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월드컵 중계방송이 시사하는 것들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월드컵 중계방송이 시사하는 것들

D.H.Jung 2006. 7. 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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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우리에게 남긴 것

월드컵이 끝났다. 16강 진출은 좌절됐지만 어웨이 경기에서 첫 승리를 거둔 토고전과 프랑스와 무승부는 명승부 중의 명승부였다. 그 주역은 두말 할 것 없이 아드보카트 감독을 위시한 태극전사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 명승부에는 또 하나의 주역을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로 월드컵 관련 방송들이다. 애매한 판정까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방송기술, 방송사마다 다른 해설의 묘미, 뉴스가 밀려날 정도로 구성된 월드컵 뉴스, 다채로운 경기분석과 예상을 해준 월드컵 리뷰 방송, 심지어 월드컵과 함께 한 오락 프로그램까지 월드컵을 풍성하게 만든 주역들이었다. 그리고 그 월드컵 관련 방송들의 치열한 경합 속에 방송사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두 마리 토끼의 이름은 공영성과 재미이다.

축구중계방송에도 이변은 없었다
이번 월드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변이 없었다. 전통적인 강호들이 16강, 8강, 4강으로 좁혀들었고 갈수록 유럽국들 간의 제전이 되었다. 그건 축구중계방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으로 축구중계에 강한 MBC가 현저한 차이로 시청률 수위를 달렸기 때문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차범근 감독이 이끈 태극전사들이 도쿄에서 일본을 상대로 짜릿한 2-1 역전승을 했던, 이른바 ‘도쿄대첩’은 또한 MBC 축구중계의 새장을 만들었다. 신문선-송재익의 입담은 순식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2002년 신문선-송재익 콤비는 시청률의 반전을 노리던 SBS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런데 SBS의 노력은 MBC에서 새롭게 등장한 차범근 해설위원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이른바 ‘영양제 논란’으로 불거진 해설의 신뢰도 문제는 MBC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4년 후, 히딩크 감독에 황선홍 해설위원, 게다가 신문선이 합세한 SBS는 이변을 예고했지만, MBC의 차-차 부자에게 또다시 시청률 경쟁에서 밀려나게 됐다. 전통적으로 축구중계방송에 강한 MBC의 승리였다. 이변은 없었다.

월드컵 중계에 있어서 MBC는 SBS, KBS의 중계 시청률을 압도적으로 앞질렀다. 우리나라 경기중계에 있어서 MBC는 3경기 평균 시청률 30.3%, 대한민국과 토고 경기만을 중계한 KBS1은 26.2%, 프랑스, 스위스와의 경기를 중계한 KBS2는 2경기 평균 시청률 12.8%를 기록한 반면, 3경기를 모두 중계한 SBS는 평균시청률 12.0%로 저조한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시청률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KBS뉴스9(평균적으로 약 20%)에 비해 MBC 뉴스데스크가 평균적으로 10% 내외의 저조한 시청률을 갖고 있는 반면, MBC 스포츠뉴스는 15%대의 높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뉴스보다 스포츠뉴스가 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데는 여러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예를 들면 바로 이어지는 주몽 같은 드라마의 영향) 월드컵이 분명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MBC의 월드컵 중계는 타 방송사의 그것과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차-차 부자의 압승은 달라진 방송 환경의 영향
과거와 비교해 우리의 방송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뉴스는 과거에 방송사와 신문사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 그 둘을 모두 끌어안은 데다 양방향성까지 갖춘 인터넷이 뉴스보도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종이신문들은 인터넷에 밀려 퇴조하고 있고, 방송은 그 속보성에서 뒤쳐지면서 점점 공룡이 되어가고 있다. 인터넷이 끼친 가장 큰 영향력은 독자를 필자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수동적 시청자가 참여하는 주체가 되자, 뉴스를 보는 시각은 ‘들려주는 대로 수용하는’ 상하관계가 아닌 ‘같은 눈높이로 보는’ 수평관계로 바뀌었다.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은 이제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바로 내가 될 수도 있고 내 옆의 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시기에 월드컵에 즈음하여 전문가도 아니고 경륜이 있는 것도 아닌 청년 차두리가 중계방송에 합류한 것은 기상천외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차두리는 우리가 중계방송을 통해 보고 싶어한 우리 옆의 친근한 그 인물(해설가로서는)이었던 것. 우리는 차두리의 순수하고 솔직한 해설을 보면서 갖은 폼을 잡고 자신만이 정확히 아는 전문가인 양 얘기하는 해설가들과는 다른 통쾌함을 느꼈다.

그런데 차두리가 중계방송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차범근이라는 인물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프로 해설자와 아마추어 해설자를 한 자리에 놓는 건 자칫 중계를 망칠 위험이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바로 차범근이 차두리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중계방송을 보는 이들은 편안하게 방송을 볼 수 있었다. 차두리의 돌발발언은 차범근이라는 무게가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귀여운 짓’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차두리가 MBC가 아닌 타 방송사에서 다른 해설자와 함께 같은 식의 중계를 했다면 똑같은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나운서는 이제 프로그램의 중재자
여기에 김성주 아나운서가 포진된 것 역시 절묘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김성주 아나운서의 이미지는 방송의 공정성과 함께 재미라는 측면 그 어느 쪽에서도 어울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달라진 방송환경을 대변한다. 과거 아나운서라고 하면 보도의 공정성에 더 무게를 두기 마련이었지만 요즘은 프로그램의 중재자 역할에 더 충실해졌다. 아나운서로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노현정 아나운서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방송이 보여야 하는 공정성(올드 앤 뉴 같은 프로그램에서의 우리말에 대한 공정 보도)과 재미(말도 안 되는 얘기를 던져대는 개그맨들) 사이에서 그 균형점을 잡아나가는 것이다.

노현정 아나운서가 오락프로그램에서부터 월드컵 리뷰방송까지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김성주 아나운서는 특유의 입담으로 차두리의 돌발발언에 순수함을 부여해주었고 차범근은 무게 있는 해설 속에서도 보다 친근한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김성주 아나운서는 차두리와 차범근이라는 극과 극 사이에 정확한 균형자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제 MBC의 월드컵 중계방송은 세대를 넘어 소통하는 창구가 되었다. 솔직하지만 거친 아들의 발언에 당황하며 허허 웃는 아버지. 그러다가도 따끔하게 한 마디 할 때는 거침이 없는 아버지. 함께 웃고 안타까워하는 그 과정이 축구 중계 이상의 것을 만들어냈다. 중계를 보는 아버지들은 차범근에 감정이입됐고, 아들들은 차두리에 감정이입됐다. 중계방송은 이제 실수까지도 포용하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이 엉뚱한 부자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방송의 균형을 잡아낸 김성주 아나운서의 몸값은 뛰었다.

직설화법의 일방성이 만든 반향
반면 시청률도 떨어지는 상황에서 ‘할 말은 한다’는 식으로 특유의 직설화법을 구사한 SBS 신문선 해설위원은 스위스 전의 발언 하나로 중도하차 하는 불운까지 겪었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를 할 줄 아는 용기’라고 생각했을까. ‘심판의 판단이 맞다’는 그의 발언은 일파만파로 번져 인터넷은 온통 신문선 해설위원을 질타하는 글들로 가득 찼다. 그 영향을 의식해서인지 SBS는 신문선 해설위원을 조기 귀국시켰다.

그 심판판정에 대한 진위여부는 여전히 논란중이다. 하지만 그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한 해설위원의 한 마디가 이다지도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과열된 월드컵 분위기와 여기에 부응해 전쟁을 방불케 하는 방송사간의 경쟁이 한몫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문선 해설위원의 해설 방식이다. 많은 네티즌들은 발언 이전부터 신문선 해설위원에 대한 안티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자신감 있는 직설화법은 변화된 매체환경 속에서는 자칫 독선적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었다. 심판 판정에 대한 발언은 그 도화선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이것은 최근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범근 식의 ‘노심초사’해설과는 정반대로 읽힌다).

이런 상황에 SBS가 취한 태도 역시 비판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 내용이 어떻든 시청률에 급급한 나머지 중도 하차시키는 모양새는 상황을 더 보기 나쁘게 만들었다. 네티즌들의 안티에 발끈하고 나선 신문선 해설위원의 모습 역시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었다. “지나친 애국심 때문에 잘못된 해설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은 오히려 반감만 더 키운 꼴이 됐다. 신문선 해설위원의 말이 맞다고 해도 그의 말은 “제대로 된 해설을 위해서라면 국민적 정서 따위는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는 오만으로 비춰질 수 있는 구석이 있다. 여기서 신문선 해설위원이 하나 간과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시청자들은 이제 “사실보다는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경규가 간다’라는 코너가 될 것이다.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이경규가 간다’
‘이경규가 간다’는 월드컵 리뷰 방송이다. 따라서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경기가 끝난 후 ‘편집’되어 방송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집’이라는 부분이다. 편집에 의해서 ‘각본 없는 드라마’는 각본을 갖게 된다. 본 중계방송에서는 공을 따라서 카메라가 거의 대부분을 쫓아다니지만, ‘이경규가 간다’는 하나의 논조를 가지고 사실들을 끄집어내 편집해서 전체의 이야기를 만든다. 따라서 월드컵이라는 거대 이벤트에서 비롯된 국민적 감성을 편집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하나로 끌어 모으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 각본 없는 드라마에 각본을 준다는 의미에서, 이번 2006년 ‘이경규가 간다’의 최고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억울하게 진 스위스전이 되었다.

먼저 선취골을 먹은 상태에서 역전과 동점상황을 만든 토고전, 프랑스전의 각본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자체가 국민들을 열광하게 한 ‘각본 없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위스전의 각본은 달라야 했다. 열심히 잘 싸웠지만 골 운도 없었던 데다가 심판 판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경규가 간다’는 스위스전에 대한 국민적 감성을 제대로 읽어냈다. “정말 잘 싸웠지만 어이없는 판정으로 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 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일 스위스전이 끝났을 때 ‘축구는 오늘 죽었다’라는 자막과 함께 끝난 중계방송의 논조와 연장선상에 있다. 하나의 판정이었지만 이에 대한 접근방식은 MBC와 SBS가 이다지도 달랐던 것이다.

‘이경규가 간다’를 K리그로 보내야 K리그가 산다는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우리네 K리그가 가진 문제점을 제대로 포착한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월드컵에서 뛰는 외국선수들의 이름과 주특기를 줄줄이 외우고 있지만 K리그에서 뛰는 우리나라 선수들은 잘 모른다. 이유는 단 하나. 홍보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각본 없는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각본 있는 드라마’ 이상으로 극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극적인 이야기를 원한다. 저 이종격투기 K리그가 단 10초만에 끝나는 경기를 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상대방 선수들에 대한 갖가지 이야기를 쏟아 붓는 반면, 우리네 축구 K리그는 거기 뛰는 선수들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내놓지 않는다(혹은 아무도 경청하지 않을 정도의 홍보만 하고 있던가). 10초만에 끝나도 어떤 경기는 극적인 것이 되는 반면, 어떤 경기는 90분간을 뛰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축구경기는 경기일 뿐이지만 경기를 재미있게 하는 것은 그 경기라는 드라마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이다(물론 여기서 이야기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실에 대한 해석을 말한다).

포스트 월드컵, 보고 싶은 걸 보여준다
월드컵 중계방송이 말해주는 것처럼 방송은 이제 “보고 싶은 걸 보여주는” 쪽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건 다른 말로 해서 공영성보다는 시청률에 더 끌린다는 말이다. 사실보다는 해석에 더 끌린다는 말이다. 이미 인터넷에 떠버리는 기사들을 발굴하기 위해 수십 명의 기자들이 달라붙어 고작 10% 내외의 시청률을 올리는 뉴스보다는, 똑똑한 PD 몇 명이 만들어 훨씬 높은 시청률을 올리는 ‘세상은 이런 일이’나 ‘VJ 특공대’, ‘무한지대 큐’ 같은 ‘점점 진짜 뉴스가 되고 있는’ 프로가 더 경쟁력이 있다는 말이다. KBS 같은 공영방송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신뢰성에서 경쟁도 되지 않으니 뉴스도 중계방송도 달라져야 할 것이 아닌가.

월드컵은 끝났지만 월드컵이 방송사들에게 남긴 결과는 포스트 월드컵의 방송가에서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오락프로그램들이야 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송의 공영성이 강조되는 뉴스나 교양 프로그램 등에서 두드러질 것 같다. 또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이 필요한 역사극 부분에서도 이 영향은 그대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몇몇 역사극에서 불고 있는 퓨전 돌풍은 그 전조가 되고있다.

시대가 변했고 매체환경도 변화되었기 때문에 TV가 그러한 감성을 제대로 읽어내고 거기에 부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TV가 가진 공영성보다 시청률에 급급한 것은 문제의 소지를 남긴다. 특히 중계방송이나 뉴스 같은 TV의 사회적 책무가 요구되는 프로그램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또는 너무 똑같은 내용들의 반복이어서, 아무도 보지 않는 뉴스는 불필요할 것이다. 월드컵이 그렇듯이 우리 사회에서 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은 그 자체가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를 공영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시각으로 보여주는 균형 잡힌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 월드컵. 그 중계방송의 성패가 말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드라마의 각본을 제대로 읽으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