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멸망’과 ‘간동거’의 평행이론
로맨틱 코미디의 남녀 주인공은 당대의 대중들이 가진 욕망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 방영되고 있는 tvN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와 <간 떨어지는 동거>는 유사한 지점이 있다. 초현실적 존재와의 로맨틱 코미디를 그리고 있어서다.
이젠 ‘멸망’과 밀당하는 판타지 멜로의 시대
사귀던 남자가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고, 뇌종양까지 발견되어 100일 시한부 판정을 받은 탁동경(박보영)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외친다. “세상 다 망해라! 다 멸망해버려!” 그런데 그 날 새벽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보니 웬 잘 생긴 남자가 서있다. 그는 불러서 왔다며 자신을 ‘멸망’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tvN 월화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는 멸망(서인국)과 탁동경의 밀당 판타지 멜로가 시작된다.
사실 초현실적인 존재와의 사랑이야기는 완전히 색다른 건 아니다. 이미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이하 도깨비)>를 통해 우리는 도깨비 김신(공유)은 물론이고 저승사자(이동욱)의 매력에 푹 빠져본 경험이 있다. <멸망>은 이 작품을 쓴 김은숙 작가의 보조작가였던 임메아리 작가가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어딘가 <도깨비>를 닮았다. 잘 생긴 초현실적인 존재의 갑작스런 등장과 그와 얽히는 판타지 멜로 그리고 과거사의 비극까지, <멸망>의 세계관은 유사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그건 ‘도깨비’가 초현실적인 존재이긴 해도 최소한 설화 속에 등장하는 어떤 형상이 있는 반면, ‘멸망’은 말 그대로 추상이기 때문이다. 그 추상적 관념을 그려낸 실재 인물과 만나고 사랑하고 아파하며 아마도 헤어질 그 과정들은, 그래서 탁동경이라는 절망에 빠진 인물이 그 절망(아마도 멸망 같은)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극복하는가의 과정처럼 그려지는 면이 있다. 예컨대 이 드라마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멸망이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찾아온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탁동경은 그 멸망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걸 선택한다.
바로 이런 ‘추상’과의 판타지 멜로가 만들어내는 철학적인 세계관은 그래서 이 평이한 로맨틱 코미디를 차별적으로 보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사실 이러한 세계관을 빼놓고 보면 <멸망>은 지극히 평범한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다. 함께 동거를 하고 계약서를 쓰고 밀고 당기는 관계를 보이다가 사랑하게 되는 드라마. 하지만 탁동경이 사랑하게 되는 존재가 다름 아닌 ‘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이유’인 멸망이라는 사실은 이 평이한 로맨틱 코미디에 무게감을 만들고 나아가 운명적인 비극의 향기까지 드리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즉 그 추상적 존재와의 관계를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려는 시청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흥미를 주지만, 그것이 너무 복잡하거나 낯설게 느껴지는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뻔하고 틀에 박힌 멜로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한 가지 지평만은 넓힌 공적이 있다. 그건 이제 멜로가 ‘멸망’ 같은 추상적 존재와의 밀당 정도는 다뤄야 새롭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다.
‘멸망’과 다른 듯 닮은 ‘간동거’의 판타지 멜로
tvN 수목드라마 <간 떨어지는 동거>는 그 이야기의 소재를 구미호 설화에서 가져왔다. <전설의 고향>에서부터 최근 <구미호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재해석과 진화를 거듭해온 설화의 주인공이다. <간 떨어지는 동거>가 특이한 건 신우여(장기용)라는 구미호가 무려 999살을 산 존재라는 점이다. 고려 현종 때 태어난 이 인물은 그래서 조선시대를 거쳐 구한말을 지나 현재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어딘가 <별에서 온 그대>의 외계인 도민준(김수현)을 닮았다.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골동품들이 가득 채워진 집의 풍경이 그렇고, 남다른 능력(도술)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 그렇다. <간 떨어지는 동거>의 구미호 신우여는 그 긴 세월을 살며 인간에게는 정을 주지 못하는 ‘어르신’이지만, 어쩌다 우연히 그의 구슬을 삼키게 된 이담(혜리)을 그는 조금씩 마음에 담기 시작한다. 구슬을 빼내는 건 간단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담의 기억이 모두 지워지고 그렇다고 그대로 놔두면 구슬에 정기를 빼앗겨 이담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신우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멸망>과 <간 떨어지는 동거>는 언뜻 보기에는 확연히 다른 작품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비슷한 요소들이 적지 않다. 즉 멸망이나 구미호 같은 초현실적 존재가 등장하고, 그와의 밀당 로맨틱 코미디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비슷하며, 이들은 결국 동거를 하게 되고 함께 사는 동안의 계약서를 쓴다는 점도 유사하다. 또한 이 멜로가 순간순간을 웃음으로 채워 넣는 코미디라는 장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과, 쉽게 이뤄질 수 없는 비극을 담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인간과 초현실적인 존재 간의 사랑이니 어찌 쉽게 이뤄질 것인가.
그런데 이렇게 유사한 지점들이 많은 건, 이 두 드라마가 전형적인 ‘청춘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들을 따라가고 있어서다. 즉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그대로 두 작품이 모두 쓰고 있지만, 거기에 ‘멸망’이나 ‘구미호’ 같은 초현실적 존재를 더함으로서 색다른 관전 포인트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멜로라는 장르의 안간힘이 느껴지는 이유
우리네 드라마에서 한때 멜로는 중심적인 장르였다. 그것은 최근 등장한 장르 드라마들보다 훨씬 더 ‘맨 파워’에 의해 힘을 발휘하는 장르가 바로 멜로이기 때문이다. 액션이나 화려한 CG 혹은 판타지적 세계를 세트나 의상 등을 통해 구현해내곤 해야 하는 장르드라마들은 더 큰 제작규모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담는 멜로드라마들은 잘 만든 대본과 연기자들의 감정 연기 등으로 가성비 높은 몰입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남녀 간의 사랑을 담는 멜로만큼 본능적인 소재도 없다. 그래서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기까지 트렌디 멜로 드라마들은 우리네 드라마를 대표하는 장르였다. 2002년 만들어졌던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첫 한류의 불씨를 지폈던 것도 그 동력은 바로 멜로였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그 후 20년 간 급격히 변화했다. 너무 많이 나온 멜로드라마들은 이제 시청자들이 그 공식을 꿰고 있을 만큼 익숙한 문법이 되어버렸고, 2010년대까지도 그토록 쏟아져 나온 신데렐라 판타지의 멜로드라마들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대중들의 ‘성인지 감수성’ 때문에 변화를 요구했다. 김은숙 작가가 2000년대 초반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 <연인> 3부작으로 멜로 장인에 등극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신데렐라 스토리 덕분이었지만, 이 작가는 2016년부터 <태양의 후예>,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 그리고 <미스터 션샤인>의 대작 3부작을 통해 변신했다. 장르와 더해진 멜로의 퓨전을 성공적으로 실험한 것.
<멸망>이나 <간 떨어지는 동거> 같은 초현실적 존재를 등장시켜 만들어가는 판타지 멜로는 그래서 이 흐름 안에서 보면 너무 익숙해져 위기에 빠진 멜로의 안간힘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그 문법은 익숙하지만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새로움을 시도하려는 안간힘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간힘을 성공했을까. 두 작품은 모두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가 아닐까 싶다. 새로운 소재와 장르를 더해 새롭게 만들려 한 시도는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하지만, 그 껍질을 벗기고 나면 여전히 같은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어쨌든 멜로는 남녀 인물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에서는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다만 시대적 변주와 창조적 변화가 요구될 뿐.(글:매일신문, 사진: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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