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주몽, 역사의 갑옷을 벗다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주몽, 역사의 갑옷을 벗다

D.H.Jung 2006. 7. 1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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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과 탈역사

월드컵의 집중포화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주몽’이다. 월드컵으로 인해 결방되는 ‘주몽’을 틀어달라는 시청자들의 요청은 그 인기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월드컵이 끝난 현재, 주몽의 시청률은 마의 고지, 40%를 넘는다.

‘주몽’과 함께 뜬 단어는 바로 ‘퓨전 사극’이다.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지만 극중의 대부분 인물과 설정은 작가의 상상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주몽’은 시작과 함께 역사왜곡의 논란에 휘말려야 했다. ‘주몽’의 인기와 더불어 불거져 나온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은 마치 드라마 ‘주몽’이 민족주의를 표방한 작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드라마 초반부에 ‘주몽’에 댔던 역사적인 잣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드라마가 시작되기 이전, 홍보 마케팅의 일환으로서 주몽은 그 역사성이 강조되었다. 아직 드라마화 되지 않았으니 우리의 뇌리 속에 있는 주몽을 환기시키는 방법은 그것뿐이기도 했다. 따라서 역사적인 영웅으로서 재생산된 ‘주몽’이 역사왜곡의 소용돌이를 빗겨가긴 힘들었을 것이다. 뚜껑을 열고 보니 역시 그랬다. 아무리 퓨전이고 해석된 사극이라 해도, 역사적 해석에 있어서 무리한 설정들이 눈에 띄었다. 사료가 없고 남은 사료도 사대주의적 사관에 의해 쓰여진 것이거나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고대사’라는 점은 문제를 더 미묘하게 만들었다.

절대적인 호응이 있었지만 동시에 비판과 우려가 잇따랐다. 그 우려는 ‘주몽’이라는 민족적 영웅에 ‘퓨전’이라는 날개까지 달았으니 우리의 민족적 자부심인 주몽은 이제 저 무협지와 환타지 속에 등장하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가진 영웅이 될 거라는 데 있었다. 역사는 드라마라는 장치로 인해 보호되고, 역사왜곡은 그것을 통한 민족적 영웅 만들기라는 장치로 막아질 것이었다. 그런 드라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은 있으나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퇴행적 결과를 예고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우려가 맞았을까.

우려와는 반대로 드라마가 중반으로 치달으면서 그런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몽은 타고난 영웅이라기보다는 보통사람에서 차츰차츰 커나가는 영웅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영웅주의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역사왜곡 논란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주몽’의 재미가 애초부터 역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퓨전 사극’이 갖는 환타지의 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우려는 사실 ‘주몽’이라는 드라마의 제목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 자체는 아니었다. ‘주몽’은 갑갑한 현실 속에서 마치 무협지나 환타지 소설을 읽는 듯한 모험과 사랑 이야기로 일관했다. 드라마 ‘주몽’은 아이러니하게도 주몽이라는 역사적 영웅에 빠져들지 않았다.

드라마 속에서 주몽은 민족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역경을 딛고 왕이 되는 전형적인 모험담 속의 영웅이다. 그것은 역사극이라기보다는 무협지나 환타지에 보다 가깝다. 이것은 그의 적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드라마는 주몽에게 한나라를 적으로 상정하고 그들을 물리치는 대업을 이루라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그 한나라라는 적은 추상적이다. 가끔 현토군 태수 양정이 나타나 한나라 황제의 말을 전할뿐이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의 흐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여전히 주몽이 실제로 처한 적은 한나라가 아닌 부여에 있다. 대소나 영포, 여미울이나 부득불, 도치 같은 인물들이 주몽의 적인 것이다. 주몽이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이들과 주몽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인물들간의 대결구도가 현재까지 이 드라마의 실제적인 재미이자 시청률 40%의 이유이다.

이러한 대결구도에서 주몽이 하는 역할은 과거 ‘대장금’이나 ‘상도’의 임상옥을 닮았다. 자신의 적과 경쟁하기보다는 자신 스스로의 힘을 키워가는 것이다. 자신의 역량 키우기 이외의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낭비하지 않은 대장금 혹은 임상옥처럼, 주몽도 당장 눈앞에 필요한 소금에 연연하지 않고 궁극적인 해결책을 얻기 위해 고산국으로 떠난다. 사실 주몽은 그들과 직접 대결하지 않는다. 대신 문제를 만드는 것은 대소 같은 적들이며 그들은 얼핏 당장의 우세에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국 실력 우위인 주몽에게 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적이 만들어 놓은 역경과 그 역경이 오히려 주인공에게는 기회가 되는 상황은 이미 ‘대장금’과 ‘상도’에서 익히 보았던 상황들이다.

최근 ‘주몽’의 기록적인 시청률은 이제 이 드라마가 굳이 그 이름이 ‘주몽’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재미있어지는 지점까지 왔다는 걸 보여준다. 주몽은 이렇게 역사라는 두꺼운 옷을 벗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졌다. 사극, 그것도 고대사를 다룬 드라마지만 그 드라마 속에는 현재가 고스란히 녹아난다. 한나라에서 부여를 옥죄는 ‘소금’이라는 무기는 작금의 국제정세 속에서의 ‘석유’로도 읽히고, 현토군 태수의 징병 제안에 대한 금와왕의 거부,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경제제재는 이라크전 징병 문제를 떠올리게도 만든다. 심지어는 TV 사극에서 좀체 보이지 않던 동성애 코드까지 읽힌다.

현재의 문제를 가상의 시대와 공간(여기는 고대사라고 하지만 퓨전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주몽의 세계는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인 것은 분명하다)에 집어넣어 자유롭게 엮고 푸는 재미는 아마도 퓨전 사극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그것은 주몽이라는 민족적 영웅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며 실제로 이 드라마는 그 길을 걷고 있다. 역사왜곡 문제에 있어서도 ‘퓨전 사극’이 ‘정통 사극’에 비해 더 논란이 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 많이 더해짐으로 인해서 ‘퓨전 사극’은 오히려 역사라는 틀 밖으로의 탈출이 용이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모두들 ‘이건 주몽이라는 소재를 다루지만 그래도 드라마일 뿐이야’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정통 사극’이라는 꼬리표는 그 역사적인 근거에 보다 치중해야된다는 점에서 ‘퓨전 사극’보다 불리하다. 드라마 작가가 역사가는 아니며 드라마가 또한 역사 그 자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몽’과 경쟁하는 새로운 대하사극 ‘연개소문’. 정통사극을 주창하고 나온 이 사극이 불리한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만일 그 불리함을 이겨내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운다면 그것 역시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역사해석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사극이 하는 말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보다는 드라마적인 요소에서 승부를 내야한다. 드라마 외적인 것의 도움을 구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드라마라는 틀로 숨어버리는 이율배반은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