤하늘이 펼쳐내는 스크린 위에는 도시에서는 좀체 볼 수 없었던 별들이 반딧불이처럼 반짝였다. 그것만으로도 영화 그 이상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사진출처: 무주 산골영화제

올해로 4회를 맞은 무주 산골영화제 개막식장 풍경. 내외빈들은 풀밭 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어둠 저편 무대에서 펼쳐지는 개막작 <2016 필름 판소리, 춘향뎐>에 시선을 빼앗겼다. 무주 산골영화제 개막작은 영화와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종합 영화 공연이 특징이다. 작년 개막작 <어느 여름밤의 꿈, 찰리 채플린>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 마임으로 새롭게 덧칠한 인상적인 무대를 보여준 바 있다. 올해 개막작인 <2016 필름 판소리, 춘향뎐>1961년 방영된 신상옥 감독, 최은희, 김진규 출연의 <성춘향>에 음악감독 손성제의 재즈와 소리꾼 이소연의 판소리가 엮어져 환상적인 무대를 연출했다.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그 오래된 춘향전을 영화로 재현함으로써 과거의 작품을 현재화시켰던 것처럼, <2016 필름 판소리, 춘향뎐>은 이제는 과거가 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을 재즈와 판소리의 퍼포먼스를 통해 현재화시켰다. 낡은 필름이 보여주는 거친 질감과 후시녹음으로 어색한 발성들이 만들어내는 오래된 영화가 관객을 과거의 시간여행으로 이끌고 들어간다면, 손성제의 재즈와 소리꾼 이소연이 눈앞에서 영화의 내용과 딱 맞아떨어지게 펼치는 퍼포먼스는 그 과거를 다시 현재로 소환시킨다. 영화 공연은 그래서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직선적인 시간을 다시 현재에서 과거로 연결시켜 시간의 고리를 체감하게 해준다.

 

문득 그 오래된 영화가 새롭게 보인다. 낡은 영화지만 그 안에 담겨진 신상옥 감독의 예사롭지 않은 시선들이 보이고 조금은 과장되어 보이지만 그 연기에 담은 최은희, 김진규의 열정이 느껴진다. 왜 하필 무주 산골영화제의 개막작들은 이처럼 옛 영화들을 가져오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거기에 현재적인 시선을 담아 다시 들여다보자 현재의 영화들이 주지 못하는 진짜 영화 체험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우리네 춘향전이 저렇게 멋스러운 이야기였었나.

 

이른바 멀티플렉스 시대다. 영화관에 가면 영화들이 넘쳐난다. 너무나 쾌적하고 의자도 편리하며 좌석도 많고 넓은데다 음향은 실감날 정도로 짱짱하고 시각체험은 진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입체적이다. 그래서 사람들도 넘쳐난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구획된 방으로 들어가 편안히 앉아 보는 그 영화들이 어떤 쾌감을 주긴 하지만, 때로는 옛 영화들이 주었던 어떤 정서와 감성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편안한 멀티플렉스가 제공하는 시각과 청각의 자극이 주는 쾌감들 속에서 우리가 점점 둔해지고 잊고 있던 정서와 감성들.

 

무주에는 멀티플렉스가 없다. 무주에 있는 영화관은 그 이름이 산골영화관이다. 과거 소극장 정도의 규모지만 영화제가 있는 기간에는 이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로 붐빈다.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멀티플렉스가 주지 못하는 감성과 정서가 느껴진다. 무주 산골영화제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밤이 되면 산골 곳곳이 영화관이 된다. 이른바 찾아가는 영화관이다. 멀티플렉스가 사람들을 잡아끄는 상업적인 공간으로서 영화관을 상정한다면, 찾아가는 영화관은 이처럼 상업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어버린 영화관을 온전히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으로 되돌려준다.

 

무주 산골영화제는 여타의 지역에서 벌어지는 영화제들과 달리 소박하다. 거기에는 화려함보다는 부족하고 퇴색하여 오히려 영화가 갖는 진짜 향기를 느끼게 해주는 구석이 있다. 때로는 영화도 공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영화 자체가 그렇다기보다는 그것을 담는 그릇이 너무나 상업적으로 경도되어 본질을 가리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관 체험에 어떤 피로를 느꼈다면 무주 산골영화제는 그 피로와 자극을 덜어내 온전한 영화적 체험으로 우리를 되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힐링이 따로 있나. 이것이 힐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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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 단순한 카타르시스가 아닌 성찰을 택한 까닭

 

영화 <대호>는 그 제목이나 포스터만으로도 압도적이다. 포스터 한 가득 얼굴을 채운 최민식에게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는 영화 속 대호와 그 이미지가 절묘하게 겹쳐진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호랑이라는 문구는 그 압도감에 비장미까지 흐르게 만든다. <대호>라는 영화에서 어떤 강력한 액션과 스펙터클 그리고 포스와 맹수 사이에 오가는 긴장감을 기대하는 건 그래서 당연한 일일 게다.

 


사진출처:영화<대호>

하지만 생각만큼 <대호>는 관객들에게 쉽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일본군들이 마치 전쟁을 치르듯 대호 한 마리를 잡겠다고 산으로 진군하고 그들을 성난 호랑이가 궤멸시키는 장면은 잠깐의 카타르시스가 제공하지만 이야기의 서사는 그 시각적인 쾌감이나 액션의 장쾌함에 맞춰져 있지 않다. 대신 이야기는 인간과 자연의 대결과 공존이라는 진중한 문제의식을 담아낸다.

 

지리산 깊숙이 살고 있는 산군(山君)이라 불리는 대호를 최고의 전리품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본군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는 열을 올리고 지리산은 삽시간에 일본군들의 군화발로 짓밟힌다. 도포수 구경(정만식)은 그 대호를 잡는 데 앞장서지만 조선 최고의 명포수인 천만덕(최민식)은 자신의 오발로 아내가 죽게 된 후 사냥에 나서지 않고 약초를 캐며 근근이 살아간다. 이야기는 결국 이 천만덕이 대호 사냥이라는 사건 속에 어떻게 휘말려 들어가게 되는가를 다루고 있다.

 

즉 영화 속 지리산이라는 공간은 일제 치하의 우리 땅을 표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자본과 인간에 의해 짓밟히는 자연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요하면 올무라도 놓아 무조건 잡으려는 구경이라는 사냥꾼과, 사냥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선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 천만덕이라는 사냥꾼의 대결구도 역시 자본화된 세상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직업의식의 문제를 담아낸다.

 

대호와 천만덕은 그래서 동일시된다. 이 두 서로 다른 존재는 똑같이 사냥을 하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 그 이상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 입장을 공감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법칙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치를 밀어버리고 들어오는 이들이 구경과 일본군들이다. 그들은 생존과 상관없이 욕망에 의해 상대를 포획하고 죽이려 한다. 조선을 침범하고 있는 일본군들처럼.

 

이러한 명쾌한 대결구도와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대호>는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을 열어놓는다. 즉 일본군을 물리치는 조선 마지막 호랑이 같은 단순한 그림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영화는 통쾌함보다는 진지함이 더 많이 묻어나고 그 스러지는 생명들에 대한 처연함 감정들이 피어난다.

 

아마도 이 부분을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대호>는 꽤 먹먹함을 안겨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막연한 카타르시스만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적잖은 실망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성찰적인 시선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더 대중적인 면들을 부각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 마지막 호랑이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마지막 포수가 주는 공감은 충분하다고 여겨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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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의 자연, 사람, 음식이 남긴 것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 지...” <응답하라1988>에 흘러나오는 동물원의 혜화동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삼시세끼> 어촌편 시즌2가 종영했다. 종영에 즈음해 생각해보면 <삼시세끼>가 하려던 이야기는 그 가사의 한 구절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잊고 살아왔던 참 많은 것들이 <삼시세끼>를 통해 환기되었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만재도는 이제 너무나 친숙한 섬이 되었다. 그 누가 열 시간 넘게 달려가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외로운 섬이라고 하겠는가. <삼시세끼> 어촌편이 두 차례의 시즌으로 펼쳐놓은 만재도의 구석구석들. 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이던 세끼 집과 주인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아 보이는 만재슈퍼, 정상에 오르면 끝없이 펼쳐지던 수평선들, 늦여름에 물장구 치고 놀던 바다, 참바다 유해진이 낚시를 하던 포인트들과 잔뜩 기대하게 만들던 통발 놓던 포인트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곳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가족 같은 사람들. 도시에서 눈 돌려봐야 건물에 막히고 마는 우리의 시야가 잊고 있던 그 자연의 구석구석을 <삼시세끼>는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그 곳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니 더욱 좋을 수밖에. <삼시세끼>의 진정한 힘은 바로 이 보고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점에서 나온다. 투덜대고 어딘지 결벽증이 있어 보이지만 만드는 음식 속에 그 사람의 정이 듬뿍 느껴지는 차중마 차승원, 물고기를 잡지 못한 날이면 한껏 의기소침해지고 그러다 물고기를 잡은 날은 한껏 허세를 부리는 인간미가 느껴지는 참바다 유해진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마치 자식처럼 동생처럼 끈끈함을 만들어내는 기분 좋은 막내 손호준.

 

그 곳을 찾은 박형식, 이진욱, 윤계상은 손님이라기보다는 머슴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것이 어쩌면 그들을 더욱 기분 좋게 만들었을 것이다. 손님이 아니라 한 가족 같은 느낌을 주었을 테니 말이다. 그들은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진정한 식구의 훈훈함을 보여주었다.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만재도의 자연과 사람과 음식은 그렇게 우리가 잊고 살아가던 것들의 가치를 되새겨 주었다.

 

도시에 다시 모여 결국은 잡지 못한 참돔과 돌돔을 먹으며 차승원, 유해진, 손호준이 나누는 대화 속에는 만재도에 대한 그리움이 벌써부터 묻어나 있었다. 유해진은 언제고 힘들어질 때 혼자라도 만재도를 꼭 찾아갈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다시 제각각 돌아간 일터에서 또다시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살아갈 것이지만 그럴 때마다 그들은 만재도에서의 그 여유롭던 한 끼와 바다를 내려다보며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던 한 때와 산체 벌이와 함께 뒹굴던 시간들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네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그 곳을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삼시세끼>를 통해 그 곳의 기억을 공유하게 된 우리들도 간혹 만재도가 그리워지는 날이 올 지도. 그럴 때면 우리도 잠시 이 곳을 떠나 저 곳으로의 일탈을 꿈꿔보는 건 어떨지. 그 곳에 가면 어쩌면 우리가 바쁘게 살아가며 잊고 있던 것들을 되찾을 수도. 차승원과 유해진과 손호준이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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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의 한 끼가 그저 재미에 머물지 않는 까닭

 

<삼시세끼>의 오프닝은 여지없이 세끼 하우스에 푸릇푸릇 올라오는 청보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올봄 그 텅 빈 밭을 갈아 업고 뿌려놓은 청보리는 이제 훌쩍 자라서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며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설레게 만든다. 꽃을 열심히 기어오르는 개미 한 마리를 따라가면서 카메라는 묻는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르고 있냐고. 카메라가 다시 답한다. 그것은 아마도 삼시세끼때문일 거라고.

 


'삼시세끼(사진출처:tvN)'

지난 가을에서 겨울까지 <삼시세끼>가 좀체 보여주지 못했던 장면들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며 보여지고 있다. 이 장면들은 <삼시세끼>가 진짜 보여주고픈 것들이었을 것이다. <12> 같은 여행 버라이어티들이 결코 잡을 수 없었던 장면들. 그저 지나치는 시선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 자연과 생명이 가진 힘. 시간의 흐름에 담겨진 마법 같은 순간들이다.

 

<삼시세끼>가 그저 시골에 내려가 한 끼의 요리를 해 먹는 그런 예능에 머물지 않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들을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무수한 야외 예능 프로그램의 밥 해먹기와 뭐가 다르겠는가. 하지만 <삼시세끼>는 강원도 정선의 한 집에 오래도록 카메라를 세워두고 그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우리가 지나칠 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 같은 자연의 놀라운 변화를 보여준다.

 

훌쩍 자란 청보리와 불쑥불쑥 자라 올라 풍성한 텃밭을 이루고 있는 이른 봄에 심어 두었던 갖가지 야채와 채소들. 한 때는 이서진 바라기로만 보였던 잭슨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어느 날 불쑥 세끼 하우스로 들어왔던 그 작고 귀여운 밍키가 어느새 훌쩍 자라 새끼들을 낳았다.

 

이런 자연과 환경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도 변화한다. 이서진은 시골 살이의 모든 게 귀찮았던 투덜이 차도남에서 이제는 제법 시골에 정착한 사람마냥 익숙하게 일을 해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귀찮아도 챙겨야할 식구들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가만 놔두면 잡초들이 지배하는 밭도 돌봐야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 대접을 위해 음식도 그럴 듯하게 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 꼬인 줄 때문에 메에- 하고 울어대는 잭슨의 아이들을 살펴야 하고 아기를 가진 밍키를 위해서는 기꺼이 집을 사주고 울타리도 쳐주어야 한다.

 

밍키가 그 누구보다 각별한 옥택연은 입맛을 통 잃어버린 밍키를 위해 닭 가슴살을 삶아 먹여주고, 요리 한 번 해보겠다고 나서는 김하늘 같은 게스트들을 위해 때로는 충실한 주방 보조가 되어주기도 한다. 도시를 벗어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삼시세끼 챙겨먹겠다는 마음으로 세끼 하우스로 들어왔지만 차츰 일은 늘어난다. 그런데 그 일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했던 도시에서의 일과는 사뭇 다르다. 일은 일인데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일이다.

 

아이를 낳은 잭슨과 아기를 가진 밍키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재게 손발을 놀리는 이서진이나 옥택연을 보다보면 우리가 바쁜 도시의 삶을 살면서 잊고 있던 삶의 비밀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어쩌면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그 마음들이 이끄는 것이 아닐까.

 

삼시세끼는 그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을 자라나게 하고 변화하게 하는 힘이다. 잭슨과 밍키를 자라게 한 것도 이서진과 옥택연 그리고 게스트들이 모여 관계를 맺으며 살게 하는 것도 바로 삼시세끼가 부린 마법이 아닌가. 그래서 한 때 삼시세끼를 같이 해먹으며 기분 좋은 기억을 공유했던 최지우가 다시 찾아오면 반가운 일일 게다. 그것은 관계의 성장이고 축적인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사람에게서 시간의 변화를 우리는 잘 감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훌쩍 자란 밍키와 잭슨을 보면서 우리는 시간과 삼시세끼가 빚어내는 그 놀라운 힘들을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보고 있다. 게스트들의 왁자지껄한 한 때나 또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음식들을 맛있게 먹는 장면들은 그래서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저 그런 재밋거리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게 자라난 청보리와 밍키와 잭슨처럼 그들을 성장시킬 소중한 삼시세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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