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사극에서 당대의 현실과 정치가 투영되는 건, 대중들의 요구다. 대중들은 사극을 통해 현실에 부재한 정치적 비전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사극이 가진 역사의 재해석은 그래서 마치 '온고지신'처럼 현재의 정치를 일갈하기도 한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요원)이 삼한통일에 앞서 그토록 찾으려 했던 '시대정신', '추노'가 보여줬던 역사의 한 줄 아래 수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의미했던 것, '공주의 남자'가 그려낸 혁명을 위해 역사와 대적하는 상상력의 힘 등은 그것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마음 한 구석을 자극한다. '추노'의 천성일 작가가 밝힌, "어떤 시대를 쓰는지 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은 사극이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올해 최고의 사극이라 지칭되는 '뿌리 깊은 나무'가 그려내는 현재의 모습은 뭘까.

‘뿌리 깊은 나무’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한글’과 ‘세종’의 이야기를 다뤘다. 교과서 속에서 시험문제에나 나올 법한 박제화된 세종의 한글창제에 관한 일화들이 21세기인 현재의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몇 백 년의 간극을 이어주는 키워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뿌리 깊은 나무'의 전제로서 소통하지 않는 왕, 태종 이방원(백윤식)이 먼저 등장한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방원은 어린 세종 이도(송중기)가 마방진 앞에서 모든 숫자들(백성을 의미하는)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꿀 때, 중앙에 왕을 상징하는 숫자 하나(왕을 의미)를 남겨두고 주변을 모조리 치워버리는 '칼의 통치'를 말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이방원의 무력 앞에 부들부들 떠는 이도는 그 칼날에 죽어나간 사람들을 마음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간직한 채, 자신이 꿈꾸는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칼의 힘이 아니라 글의 힘이다. 그래서 '한글'은 지식의 독점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잡고, 막혀진 소통체계를 열어주는 강력한 세종(한석규)의 무기가 된다.

여기서 전제되는 건 '소통의 정치'를 꿈꾸는 자로서의 세종이라는 특별한 왕이다. 소통은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라 왕의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완벽한 왕으로서의 세종이 아니라, 외로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때로는 자신의 울분과 분노를 표출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왕을 그린다. 모두가 왕의 책임을 묻는 상황의 힘겨움을 세종은 이렇게 토로한다. "이 조선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다." 이 아픈 고백은 물론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외로운 심사를 담은 것이지만 현재의 정치에 시사하는 바도 클 것이다.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현재의 정치 행태를 접하고 있는 대중들로서는 세종의 이런 인간적인 토로는 차라리 감동으로 다가온다.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 세력은 그래서 고스란히 현재의 정치가 그려내는 소통에 대한 태도를 함의한다. 소통하려는 자와 불통하려는 자.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는 자와 그것을 막는 자. 적들(?)에게 열린 사회를 지향하려는 세종의 일갈이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식견이 얄팍하다는 이유로,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하극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로, 나라 기강이 문란해진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로 백성들의 입을 막는다면 과인은 대체 백성의 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단 말이오."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재상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기득권(글자를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는)을 지키려는 밀본이란 세력이다. 밀본의 본원인 정기준(윤제문)은 한글이 가진 그 ‘역병’ 같은 힘을 직감하고 겁을 먹는다. 그것은 소통의 체계가 왕과 백성 사이에 놓여진 자신들 같은 신하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상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이제 백성들끼리 소통할 수 있고, 또 백성과 왕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니 이 ‘역병 같은 글자’의 파급력에 정기준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의 대결은 마치 지금 우리 시대가 처해있는 소통에 대한 두 가지 풍경을 그려낸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SNS 같은 새로운 소통체계는 기성 소통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이 대결구도를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것처럼 세종과 정기준의 논리 대결로 풀어낸다. 정기준은 한글을 백성에게 주는 것이 일종의 왕이 해야 될 책임의 방기라고 몰아 부친다. 즉 한글 하나 주고 이제는 백성들끼리 모든 걸 책임지며 살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백성의 저마다의 욕망은 앞으로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 위협한다. 하지만 세종은 그것이 왜 지옥이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소통에 대한 책임에 관한 담론이다. 소통체계에는 책임 또한 따른다는 것. 우리가 흔히 인터넷 소통체계의 명과 암을 말할 때 늘 나오는 그 담론들을 몇 백 년 전 세종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있었던 서울 시장 선거에서 드러난 SNS의 힘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갑자기 들고 나온 'SNS 심의' 발언은, '뿌리 깊은 나무'가 그린 한글 반포와 유포 과정에 대중들을 더욱 열광케 만들었다. 심지어 '밀본이 MB'라는 말까지 회자되는 상황에 이른 것. 정기준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역병 같은 글자’의 유포 과정은 그래서 마치 SNS가 가진 힘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이 바로 소이(신세경)다. 세종이 준비하는, 국가가 기관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파시키는 '반포'보다 더 강력한 것이 직접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파시키는 '유포'가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얘기는 그대로 현재의 SNS시대가 갖고 온 새로운 소통체계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모든 걸 한 번 보고 들으면 기억하는 소이는 사극판 컴퓨터인 셈이고, 그녀가 유포에 사용하는 부적과 노래는 SNS 같은 네트워크인 셈이다.

도대체 이 '역병 같은' 소통의 욕망을 어찌 막을 것인가. 최근 정치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세종을 배우라"는 요구는 그래서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해 새롭게 의미화된 '소통의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을 말해준다. 그러니 정치여! 만일 지금의 대중들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밀본이라는 적조차 붕당으로 인정하고 토론하려 하는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을 되새겨볼 일이다. 이제 막는다고 막아지는 세상은 지났다.
(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빛과 그림자', 이토록 유쾌해도 되는 걸까

'빛과 그림자'(사진출처:MBC)

'빛과 그림자'가 그리는 시대는 우리가 흔히 '어두웠던 시절'이라 부르는 독재시절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어두움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렇게 유쾌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이 특유의 유쾌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빛과 그림자가 대결하던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빛과 그림자의 싸움을 머릿속에 늘 그려왔지만, 사실 빛이 그림자를 내모는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림자는 빛이 더 빛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빛과 그림자'의 유쾌함은 마치 시대의 어둠을 유쾌함으로 이겨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정치의 암울함에 맞서 딴따라라 불렸던 발랄한 쇼가 대결하는 드라마, 바로 '빛과 그림자'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 '빛과 그림자'라는 드라마는 그 통상적이지만 영원한 우리네 삶의 진실을 보여준다. 먼저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성공과 실패, 그 빛과 그림자를 오간다. 강기태(안재욱)는 순양극장을 소유하고 있는 지방유지 강만식(전국환)의 아들로 고민 없이 부유하게 자라지만, 밉보인 장철환(전광렬) 의원에 의해 몰락하게 되는 인물. 장철환의 사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아버지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후,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강기태네 집 식모의 아들인 차수혁(이필모)은 친구인 강기태를 배신하고 장철환 의원을 보좌함으로써 그와 함께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가게 된다. 한편 빛나라쇼단의 단장 신정구(성지루)는 강기태의 돈을 떼먹고 야반도주 하지만 그렇게 1년을 탕자처럼 지내고는 길바닥을 전전하는 삶을 살아간다. 반면 양태성(김희원)은 정혜(남상미)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전형적인 건달이었지만 월남에 가서 무기 밀거래를 하며 벼락부자가 되어 돌아온다. '빛과 그림자'들의 인물들의 인생역정은 이처럼 다이내믹하다. 하루아침에 그림자로 전락했다가도 어느 순간 빛으로 떠오르는 그런 인생.

이것은 그 시대가 가진 빛과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군부 독재 시절로서 이유 없이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시체로 나오던 그 어두운 시대였지만, 또한 성공의 사다리가 지금처럼 꽉 막혀 있지 않고 도처에 있던 시대. 물론 그 성공에는 값비싼 대가가 치러졌지만 향수어린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대란 그림자마저 추억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모두가 멈춰 서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하던 그 잿빛의 암울함은, 신정구과 강기태가 그 정지화면 위에서 도망치고 추격하는 장면이 발랄하게 삽입될 정도의 추억으로 그려진다.

사실 강기태라는 캐릭터 자체가 하나의 향수이자 추억이다. 도무지 이 인물은 절망하거나 비관할 줄 모른다.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인 이 인물은 아버지가 죽고 몰락한 집안에서도 여전히 큰 소리 뻥뻥이다. 그래서 보통의 드라마가 누군가에 의해 몰락한 집안을 다시 세우기 위해 복수를 꿈꾸지만, 이 드라마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강기태라는 캐릭터는 복수보다는 자신의 성공을 더 꿈꾸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는 가장 무거울 수 있는 강기태의 몰락을 그리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하다. 이것은 강기태라는 캐릭터의 힘이면서 지나간 일을 추억어린 눈으로 회고하는 이 시대극의 시선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발랄함의 시선이 유지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드라마가 '쇼'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부음을 듣고도 쇼 무대에 올라 바보 연기를 했다는 과거 코미디언들의 유명한 일화들처럼, 이 시대극의 쇼는 그 무대 뒤편의 그림자들을 덮어줄 만큼 빛으로 가득하다. 당대의 쇼 비즈니스는 안가에 연예인들이 불려가 노래를 불러야 할 정도로 어두운 면이 있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쇼란 그 어둠마저 덮어버리는 화려한 무대가 아니던가. '빛과 그림자'는 그래서 정치와 얽혀진 어두운 시대의 쇼가 보여주는 양면을 보여주면서도, 거기에 어둠마저 시간이 지나면 빛으로 환산시키는 기억이 만들어내는 마법을 집어넣는다.

'빛과 그림자'가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이 추억의 시간여행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유쾌함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한때 딴따라라 불리던 연예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어두운 정치권력, 그리고 뒷골목 건달들의 이야기들이 얽혀 있는 시대극의 무게를 갖고 있으면서도, 결코 발랄함을 잊지 않는다. 당대의 힘겨웠던 삶조차 이렇게 몇 십 년이 흐른 뒤 바라보면 한 바탕의 쇼처럼 아련해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시각은 지금 현재 결코 쉽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 힘겨워도 이것을 이겨내고 나면 이 또한 한 바탕 우리 삶의 즐거운 쇼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 딴따라라 불리던 그들이 이제 우리의 가슴 속에 별로 남은 건 그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유쾌한 쇼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딴따라라 불렸던 쇼가 당대 권력인 정치를 이겨내는 방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힘겨워도 빛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스스로 빛나는 것.


최효종과 '나꼼수'가 보여주는 대중정서

'승승장구'(사진출처:KBS)

최효종은 '승승장구'에 나와 자신의 풍자 개그에 대해 명쾌한 한 마디를 남겼다. "풍자가 기분 나쁘면 진짜로 그런 사람이란 뜻"이란 거다. 즉 '사마귀유치원'에서 국회의원을 풍자한 자신의 개그에 고소로 맞선다는 것이 결국은 본인이 그런 국회의원이란 걸 자인하는 셈이란 얘기다. 이것은 풍자가 가진 힘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다. 풍자는 말해지는 순간, 진영을 나누는 힘이 있다. 웃는 사람과 웃지 못하는 사람. 게다가 이것은 웃음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웃지 못하는 사람마저 웃고 싶은 욕망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최효종의 풍자 개그와 그것에 대해 한 국회의원이 제기한 고소에 대해 개그맨들은 일제히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고 얘기했다. 대중들 역시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빈다.', '개그를 다큐로 받아친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최효종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그가 현재 하고 있는 것은 분명 정치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이것을 '정치적인 의도'로까지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사실 모든 이들의 사회활동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맥락을 갖게 마련이니까. 최효종은 개그맨이고 또 풍자에 관심이 있다. 그러니 현실의 문제들을 웃음의 소재로 끌어올 수밖에 없다. 웃는 사람이 있으면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분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잘못된 건 하나도 없다.

우리가 흔히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고 하는 말에는 은연 중에 개그(확장에서 보면 대중문화)와 정치가 분리된 어떤 것이라고 여기는(혹은 여기게 만드는) 심리적 기제가 들어 있다. 개그가 정치에 억압받던 시절의 트라우마다. 정치가 개그를 저질 판정 내리면서 스스로는 고급한 어떤 것(실제로 고급했는지는 모르겠지만)으로 구분지으려 했을 때의 이야기다. 고 이주일씨가 정계를 떠나며 "코미디 한 수 잘 배우고 갑니다"라고 말한 일화처럼, 사실 정치나 개그나 질적인 차이는 별로 없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러니 정치를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여길 필요는 없다. 개그도 정치를 함의할 수 있다.

김어준의 '나는 꼼수다'가 대중들의 엄청난 지지를 얻은 것은 이 풍자가 가진 진영 나누기의 효과로 볼 수도 있다. 즉 지금껏 정치라고 하면 진보니 보수니 하는 해묵은 논쟁과, 법안 통과를 위해 국회에서 드잡이를 하는 풍경을 신물 나도록 봐온 대중들에게 김어준이 들이댄 것은 이런 소위 '정치적인 행위'라고 붙여지는 것과 정반대되는 일련의 행위들이다. 그간 비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져 온 '사적인 이야기', '근거 없는 농담', '상황극', '조롱' 같은 행위들은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진지한 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뭔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기성 정치 앞에서 이런 지극히 가볍고 맥락도 없고 어디로 튈 지 전혀 알 수 없는 한 편의 개그 같은 이야기들은 확실히 진영을 구분해 버렸다. 정치인 양 얘기하면서 사실은 권력을 탐미하는 기성 정치의 비정치성. 전혀 정치 같지 않은 '잡놈'들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대중들의 정서를 정확히 파악해 그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나는 꼼수다'의 정치성. 아니 이것은 어쩌면 대중들이 원하고 생각하는 새로운 정치인 지도 모른다. 대중은 어딘지 현실과 멀리 떨어진 저 기성 정치인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그 보다는 좀 더 가까이 있는 우리 일상에 정치가 깃들길 원한다.

과거와는 달리 대중문화가 이제 정치의 중심부로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대중정서가 가진 힘이 실제로 정치적인 힘이 되는 미디어 환경에 우리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효종은 사실 '애정남'에서부터 이런 대중문화가 가진 정치적인 힘을 부지불식 간에 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일상의 '애매한 것을 정해준다'는 그 행위는 대중들과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지키지 않는다고 쇠고랑차지는' 않지만 '우리들만의 아름다운 약속'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법의 범주와 일상의 범주는 자연스럽게 대결하게 되고, 거기서 그 공감대를 공유하는 '우리'라는 연대가 생겨난다. 그 공감대가 대중문화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서울 시장 선거를 통해 급부상한 세대가 2040이다. 이 세대들의 특징은 어쩌면 이러한 대중문화와 대중정서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 지도 모른다. 태생적으로 사회의 길이 결정되고 그 흐름이 동맥경화가 되어버린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 세대들은 문화를 통해 그 답답한 속내를 풀어내고, 같은 처지를 가진 그들끼리의 네트워크를 갖게 됐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정치와 대중문화가 동떨어진 어떤 것이라 여기지 말자. 그리고 최효종이 말한 것처럼 '풍자가 기분 나쁘다'는 것은 어딘지 대중정서와 멀어지고 있는 자신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제 '웃지 못하면 지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정치의 세상이 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뿌리', 장르의 종합선물상자된 이유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의 첫 시작은 액션 스릴러였다. 궁에 겸사복으로 들어온 채윤(장혁)이 세종(한석규)을 살해하기 위해 상상으로 재구성하는 액션 신은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액션은 채윤의 어린 시절인 똘복(채상우)과 세종의 젊은 시절인 이도(송중기)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정치드라마라는 장르로 옮겨간다. 세종과 태종 이방원(백윤식) 그리고 정도전 일파의 정치 대결구도가 그것이다.

이 정치 대결의 이야기는 그러나 정치드라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휼(조진웅)과 조말생(이재용)의 대결구도로 넘어가면서 액션 장르와 뒤섞인다. 태종이 밀본(정도전에 의해 만들어진 비밀결사)을 찾아내는 과정은 정치적인 해석과 지적인 추리가 절묘하게 얽혀있는 시퀀스였다. 그리고 이제 이 사극은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채윤의 이야기를 통해 '별순검'이 일찍이 가져왔던 조선판 CSI식의 추리를 본격화하고 있다.

물론 그 중간 중간에 건익사공(작은 대롱에 한 줌 물로 사람을 일사시키는 기술)이나 출상술(일종의 경공법)같은 무협적인 요소까지 가미시키고, 왕이 쌍소리를 하고 똥지게를 지며 개소리(?)를 연구하는 식의 코믹적인 요소도 빼놓지 않는다. 이 정도면 사극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들을 소화하고 있는 셈이다. 장르 사극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까.

사극이 퓨전화되고 장르화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사극은 다른 사극에 그만큼 밀접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역사 바깥으로 나온 사극이라는 공간이 장르화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뿌리 깊은 나무'는 여러 기존 사극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반촌의 이야기에서는 '제중원'이나 '성균관 스캔들'이 엿보이고, 추리적인 요소는 '별순검'이, 액션적인 요소는 '추노'가, 정치적인 요소는 기존 정치사극들이 떠오른다. 실제로 송중기와 장혁의 조합은 그들이 출연했던 작품들을 연상케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조합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나무'는 어떻게 기존 사극들 그 이상의 장르적 재미를 보여주고 있는 걸까. 아마도 이것은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장태유PD의 연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출적인 측면만 빼놓고 보면 이 사극은 우리네 사극들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장르 운용에 묘가 있는) 미드가 가진 장르적 전통을 더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궁 안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건들은 '24'같은 미드의 긴박감을 연상시키고, 채윤이 북방에서 벌이는 전투 신들은 '글래디에이터'처럼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불필요한 스펙타클의 비효율을 넘어선다.

무엇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성취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다양한 선대의 사극들이 해놓은 성과와 다채로운 장르들이 결합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는 점일 것이다. 정치적인 이야기와 액션 그리고 추리가 각각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사극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사극만큼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실험이 가능한 공간은 없다. 사극은 역사는 물론이고, 역사 바깥의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가능성이 열려진 공간이다. 옛이야기가 가진 힘은 현대극의 장르들이 실험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넘어서게 해준다. 그러니 정통사극에서 퓨전사극을 거쳐 장르사극까지 넘어온 마당에 사극이 실험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다고 한탄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껏 거쳐 온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하고 변용하는 것만으로도 사극의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창출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지금 그 사극의 무한한 가능성을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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