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의 판타지, 현실 정치의 부재를 채우다

'대물'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은 서민들의 고충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표를 얻는 것, 그래서 권력을 계속 쥐고 있고 차츰 그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물론 이건 드라마 속 얘기다. 현실에는 그래도 서민들의 삶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통령. 온 김에 우리 동네나 한 번 들려주지. 당췌 모기 땜에 살 수가 있어야지. 지옥이 따로 없어." 매립지에 생긴 웅덩이 때문에 모기떼들이 마을을 덮쳐 사람이건 동물이건 살기 힘들어하지만, 정치인들의 관심은 보궐선거에 가 있다. 검사들은 현장에는 나가보지도 않고 모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주민들의 집단 폭력으로 몰아 부친다.

"그럼. 이 사람들 대신 나 구속해. 야.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냐? 이분들 데모한 거 김태복 때문이 아니라 모기떼 때문에 데모했다잖아. 검사란 게 현장 한 번 안가보고 사무실에 앉아서 뭐? 구속? 구속이 그렇게 쉬워?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죽어나가는 판에 무조건 법 지키라고? 지키다가 죽으라고? 세상에 그딴 법이 어딨어?"

서혜림(고현정)의 이 말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이것이 판타지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작금의 대중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물'이라는 드라마가 그토록 파괴력 있게 쭉쭉 뻗어나가는 이유가 된다.

'대물'은 바로 이 현실에서 우리가 종종 발견하는 사건들을 드라마라는 공간으로 가져와 한바탕 속 시원히 풀어내는 드라마다. 따라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드라마의 이야기는 당연한 것이다. 이 드라마는 현실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그리기 때문이다.

정치인 혹은 검사 같은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이들이, 차 안에서, 공연장에서, 헬기 위에서, 정당 사무실에서, 갤러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서혜림이 모기떼로 고통 받는 서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충을 듣는 장면은 사뭇 대조적이다.

서혜림이 하도야(권상우) 검사에게 주민들의 입장에서 한 마디 쏘아부칠 때, 정치권에 새 인물을 찾는 강태산(차인표)의 눈빛이 반짝거리고, 그녀에게 "정치할 생각 없냐"고 묻는 장면이 전혀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미 이 대조적인 장면들을 통해 '저런 정치인 하나 있었으면'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네 현실에서 정치라고 하면 으레 그러려니 포기하며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그래서 '대물'이 보여주는 정치의 세계는 하나의 판타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판타지라고 해서 그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치부할 것은 아니다. 바로 이 판타지는 다름 아닌 선거철만 되면 등장했다가 선거가 끝나면 사라지던 것이지만, 때론 정치인들의 최대관심사인 선거의 당락을 좌우하기도 하는 것이 때문이다. 물론 구체적인 현실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드라마가 판타지를 통해 어떤 비전을 제시한다면, 그것으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대물'의 인기가 수직상승하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팍팍하다는 반증이다. 서민들이 바라는 세상과 실제 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물'의 판타지는 액면 그대로 현실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적어도 서민들이 뭘 바라고 있는 지는 분명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비의 '도망자', 고현정의 '대물' 그 강약 비교

첫 방영에 '도망자'와 똑같은 시청률 18%를 기록한 '대물'은 기획이 잘 된 작품이다. 먼저 '여성 대통령'이라는 화제성이 대중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또 그 대통령을 연기하는 배우가 고현정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선덕여왕'의 미실로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그녀의 이미지가 여전히 여운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정치 드라마를 소재로 담고 있지만 그저 현실적인 정치에 머무르지 않고 그 위에 대중들의 바람을 판타지로 엮어놓은 점도 강점이다. 천안함 사태나 아프카니스탄 피랍, 대통령 탄핵 같은 우리 주변에 이미 벌어졌던 사건들을 배치하지만, '대물'은 그것을 현실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즉 대통령을 다루지만, 아직은 현실적으로 바라보기 힘든(물론 현실이 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만) 여성 대통령을 다루는 작품이 '대물'이다.

정치물이면서도 그 주인공으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어 드라마 주시청층인 중장년 여성층을 공략하기에도 수월하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이미 대통령이 된 서혜림(고현정)을 다루는 게 아니라, 아나운서가 되었다가 남편의 죽음을 겪고 정계에 입문해 대통령이 되어가는 여성의 성장드라마를 다룬다는 점에서 여성사극이 보여주던 그 몰입감을 선사한다.

'대물'의 이런 기획적인 강점들을 두고 보면, '도망자'는 상당히 불리해 보인다. 사실 '도망자'의 완성도나 성취도는 결코 낮지 않다. 이른바 '한국형 본격 오락 드라마'의 탄생이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품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미 장르적 성취가 이루어진 것이지만 여전히 드라마에서 본격 오락물은 요원한 것처럼 여겨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도망자'는 이런 매체적 한계를 여지없이 깨고 있다.

'도망자'는 대사로 극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액션)을 통해 스토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타의 드라마들과 다르다. 대사는 주로 코미디를 연출하는 측면이 강하고, 드라마는 시종일관 쫓고 쫓기는 장면들로 그 속에 놓여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누군가에 의해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자신조차 쫓기는 진이(이나영), 그리고 그녀에 의해 고용된 탐정 지우(비), 또 살인자로 오인해 지우를 추격하는 형사 도수(이정진). 이들이 벌이는 추격전은 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재미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를 마치 옆 동네처럼 넘나들고 멀티 더빙된 영화처럼 우리말과 일본어, 중국어, 영어가 마치 일상어처럼 사용되는 이 드라마는 스케일이 그만큼 크고, 이야기 전개 또한 스피디하다. 따라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있으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그 오락적인 영상의 흐름 위에 던져진 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렇게 정신없이 달리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과거 일제시대에 사라진 금괴의 이야기로 한 지점으로 모여질 것으로 보인다. 액션이 보여주기 위한 액션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이 정신없이 달리는 액션이 시청자들에게 낯선 것 역시 사실이다. 대사로 전달되던 이야기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끝없이 질주하는 몸들의 이야기는 너무 빨리 흘러가 오히려 몰입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시청층으로 봐도 중장년 여성들이 빠져들기에는 좀 어려운 스타일이다. 물론 이런 고정관념을 깨뜨리려는 시도가 이 작품의 진짜 묘미이자 가치인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한편 '대물' 역시 강점만 가진 것은 아니다. '대물'은 정치라는 현실적 배경 그림 위에 판타지적인 인물과 스토리를 얹어 놓은 드라마다. 따라서 인물과 스토리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흐르게 되면 작품 자체의 개연성을 깨뜨릴 위험성도 있다. 특히 만화 원작 드라마들이 만화적 스토리에 집착하게 되면 드라마적 현실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초반전. '대물'과 '도망자'는 각각 자신의 확고한 영역을 통해 박빙의 승부를 보여주고 있다. 장단점이 뚜렷한 이 두 드라마는 어떻게 자신의 장점을 더 부각시키고 단점을 극복하느냐에 앞으로 성패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대물'은 진정 대물 드라마가 될 것인가. '도망자'는 계속 앞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인가. 최후의 승자는 과연 누가 될까. 두 드라마의 대결 자체가 흥미롭다.

'베바' 강마에, 문화현실과 맞서다

정치인이 바뀌면 문화도 다른 길을 걷게 된다는 건 우리나라 문화계의 비극이다. 문화적 소양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한 구획을 책임지게 될 정치인에게는 실로 중요한 문제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강마에(김명민)는 문화적 소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 취임한 시장을 불러 자신이 들려주는 음악의 느낌을 다섯 가지 말하라고 한다. 시장은 아름답다, 좋다는 식으로 그것을 단순히 표현한다. 강마에는 거기에 대해 수많은 표현들이 가능한 그 음악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본인의 자유지만, 그걸 모든 시민들에게 강요하지는 말라고 말한다. 문화에 대해 모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자기 식으로 마음대로 재단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그 새 시장은 자신의 취임식을 빛나게 할 목적으로 시향을 불러 자신의 애창곡인 ‘마이 웨이’를 연주하라고 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 군부독재 시절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자기 취향을 위해 문화를 굴종시키려는 것. 거기에 대해 강마에가 한 것은 존 케이지의 ‘4분33초’다. 이 전위음악은 4분33초 동안 침묵함으로써 그 즉흥적인 반응으로 들려지는 소리들을 음악으로 전화시킨 곡이다. 즉 이 4분33초 간의 침묵 속에서의 자신의 반응은 자신 스스로 연주한 음악이 되는 셈. 새 시장은 침묵으로 꺾어지는 자신의 욕망에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음악, 즉 음악적 소양의 조야함을 드러낸다. 여기서 강마에의 선택이 보여주는 것은 문화 그 자체가 어떤 잘못된 정치적 선택에 대한 저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새 시장이 시향의 존폐를 결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한 정치인은 이렇게 말한다. “먹고살기가 힘든데 그깟 시향이 뭔 소용입니까 그 돈으로 길이나 하나 더 내세요.” 경제가 어려운데 문화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그러자 반박이 날아든다. “아무리 어려워도 밥만 먹고삽니까? 향기가 있어야죠.” 그 논박이 오고가는 자리에서 강마에는 귀에 헤드셋을 끼고 클래식을 듣는다. 이 말 저 말 다 듣기 싫다는 무언의 반항인 셈이다. 이 돈을 벌어주는 것도 아니고, 길을 내주는 것도 아닌 음악의 무모성에 대한 시퀀스는 이미 희망을 잃어버린 수재민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만 같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진짜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에피소드에서 이미 나왔던 대목이다. 클래식으로 대변되는 문화는 불황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고상한 취미처럼 여겨져 왔지만, 실상은 그것이 오히려 힘겨움에 빠진 서민들을 위무하고 희망을 주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강마에는 이 가녀리고 우리의 현실과 유리되어 보이는 문화(클래식으로 대변되는)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니 석란시향의 지휘자를 그저 5급 공무원으로 생각하는 새 시장과 맞설 수밖에. 이러한 인식은 강마에가 이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를 끝까지 마음 한 구석에 세워두고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들은 이 어려운 경기와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꿈을 잃지 않는 존재이며, 그래서 실제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 밤잠도 설쳐가며 연습을 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경제를 내세워 문화나 생태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식의 경제 강박증을 가진 정치인들보다 훨씬 건전하고 건설적이다. 이들은 백도 없고 학벌도 별로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특히 클래식이라는 세계에서 보면 애송이들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 애송이들은 클래식 즉, 문화의 힘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 꿈은 우리네 서민들의 꿈과 맞닿아 있다. 전문가 입네 하면서 꿈은 이미 버린 지 오래인 그들과는 대립되는. 강마에가 그들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하고 또 지켜주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그 꿈이다. 그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강마에는 저 스스로도 그러했듯 때로는 냉혹한 현실이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재능도 있고 열정도 넘치며 근성도 있는 강건우(장근석)를 현실 앞에 몰아세우면서도 “독해져라”하고 조언을 해준다. 또 클래식계에 아무런 프로필도 없는 강건우가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못나서”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를 껴안아주며 “아니야. 넌 훌륭해. 대단해.”하고 말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강건우에게 하는 강마에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울림은 고스란히 어려운 시기를 마치 단원들이나 강건우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달된다. 강마에가 껴안은 건 강건우뿐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닮았지만 닮아서는 안 되는 것, 개그와 정치

개그와 정치는 냉소적으로 보면 닮았다. 이른바 “웃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그 프로그램에서 종종 정치는 훌륭한 풍자개그의 소재로 사용된다. 그래서일까. 허경영 총재의 연이은 대선 출마는 투표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에 한 바탕의 웃음으로 기억된다. 황당한 공약과 주장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 자체가 기존 정치에 신물이 난 사람들에게는 정치풍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투표를 하는 세대와 미디어 환경이 달라지면서 허경영 총재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는 점이다. 허경영 총재의 정치적인 이야기는 분명 황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그적인 재미를 갖추면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분명 달라야 하는 정치와 개그가 같은 맥락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도대체 허경영 신드롬이 왜 지금 일고 있느냐고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 신드롬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재미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개그맨 뺨치는 인기를 통해 놀라울 것도 없는 행보지만, 정치인으로서 등장한 허경영 총재가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은 따라서 이미지의 혼동을 주게 된다. 그것이 늘 개그 같은 공약을 세워왔던 정치인으로서의 허경영 총재인지, 아니면 개그 프로그램에 나왔으니 어쨌든 재미를 주기 위해 개그를 하는 허경영 총재인지 불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이미지는 결국 둘 다 허경영 총재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웃고 넘기겠지만.

정치인이 시사 대담 프로그램이나 뉴스가 아닌 개그 프로그램, 혹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으로 공공연히 자신의 인기도를 얘기할 때, 그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인기도일까, 연예인으로서의 인기도일까. 문제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만들어진 이미지의 힘이 자칫 정치적 권력과 맞닿으면서 생겨나는 부작용이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이제 더 이상 예능 프로그램이 아닌 시사고발 프로그램에 등장하게 될 판인데, MBC ‘PD수첩’에서 방영한 ‘허경영 신드롬의 함정’으로 우리는 실제 그 상황까지 목도하게 됐다.

놀라운 치유능력이 있어 ‘눈빛 하나로 환자를 고친다’는 허경영 총재가 정작 자신은 콧물 감기에 걸려 약을 사 먹는 장면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하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 이외에 사업적 목적으로 운영 되서는 안 되는 정당의 사업에 당당한 모습과, 비례대표제 공천을 미끼로 노골적인 액수를 들먹이며 국회의원 뺏지를 운운하는 건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중대한 사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PD수첩’에서 허경영 총재가 자신의 인기도를 말하면서 언급한 시청률이다. “자신이 나가면 시청률이 두 배로 오를 정도”라는 것. 결과적으로 따지면 KBS ‘폭소클럽’이나 ‘연예가 중계’ 그리고 각종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분별하게 경쟁적으로 허경영 총재를 출연시킨 것은 바로 그 시청률이란 괴물 때문이었다. 하지만 되묻고 싶은 것은 아무리 재미있다손 치더라도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또한 정치적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던 것일까. 혹 모른 게 아니라 그저 재미있으면 끝이라는 스스로 자신들 프로그램의 영향력에 대한 비하적인 관점을 가진 채 무시했던 것은 아닐까.

허경영 신드롬은 우리네 정치가와 연예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그만큼 정치가 그동안 참 재미가 없었다는 반증이며, 게다가 일부 정치인들의 개그맨 뺨치는 행보에 대한 냉소적 시선들은 정치인의 위상을 개그맨과 거의 같은 위치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연예가의 시청률 지상주의가 때론 재미만 있으면 다 된다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정치와 개그는 정말 닮아 보이지만, 실로 이 둘은 닮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허경영 신드롬은 바로 이 두 지점이 만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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