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하늘이시여’,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 울었다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하늘이시여’,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 울었다

D.H.Jung 2006. 7. 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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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시여>가 보여준 현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SBS 주말 드라마 ‘하늘이시여’가 끝났다. 끊임없는 연장방송, 억지스럽기까지 한 설정, 연속되는 자극적인 장면들, 특정 직업인들에 대한 비하발언 논란, 심지어는 국정홍보 논란까지 드라마가 할 수 있는 모든 논란의 중심에 섰던 ‘하늘이시여’. 하지만 논란과 함께 이 드라마는 30%∼40%를 오가는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시청자들은 욕하면서도 이 드라마 채널을 돌리지 못했다는 얘기다. 무엇이 시청자들을 그렇게 TV 앞에 모이게 만들었을까. 드라마의 완성도나 각종 논란과 욕에 가까운 비판들은 일단 접어두고 ‘하늘이시여’가 우리 사회를 움직였던 그 파괴력의 원천은 도대체 뭐였을까. 그것들은 우리네 현실 속에서 가족 간에 존재하는 병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피끓는 고부간의 환타지 제공
‘하늘이시여’가 가진 가장 큰 파괴력은 우리 사회에서 ‘며느리-시어머니 : 딸-친어머니’관계에 대한 강력한 환타지를 만들었다는데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고부간의 갈등은 과거 ‘며느리의 시집살이’에서 최근에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까지 이어져왔다. ‘하늘이시여’는 바로 이 상황에 주목하고 그 관계를 역전시켰다. 며느리를 딸로 대치하고, 시어머니를 친어머니로 대치하자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시청자들은 자경과 영선이 실제로 모녀관계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관계에 ‘며느리-시어머니’등식을 집어넣어 스스로 환타지를 만들었다. ‘저런 친어머니 같은 시어머니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런 딸 같은 며느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딸을 며느리 삼는다는 설정은 우리 사회가 가진 가장 강력한 환타지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그 무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청자들을 TV앞에 끌어들였다.

우리는 무엇에 눈물 흘린 걸까
‘하늘이시여’ 마지막 회는 눈물의 바다였다. 그런데 그 눈물은 대부분이 참회와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용서를 비는 걸까. 용서를 비는 대상은 바로 자경이다. 드라마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자경에게 용서를 비는 것은 사실은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고통받고 있는 딸을 보다못해 며느리로 삼았다’는 것이 어머니가 용서를 빌어야할 일인가. 그 손주딸(자경)과 함께 살기 위해 그 엄마(영선)를 자기 자식(홍파)과 결혼시킨 것이 용서를 빌어야할 일일까. 그 사실을 숨긴 것이 용서를 빌어야 하는 일일까. 일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자경을 위해 그리 한 일이 아닌가.

실제로 용서를 받아야할 인물은 자경보다는 왕모가 맞다. 왕모는 자경을 며느리로 삼으려한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모는 모든 걸 용서하며 오히려 자경과 영선을 감싸안는다. 왕모는 영선에게 이렇게 말한다. “장모님이란 말은 기대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어머니니까요.” 왕모는 자경에게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나는 고마워. 당신을 낳아주셨고, 나를 길러주셨으니까.” 또 이렇게 말한다. “당신한테 미안해. 당신이 가져야할 행복을 내가 가졌던 것 같아서.” 실제로 용서받아야할 인물이 오히려 자경에게 미안하다고 하자, 실제로 이 모든 용서는 자경이 받아야할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의 어르신들이 줄줄이 자경에게 용서를 비는 모습에 감동을 느낀다. 특히 왕모의 애절하기까지 한 자경에 대한 사랑은 시청자들의 가슴까지 먹먹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은 드라마 속 캐릭터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엮어진 감정이 아니다. 시청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엉뚱하게도 드라마 속이 아닌 드라마 밖이다. 그동안 자신이 받았던 시집살이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어떻게 저런 남편이 저런 사위가 있을까 하는 점이 시청자들을 울게 만든다. 시누이 행세를 했던 슬아가 자경이 자신의 언니임을 깨닫고 과거 자기가 했던 행적을 떠올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장면에서는 통쾌함마저 느낀다. 자경에게 줄줄이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며 우리가 눈물을 흘렸던 것은 드라마에 공감해서라기보다는 우리네 현실을 거기서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비는 걸까
‘하늘이시여’의 미덕은 바로 우리네 현실 속의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겪는 동병상련의 고통과 악연을 포착한 점에 있다. 자신이 똑같은 시집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며느리에게 같은 시집살이를 반복하게 하는 현실을, 드라마는 거꾸로 뒤집어 비현실적이지만 강력한 환타지로 만들었다.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강한 비판의 요소가 되지만, 그것은 또한 그만큼 강한 환타지가 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저런 상상을 했을까’하면서 비현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이다.

드라마는 결국 어머니와 딸이 포옹하는 장면에서 감정이 극에 이른다. 그것은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서로를 껴안는 장면이다. 거기서 나오는 멘트는 ‘너도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자식 낳아봐야 안다’는 그 부분을 이제 서로 공감하게 된 것이다. 드라마 종반의 용서와 눈물의 잔치는 우리 시대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에 대한 작가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억지스런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들에 감동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을 작가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그 용서와 눈물의 잔치의 분명한 이유는, 이 드라마의 무리한 설정으로 인해 자경과 영선이 겪었던 수많은 고통들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녀들에게 감정이입되어 그녀들의 고통을 똑같이 느껴야만 했다. 그 수많은 상처들을 분명하게 풀어주기 위해서는 그녀들에게 상처를 준 모든 이들의 참회가 필요했다. 드라마 속 그들의 참회와 용서는 사실, 그간 작가가 시청자들의 감정에 그어놓은 상처들에 대한 용서가 되기도 할 것이다.

당신은 며느리이자 딸이다
많은 약점과 억지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은 우리네 기형적인 혈연주의의 대한 질타이다. 당신은 여러 가지 호칭을 갖고 있다. 딸로도 불리며 며느리로도 불린다. 어머니로도 불리며 시어머니로도 불린다. 당신은 하나이지만 그 호칭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드라마 속 자경이 며느리에서 딸로, 새언니에서 언니로, 손주 며느리에서 손주딸로 바뀌는 순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깟 호칭이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일까. 지금 당신 옆에 있는 며느리는 사실 당신의 딸이다. 당신 옆에 있는 시어머니는 사실 당신의 어머니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속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하늘이시여 우린 모두 당신의 아들딸들입니다.’ 드라마 속에서처럼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