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무신>이어야 했을까

 

이제 종영이 임박한 MBC 주말사극 <무신>은 애초 ‘대장경 천년 특별기획’이라는 기치로 제작되었다. 실제로 이 사극의 초반부에는 대장경을 염두에 둔 에피소드들이 매회 등장했다. 조금은 뜬금없어 보였지만, 대장경의 의미를 하나 하나 설명하는 장면들이 사족처럼 들어 있었다. 물론 이 사극의 주인공인 김준(김주혁)이 자라난 곳이 다름 아닌 절이고, 그 역시 최씨 가문의 노예로 끌려오기 전에는 스님이었다.

 

'무신'(사진출처:MBC)

하지만 <무신>은 김준이 노예 신분을 벗고 점점 고려 무신정권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대장경 에피소드하고는 멀어졌다. 드라마의 전체 흐름으로 보면 대장경 에피소드는 마치 명분을 위해 들어간 장면처럼 보인다. 실제 <무신>이 다루려고 하는 것은 고려말 무인들이 정권을 휘둘렀던 이른바 ‘무신정권’ 약 100년 간의 통치기간이다. 왕이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은 군부에 있었던 시기. 그 시기에 김준이라는 노예에서 시작해 최고 권력자가 되는 인물을 조명한 것이 <무신>의 실체다.

 

그런데 왜 지금 군사통치를 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를 다뤄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것은 그간 사극이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가져왔다는 점 때문이다. 96년부터 98년까지 방영되었던 KBS 사극 <용의 눈물>은 97년 대선에 영향을 줄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며 형제들마저 내쳤던 태종 이방원의 이야기는 당시 IMF 시절 대권후보들이 차용하고 싶은 이미지 그대로였다. 실제로 이방원(유동근)이 탄 말 앞다리에 'DJ'라는 글자가 새겨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0년 총선 때 KBS 사극 <태조 왕건>, 2007년 대선 때 MBC 사극 <주몽>과 <이산>인 인기를 끈 것도 사극에서 정치적인 리더십을 찾으려는 대중들의 욕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거철에 방영된 것은 아니지만 <선덕여왕>이나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사극들은 모두 현실 정치의 염원이 묻어나는 작품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무신>은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냈을까.

 

<무신>은 대몽항쟁을 다루면서 무신들과 문신들을 극명한 대비로 그려 넣었다. 현재 몽고의 쿠빌라이칸에게 무릎을 꿇은 문신들을 대표하는 원종과 이를 극렬히 반대하는 김준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당시 외교에 있어서 누가 옳았는가 하는 점은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다. 또 외세에 자주를 내세운 당대 무신들의 기상은 물론 높이 살만한 일이다. 하지만 왜 이 이야기가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사극에서 다뤄지고 있는가 하는 점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군사정권이니 군사통치니 하는 용어에서 먼저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는 실제로 <무신>이 다루고 있는 군사통치처럼,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출범하고 5월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꾼 뒤 1963년 12월16일까지 이를 통한 실질적인 통치를 했던 적이 있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실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신>의 역사적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물론 <무신>이 박정희를 그대로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작품이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사극이 그려내는 정치적 뉘앙스는 분명 존재한다. 외세에 대적하는 자주 국방이니, 강력한 중앙집권 같은 이 사극이 모토로 보여주는 정치의 세계는 자칫 대선의 특정 정당에 편향된 느낌을 줄 수 있다. 왜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무신>같은 소재를 다뤄야 했을까. 그것은 진정 대장경 천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정말?

'무도',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세상

 

우리 시대에 말이 가진 신뢰는 얼마나 될까. 아마도 현저히 떨어질 게다. 이유는? 정치인들 때문이다. 선거 때만 되면 무수히 쏟아지는 공약들, 호명되는 서민들, 뭐든 해주겠다는 그 아라비안나이트의 램프 요정 같은 얘기들... 하지만 선거철이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입을 싹 닦거나 아예 공약을 뒤집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니 말의 공신력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무한도전>의 ‘말하는 대로’ 특집을 보면서 새삼 말의 신뢰를 떠올리는 건 그래서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사실 <무한도전>의 ‘말하는 대로’ 특집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참 게임에 몰두하면서 벌칙으로 무리수에 가까운 공약을 내걸고는 결과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벌칙을 수행하던 ‘지못미’ 특집도 알맹이를 보면 이 특집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박명수와 정준하가 다크나이트 조커와 쿵푸팬더로 분장한 채 길거리를 활보하던 그 벌칙 수행은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무한도전>의 세상을 이미 보여준 바 있다.

 

알래스카에서 김상덕씨 찾기 미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식객> 편에서 농담식으로 던진 ‘알래스카 김상덕씨’ 얘기가 일이 커지면서 실제 미션이 되어버린 사례다. 그들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알래스카까지 날아가 혹한에서 바늘 찾듯 김상덕씨를 수소문했고 결국 찾아내기도 했다. 작은 말 한 마디가 거대한 사건으로 연결된다는 것 그 자체가 주는 흥미진진함은 <무한도전>만이 가진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는 공약으로 걸린 것은 반드시 이뤄진다.

 

<무한도전> ‘말하는 대로’ 특집은 이러한 공약형 미션(?)의 업그레이드판이다. 이미 말하면 수행하는 것이 하나의 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특집은 가능해진다. 각자 자신의 버스가 일정 노선을 순회하는 가운데, 육하원칙의 빈 공간에 저마다의 미션을 집어넣음으로써 그것을 해당 버스의 멤버가 수행하는 방식. 노홍철이 마지막 조커로 적힌 미션을 자신이 아닌 그걸 쓴 다른 멤버들에게 ‘반사’ 해버린 것처럼, 빈 공간이 채워질 때마다 미션 내용이 뒤집어지는 반전의 묘미까지 선사한다.

 

미션 속에서 박명수는 조커 활용을 잘못 이해해 미션을 적지 않고 그저 조커라고 써서 붙여놓음으로써 큰 웃음을 주었다. 그런데 이것 역시 박명수에게는 하나의 공약 수행으로 처리되었다. 즉 <무한도전>을 재개하면서 그가 내건 “목 놓아 웃겨 드리겠다”는 공약을 자기가 망가짐으로써 수행하게 됐던 것. 이처럼 <무한도전>의 세계는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세우고 있는 셈이다.

 

말의 힘이 사라지면서 생겨나는 신뢰 없는 세상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특히 요즘처럼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 홍수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도대체 무슨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티아라 사태 같은 경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상황에서는 그 어떤 해명도 소통되지 않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무한도전> ‘말하는 대로’ 특집은 재미는 물론이고 큰 의미까지 거둔 전형적인 <무한도전>식의 미션이었다고 여겨진다. 그저 웃고 즐겨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곰곰 씹어보면 더 감칠맛 나는 생각거리가 담겨져 있는 그런 미션. 귀환한 <무한도전>의 진면목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특집이었다고 여겨진다.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세상. 어찌 보면 정치권에서 되새겨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골든타임>의 이성민, 서민들의 희망된 이유

 

세상의 모든 의사가 <골든타임>의 최인혁(이성민) 같다면... 이 의사, 정말 특별하다. 오로지 환자만을 생각한다. 수술금지 조치가 내려져 수술을 하면 징계를 먹을 것을 알면서도 당장 위급한 환자를 위해 메스를 들고, 쫓겨나듯 병원을 나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응급환자를 걱정한다. 사고 현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 중증 부상자를 지나치지 못하고 응급처치를 하고 병원까지 이송해 아무도 손을 대려 하지 않자 본인이 수술을 해서 위기를 넘긴다. 심지어 다른 병원에서 위급한 환자를 도와달라고 하자 앞뒤 재지 않고 달려가 환자를 구한다.

 

'골든타임'(사진출처:MBC)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의 모든 의사가 최인혁 같지는 않다. 최인혁이 구해놓은 환자가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공표되고 언론에 관심을 끌자, 그 때까지 나 몰라라 했던 외과과장은 그것을 자신의 입지를 위해 이용하려고 한다. 환자를 모두에게 평등한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발판으로 보는 것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적극적으로 나서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과에게 책임을 넘기려고 하는 이 의사 같지 않은 의사들이 꽤 많다는 불편한 진실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 응급실의 환자들이 처한 상황은 어쩌면 고스란히 내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의학드라마에서 환자들이란 늘 약자로 존재했다. 따라서 그 약자를 치료해주고 새 생명을 주는 의사라는 존재가 더더욱 부각될 수 있었던 것. 바로 이 풍경은 영웅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힘겨운 약자의 목숨을 살리는 영웅들의 고군분투. 의학드라마 하면 늘 등장하기 마련인 천재 의사들은 그 영웅 신화의 재림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의학드라마에서 환자는 종종 소외되기도 한다. <하얀거탑>의 천재외과의 장준혁(김명민)이 그의 라이벌인 해외파 노민국(차인표)과 환자를 놓고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이렇게 소외되는 환자를 섬뜩하게 그려낸다. 여기서 환자는 그들의 입지와 대결을 위한 하나의 재료가 되어버린다.

 

<골든타임>에서도 환자가 처한 입장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온몸에 중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온 위급한 환자 앞에서 각과의 의사들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서로 수술을 미루다가 결국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장면은, 병 때문이 아니라 의사들의 책임회피로 환자가 죽을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끄집어낸다. 또 그것은 돈과 권력의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즉 VIP 환자가 들어오면 그 실적을 보이기 위해 서로 수술을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그렇다. 이 씁쓸한 현실 속에서 의사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그저 권력자일 뿐이다.

 

<골든타임>의 최인혁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은 그가 여타의 의학드라마에서 등장했던 천재적인 의사라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의 환자를 살리겠다는 그 의지는 병원이라는 권력 시스템과 체계를 뛰어넘는다. 도대체 그런 시스템이 한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할 수 있단 말인가. <골든타임>은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다.

 

이것은 나아가 우리 사회의 이야기가 된다. 즉 뜻과 소신을 가지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다만 권력에만 줄을 대는 이들에 의해 쫓겨나는 그 풍경은 이 사회가 가진 불공정함을 그려낸다. 돈과 권력이 아니라 진짜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 최인혁은 그래서 썩어버린 세상에 유일한 희망처럼 보인다. 이것은 <골든타임>이 의학드라마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안에 상당히 정치적인 함의를 포함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최인혁은 열심히 살지만 힘겨운 서민들이 기다리는 구세주처럼 보인다.

 

<골든타임>이 여타의 의학드라마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의사를 단순히 영웅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에서 의사들은 실수투성이다. 초짜 인턴 이민우(이선균)는 계속해서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이렇게 실수투성이의 이민우가 그저 민폐로만 보이지 않고 어떤 희망으로 보이는 이유는 결국 환자가 죽고 사는 것이 의사로서의 기술보다는 그 의사의 환자를 보는 마음이라는 것이 이 캐릭터를 통해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민우는 아직까지 기술적으로 무능하지만, 마음만은 이 병원의 과장들보다 훨씬 의사답다.

 

최인혁은 바로 이런 실수투성이지만 의사로서 생명의 고귀함을 포기하지 않는 순수함을 지닌 이민우 같은 존재에게 하나의 멘토가 된다. 세중병원이라는 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부조리한 공간에서 최인혁 같은 의사가 서 있고 그를 바라보는 이민우 같은 이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최인혁에 대한 열광은 그를 연기하는 이성민에 대한 열광으로도 이어진다. 어찌 보면 이성민이라는 배우 역시 드라마나 영화 판에서 해왔던 필모그라피에 비해 훨씬 평가절하되어 있었던 인물이 아닌가. 겉으로만 화려한 주역들의 뒤에서 묵묵히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해 온 이성민은 그래서 최인혁이라는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세상에 이런 인물들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추적자>, <부러진 화살>에 <도가니>를 더한 듯

 

마치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를 합쳐놓은 듯한 공분이다. 수차례 자동차로 깔아뭉개져 살해당한 수정(이해인)의 범인 PK준(이용우)의 재판에서 수정은 오히려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했다는 오명이 덧붙여졌고, PK준은 단지 사고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거짓 발언으로 양식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PK준을 추종하는 팬들은 그의 진술에 눈물까지 흘렸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수정은 악플로 두 번 죽음을 당했다.

 

 

'추적자'(사진출처:SBS)

수정을 위해 뭐든 돕겠다던 학교는 아마도 상부로부터의 압력을 받은 듯, 수정의 탄원서를 거부했다. 수정의 엄마 송미연(김도연) 앞에서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교사에게 뒤편에 선 교장이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은 저 <도가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법정에서 진실이 유린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이 기막힌 장면은 저 <부러진 화살>을 떠올리게 했다.

 

인권은 사라지고 권력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세상에서 힘없는 억울한 서민들을 바라보는 건 힘겨운 일이다. 자신이 대선에 나가기 위해 이 사건을 덮으려는 인면수심의 강동윤 의원(김상중)이 마치 세상을 구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노숙자들 앞에 나서는 모습이나, 복직 투쟁을 위한 촛불 시위를 하는 자리에 나서 "권력이 생기면 단 한 줄의 법 조항만 바뀌면 모두 복직할 수 있다"며 기부쇼를 통해 후원금을 모으는 모습은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한다.

 

"저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라는 그 말에 속아 심지어 피해자의 아버지인 백홍석(손현주)마저 믿고 싶어지는 현실이라니. 인면수심의 가해자들에 의해 딸을 저세상으로 보낸 그들은 이제 그 가해자들을 보호하려는 권력자들로 인해 두 번째 가해를 당하는 중이다. 눈앞에서 자신의 딸을 죽인 PK준이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까.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만 눈앞에 죽은 딸이 보이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떻고.

 

자신의 출마가 서민들을 위함이라고 강변하는 자들은 사실 권력욕에만 미쳐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서민들은 너무나 각박하고 힘겨운 현실에 그만 그들의 달콤한 거짓말을 믿고 싶어진다. "대한민국 정치는 국민들에게 거짓말만 해왔습니다. 저 강동윤이는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정치인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지 않다. 진심을 알아달라고 딸의 일기장을 잔뜩 가져와 법관에게 읽어달라고 간청하는 엄마의 모습이나 죽은 딸의 억울함을 벗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아버지의 결연한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은 그 아버지가 무릎이 꿇고 도움을 청한 그 의원이 사실은 가해자라는 사실이다.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이 만든 신드롬은 한편으론 씁쓸한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추적자>는 그 현실을 낱낱이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거기에는 대선 때만 반짝 서민의 일꾼이 되는 정치인들이 있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눈앞의 진실을 호도하는 법조인들이 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우리들의 자화상도 들어 있다.

 

<추적자>는 결국 사회가 보호하지 못하는 인권을 지키기 위해 한 아버지의 부성애가 거대권력과 대결하는 드라마다. 사망신고서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라고 쓰며 애써 법을 믿었던 한 아버지가 진실이 유린되는 현실을 보고 분노하고 스스로 주먹을 들게 되는 것. 아마도 여기에 공감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학교가 외면한 탄원서를 아이들이 모아 법정에 보내지만 바로 기각되는 현실, 가해자가 본인도 괴로워하는 피해자로 둔갑하는 법정,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군가를 지지해보지만 그가 사실은 이 힘겨운 상황을 만든 주범이라는 안타까운 현실...

 

"내가 우리 수정이가 어떤 딸인지 어떤 아인지 이 세상 사람들 다 알도록 내가 할게." 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 때문에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쓰러져 있는 아내에게 이렇게 다짐하는 아버지 백홍석은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가난한 아버지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드라마의 내용이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드는 <추적자>. 그래서 이 드라마만의 강력한 힘이 만들어지는 곳은 드라마 속보다는 오히려 현실이다. 답답하고 억울한 현실이 <추적자>라는 드라마에 더 집중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이 드라마를 그저 드라마로 보기 어렵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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