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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세상

“져도 돼”... ‘라켓소년단’, 승자독식 강박사회와 망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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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켓소년단’, 변방으로 가 중심 강박을 털어버리다

라켓소년단

“저는 내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배드민턴 국제대회에 나간 한세윤(이재인)은 코치에게 다음 날 경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묻는다. 다른 선수들에게는 일일이 조언을 해주는 코치가 단식대회에 나가는 한세윤에게는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아서다. 그러자 코치는 말한다. “하던 대로. 그냥 너 하던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물론 이런 말은 코치가 한세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늘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이기는 선수. 그래서 이기는 게 ‘당연한’ 선수이기 때문에 뭐라 코치를 해줄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코치의 말에 한세윤은 어딘지 시무룩한 얼굴이다. 그 ‘당연한 우승’에 대한 기대가 만만찮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 전 잠도 못자고 두통으로 시달리던 선수였다. 

 

친구부터 코치, 동네 어르신들까지 모두가 영상으로 응원 메시지를 보내오지만, 그것이 기쁘면서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그런데 그에게 의외의 영상 메시지 하나가 온다. 윤해강(탕준상)이 보낸 메시지다. “내 생각에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어. 지금도 충분히 충분하고 대단히 대단하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져도 돼. 한세윤.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그동안 고생했다.”

 

SBS 월화드라마 <라켓소년단>은 배드민턴이라는 스포츠의 세계를 다룬다. 뭐든 1등을 해야 알아주고 승자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우리네 경쟁사회에서 스포츠의 세계만큼 ‘승자독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야도 없다. 인기 종목이야 그나마 더 여지가 열려 있지만, 비인기 종목으로 국제대회에서 잠시 화제가 되었다가 끝나고 나면 잊히기 마련인 비인기종목은 더더욱 그렇다. 국내 1위가 아니라 세계 1위가 되어도 주목받지 못하는 종목도 있으니.

 

<라켓소년단>은 스포츠의 세계를 가져와 승자 독식 강박에 빠져있는 우리네 현실을 에둘러 끄집어낸다. 선수들은 저마다 배드민턴이 즐거워서 하다가도 우승하지 못하면 계속 그 운동을 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늘 이겨서 우승이 당연하다 생각되는 선수는 한 번 지면 그 충격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러니 우승은커녕 소년 체전을 앞두고 같은 팀에서 나갈 3명을 뽑기 위해 한 명의 탈락자를 뽑는 평가전마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운동은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절박한 선택이다. 

 

나우찬(최현욱)은 늘 배드민턴을 하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 때문에 힘겨웠지만, 갑자기 “잘 해보라”는 말에 불안감을 느낀다. 스스로도 팀 내에서 자신이 가장 뒤쳐진다 여기고 있는데다, 그 잘 해보라는 아버지의 달라진 태도에 신경이 곤두선다. 그의 불안감은 그리고 사실 그대로다. 아버지는 이제 곧 고1이 될 아들이 더 이상 배드민턴에 길이 보이지 않으면 포기시키려고 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이기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우리네 승자 독식 사회의 풍경이다. 

 

<라켓소년단>이 굳이 도시가 아닌 땅끝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도시로부터 소외된 ‘변방’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세워두고, 마치 그 곳으로 입성해야 ‘승자’가 되는 사회, 그 곳에서 어느 곳에 몇 평짜리 아파트를 가져야 성공으로 여기는 사회, 그런 지표들이 그는 물론이고 그 자녀들의 삶에까지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는 그런 사회에서 변방의 소외는 폭력적이다. 하나의 중심을 세우면 그 주변이 모두 소외된다는 점에서, 승자로 돈으로 지위로 중심이 세워지는 사회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라켓소년단>을 그래서 그 땅끝마을로 간 소년이(그것도 하고 싶은 야구를 잠시 접어두고) 그 곳에서 팀원이 없어 팀 자체가 와해될 위기에 놓여 있는 배드민턴부에 들어가 함께 소년 체전을 향해 가는 이야기 속에, ‘승자 독식 강박’과는 정반대의 ‘망할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놓는다. 윤해강은 만만찮은 승부욕의 소유자지만, 그렇다고 승부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한세윤에게 “져도 돼”라고 말하면서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한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대단하다 말한다. 

 

그 누구도 우리 사회에서는 “져도 돼”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꼭 이기고 합격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 승자 독식의 강박 속에서 우리는 좀체 즐겁게 무언가를 하지 못한다. 이겨야 비로소 즐거울 수 있는 사회니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긴다면 누군가는 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꼭짓점 위에 서 있는 한 명의 승자는 더 많은 패자들을 낳는다. 이런 사회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윤해강이 툭 던지는 “져도 돼”라는 말을 듣고는 어딘가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그래서 저 경기를 앞두고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는 한세윤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매일 한세윤이 마주한 그런 경기를 앞두고 살아가는 처지가 아닌가. 져도 망해도 그 과정의 최선을 누군가 알아봐주고 기꺼이 박수 쳐주는 그런 사회에 대한 열망이 이 땅끝마을로 간 소년소녀들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사진: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