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라디오로 한 판 붙은 말더듬이 왕, '킹스 스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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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스피치'

말더듬이가 연설을 했다. 만일 이런 스토리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더듬이가 한 국가의 왕이라면? 흥미를 느낄만하지만 그다지 확 끌만한 매력적인 스토리라고 말하기는 그렇다. 하지만 그 말더듬이 왕이 전쟁을 맞아 라디오로 대국민 연설을 해야 한다면? 이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없을 듯하다. 말이 가진 힘이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증폭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히틀러를 다룬 저술들이 말해주듯이 라디오는 나치즘을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매체다. 만일 라디오가 없었다면 히틀러의 나치즘도 없었을 것이라 말해질 정도로. 라디오는 전형적인 일방향적인 매체다. 한쪽에서만 말을 한다. 그것은 당연히 듣는 다수를 상정한다. 한쪽이 입이면 다른 한쪽은 무수히 많은 귀가 있다. 선전도구로서 히틀러가 이만한 도구가 없다고 여긴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게다가 라디오가 사용하는 청각이라는 감각은 시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본다는 행위는 능동적인 주의집중을 더 필요로 하지만, 듣는다는 건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그 메시지가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말이 가진 청각적인 특징은 종교적인 힘으로까지 발휘되기도 한다. '성서'에 그토록 많은 메시지들을 우리는 '말씀'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킹스 스피치'는 바로 이 라디오라는 매체가 말을 만나던 그 시대에 벌어지는 정치적인 변화의 상황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앨버트 왕자를 차기 왕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말더듬이 때문에 고민에 빠진 영국의 왕 조지 5세는 그에게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제 왕들은 국민들을 이끌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것보다 라디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고. 앨버트 왕자의 말더듬이를 고치는 인물이 학위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연기자인 로그(제프리 러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왕이 연기를 해야 하는 시대. 미디어 정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조지 6세가 된 앨버트 왕자가 히틀러의 대중을 휘어잡는 연설을 보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말은 청산유수네"라고 하는 말은 그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이제 앨버트가 인정하면서 거기에 맞서 말로서 승부해야 될 시점이 다가온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라디오라는 매체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또한 앨버트가 말더듬이가 된 내적인 문제들, 즉 왕실의 억압을 벗어나는 그 성장의 과정을 담아냄으로서 스토리에 힘을 부여한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하는 그 내면을 평민인 로그에게 차츰 열어가는 그 치유의 과정은 두 사람이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지 6세가 말더듬이를 극복하고 연설을 하는 그 장면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그 개인적인 성장이나 극복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여기에는 히틀러로 대변되는 라디오 독재에 맞서는 자가 다름 아닌 말더듬이 왕이라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연설문 내용은 통상적인 것일 수 있겠지만, 영화는 그 연설문의 한 줄 한 줄을 읽어가는 과정을 마치 말더듬이 왕이 벌이는 힘겨운 전투의 한 장면처럼 그려놓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지 6세 앞에 서 있는 로그라는 평민의 존재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힘은 그 후에도 루즈벨트에 의해 활용된 적이 있었고,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전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굳이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라디오라는 매체의 속성 자체(일방향적, 청각적)가 가진 운명이다. '킹스 스피치'에서 히틀러와 다르게 조지 6세의 라디오 활용이 그려진 것은 거기 로그가 앞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로그는 조지 6세가 연설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저를 보고 얘기하는 것처럼" 얘기하라고. 즉 친구로 상정되는 듣는 대상이 서 있었기 때문에 같은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조지 6세는 진심을 담아 연설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영화는 낭만적이다. 로그와 조지 6세는 그 후로도 친구처럼 나머지 생을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라디오 권력자들이 조지 6세처럼 로그 같은 친구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물론 매체는 또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이른바 미디어 정치 시대는 활짝 열렸다. 이미 라디오의 그 일방향적 속성은 인터넷의 쌍방향과 만나고 SNS와 연결되어 어느 쪽으로든 정보가 흘러가는 시대다. 따라서 이 시대에 라디오 같은 미디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면, 이제 말더듬이 같은 외형적 장애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진 건 그 말이 갖는 진심일 것이다. 과연 지금 그 진심은 우리 대중들에게 닿고 있을까.

이 땅에서 정치 드라마는 왜 어려운가

이 땅에 정치 드라마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자이언트'는 극 초반부터 특정 정치인을 찬양하는 드라마로 오인 받았다. 60부작의 대장정에 첫발부터 이러니 그 과정이 순탄했을 리 없다. 하지만 뚝심의 장영철 작가와 유인식 PD는 이 위기를 스토리로 넘었다. 시대극으로서 당대의 사건들을 드라마 속으로 끌어오면서도, 특유의 이야기성으로 극중 인물들이 현실의 어떤 인물과 비교되는 것을 막았다. 즉 정치를 다루긴 했지만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드라마 특유의 허구성으로 넘어서려 했다는 점이다.

'대물' 역시 그 시작은 '자이언트'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대통령 탄핵, 잠수함 침몰, 피랍사건 등 작금의 정치 현실을 초반부터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여 그 현실성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 현실성은 실제 정치권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는 서혜림(고현정)이란 인물과 박근혜씨가 닮았다는 이야기가 친박계에서 흘러나왔고, 결국 '대물'의 인기는 박근혜씨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2007년도 MBC 드라마 '영웅시대'와 이명박 대통령처럼.

여당 측에서는 '대물'이 그려내는 여권의 모습이 너무나 부정적이라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서혜림을 위시한 몇몇 인물을 빼고는 조배호(박근형)나 강태산(차인표)은 패거리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고 그 주변인물들은 대부분 앵무새가 거수기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이 드라마 때문에 집권당의 이미지가 나빠질까 걱정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드라마가 다루는 정치가 민감했다는 반증이다.

후반부로 오면서 서혜림의 모습은 박근혜씨보다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닮아갔다. 선거 캠프의 유니폼 색에서부터, 야권 단일화가 파기되면서 오히려 반사이익을 얻는 점, 그리고 대통령 당선 된 직후 바로 탄핵을 받는 점 등이 그렇다. 물론 이런 이미지는 이른바 '회초리론'을 방송 토론에서 얘기할 때 이미 예고된 바 있다.

물론 '대물'은 특정 정치인을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서혜림은 어떤 한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기보다는 여러 정치인들의 이미지들이 겹쳐져 있다. 하지만 '대물'이 다루는 정치에 실제 현실 정치가 보여주는 뜨거운 반응은 드라마에는 부담이 되었을 수밖에 없다. 드라마 초반부터 불거진 작가와 연출자가 모두 교체되는 상황은 물론 드라마에 대한 의견차이 때문이겠지만, 이 드라마가 특히 정치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더 그런 상황을 만든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물'은 본래 하려던 정치 이야기에서 뒤로 진행되면서 상당히 유화되고 정체가 흐릿해진 게 사실이다. 외압은 아니지만 정치에 대한 민감한 반응들이 이런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을 다루는 만큼 '대물'은 '자이언트'처럼 허구를 통해 이 상황을 넘기도 어려웠다.

흥미로운 것은 고현정이 연기했던 '선덕여왕'의 미실과 '대물'의 서혜림 사이의 온도차다. 고현정은 이 두 정치 지도자를 연기했지만 '대물'의 서혜림은 미실만큼 공감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어쩌면 이 땅에서 정치를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의 어려움을 잘 말해주는 것일 게다. 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야 그나마 현실성을 더 확보할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소재다. 언제쯤 정치를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진짜 리얼한 현실로서 다룰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올까. 드라마에서도 정치에서도 이미지가 아닌 진짜를 보게 될 그날은.

'대물'에 대한 정계와 대중들의 온도차, 왜?

정치를 다뤄서일까. '대물'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은 대단히 민감하다. 초반 작가와 연출자가 교체된 것에 정치권의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 물론 그건 하나의 루머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만큼 '대물'이 다루는 정치 소재들을 현실 정치가 예민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대물'의 서혜림(고현정)을 박근혜 전 대표와 비교하기도 한다. 실제로 한나라당 친박계 의원들 사이에서는 서혜림이 박근혜 전 대표와 닮았다며 '대물'의 인기가 박근혜 전 대표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실제로 극 중에 서혜림이 선거 유세 중 테러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다가 의식을 회복하고는 "유세장은요?"하고 말하는 대사는 비슷한 일을 겪었던 박근혜 전 대표를 떠올리게 한다.

'대물'에서 부정부패의 상징처럼 그려지는 집권당 민우당의 이름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을 합쳐놓은 듯 하다는 의견 때문에 민주당측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지나치게 당리당략에만 빠져있는 모습에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집권당의 이미지가 나빠질까 우려된다고 했다.

'대물'의 하도야(권상우) 검사의 돈키호테 같은 행동이 인기를 끌자, 청목회 입법로비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여야 의원 11명에 대해 압수수색을 한 검찰이 '대물' 때문에 그렇게 기가 살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검찰은 선으로 정치권은 악으로 그려지는 '대물'의 대결구도 때문에 검찰의 수사에 대중들은 마치 하검사가 조배호 대표(박근형)를 수사하는 것 같은 통쾌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물' 만큼 정계의 관심을 끄는 프로그램이 '슈퍼스타K2'라는 점이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슈퍼스타K2'에서 최종 우승자가 된 허각씨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키도 작고 출신도 별 볼일 없는 허각씨에게 평범한 국민이 하나 둘씩 관심을 갖고 130만 표까지 모아 줬다"며 "이것이 민주당이 가야 할 길"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또 측근들에게는 “허각씨 같은 사람이 우승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공정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슈퍼스타K2'를 빗대 박근혜 위기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슈퍼스타K2'의 장재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한나라당 친박계 모임인 여의포럼 세미나에서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 이택수가 대표가 최근 진보진형의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말이라며 한 얘기다. 즉 초반에 1위를 달리다가 결국 허각과 존박에게 1,2위를 넘겨주고 3위로 떨어진 장재인처럼 박근혜 전 대표도 차기대선에서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계가 이처럼 '대물'에 민감한 반면, 대중들의 반응은 사뭇 상반된다. '대물'이 그리고 있는 정치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실제로 서혜림이 하는 정치의 모습이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공감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 드라마 제작진들은 다시 이 약화된 서혜림 캐릭터를 다시 공감 있는 캐릭터로 세우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반응이 다를까. 정작 대중들은 '대물'을 보며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데, 왜 정계에서는 이 작품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이며 민감한 반응을 보일까. 대중들이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 대중문화를 보는 식견이 높아서일까.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물'에서 조배호 대표가 실제 민생정치와는 상관없이 이미지 정치를 하는 것처럼, 작금의 정계가 그만큼 이미지 정치에 민감하다는 반증은 아닐까. 제 논에 물 대듯, 뜨고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정계의 반응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대물', 정치 바깥에서 정치를 할 수는 없다

'대물'이 다루는 세계는 정치다. 물론 실제 정치와 정치드라마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현실에서 신물이 나게 봐서 이제는 혐오증까지 생겨버린 그 놈의 현실정치를 그대로 반복해서 보여준다면 그 누가 드라마를 볼 것인가. 따라서 드라마에는 현실정치가 결여한 부분들을 채워줄 필요가 생긴다.

'대물'의 서혜림(고현정)과 하도야(권상우)가 마치 국민들의 대변인인 것처럼, 그간 침묵하고 있던 바람들을 대사를 통해 언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혜림이 유세장에서 "내 아이에게 이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하고 외치고 잘못하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회초리를 들어 달라"거나, 하도야가 검찰청 로비에서 검사윤리강령을 소리 높여 외치는 장면은 그래서 속절없게도 보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실제 현실에서는 그런 돈키호테 같은 대변인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서혜림과 하도야를 정의의 편에 세우고 그 반대편에 조배호(박근형)를 위시한 정치꾼들을 마치 협잡꾼처럼 세워놓자 실제 정치는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기왕에 정치판에 뛰어든 마당에 서혜림이 하는 행동은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서혜림은 정치판에 들어서지도 않았다. 그저 "제가 잘은 모르지만"하면서 여전히 정치 바깥에서 그 너머를 그저 끔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정치가 권력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이 드라마의 순진한 선악구도는 지나치게 판타지로만 보인다. 드라마가 현실일 필요는 없지만 또 너무 현실성을 결여하게 되면 시청자들은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이 서혜림과 하도야라는 얼룩 하나 존재하지 않는 순수 무결점 캐릭터들이다. 정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정의로운 행동이 단지 뜻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고 그 안에 다양한 욕망들이 장치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의 진짜 모습은 이 욕망과 정의와의 팽팽한 긴장감에서 생겨난다. '대물'이 진정 대중들에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존재할 법한 어떤 것을 다뤄 진정성을 보여주려면 이런 개인적 욕망 자체가 거세된 캐릭터로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물'은 지금 현실 어디에선가 봤던 것 같은 민감한 사안들을 끌어들여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그 상황 속에서 서혜림과 하도야는 말 그대로 '공자님 말씀'만 하고 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마치 모든 일이 해결된 듯한 인상을 지우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문제 자체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대물'의 주인공은 어차피 진창인 정치권 싸움에서 진흙 한 점 묻히지 않고 싸우려는 서혜림이나 하도야 보다는, 그래도 그 진창 속에 발을 딛고 있는 강태산(차인표)이 리얼하게 보일 때가 있다.

어떤 좌절된 희망 앞에서 폭발하는 강태산의 분노는 그래서 서혜림과 하도야의 눈물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그 속에는 정치인으로서의 야망과 개인적인 욕망이 현실적으로 얽혀 있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여전히 이상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강태산은 마치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처럼 그 끝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 끝까지 달려보려 한다. 드라마가 굳이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착한 주인공을 내세워 주제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잘못된 길이라도 달리는 주인공을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메시지는 더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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