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세상을 향한 길 위의 희망가, '오 마이 텐트'

토크멘터리. 토크와 다큐멘터리가 엮어진 '오 마이 텐트' 스스로가 표방한 지칭이다. 다큐멘터리와 타 장르와의 퓨전이 새로운 경향으로 나오고 있는 요즘, '오 마이 텐트'의 토크멘터리 표방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다큐멘터리와 예능이 만나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대단히 매력적인 형식을 창출해낸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예능이 다큐멘터리의 리얼리티를 끌어들이는 것과 다큐멘터리가 예능적인 요소를 끌어들이는 것은 역시 다르다. 무엇보다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그 특성으로서의 진지함이나 진정성이 예능적인 요소와 부딪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재미있어야겠지만 재미 그 자체보다는 어떤 의미가 목적이 되어야 그 형식이 다큐멘터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게 된다. 즉 쉽지만은 않은 결합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프로그램을 김제동이 진행한다고 했을 때, 그런 걱정은 상당부분 상쇄되었다. 김제동은 순발력과 재치가 넘치는 토크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해질 줄 아는 개그맨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처음에는 재치 있는 입담에 웃음을 터트리게 되고, 그 웃음의 끝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게 된다. 웃음이 의미를 만나 훈훈해지는 것이다.

'오 마이 텐트'는 바로 그 김제동을 그대로 빼닮은 프로그램이다. 손님을 초대해 이틀간 여행을 하면서 나누고 겪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이 프로그램은, 우리가 흔히 여행을 떠나면 그 함께 떠나는 사람에 따라 여행의 성격이 달라지듯이, 함께 떠나는 김제동을 닮아있다. 때 아닌 야구배트를 꺼내 야구선수들을 흉내내는 것으로 웃음을 주고, 허술하게 차리진 밥상머리에 식구들(매니저와 코디)과 함께 맛없는 밥을 먹으면서 연실 웃는 장면에서는 이야기 없이도 훈훈해지는 느낌을 전해준다.

김제동이 캠핑장에서 기타를 치며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를 듣는 캠핑족들의 표정 속에는 삶에 대한 어떤 공감이 묻어난다. 김제동 자신이 손님으로 초대된 첫 파일럿 프로그램에서는 그에게 몇 가지 질문들이 던져졌고 거기에 대한 김제동의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사실 이야기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상을 벗어난 이들이 공통으로 갖는 어떤 편안함과 관조적인 태도가 주는 일체감일 것이다.

'오 마이 텐트'가 굳이 토크를 하기 위해 길 위로 나선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미 길을 함께 간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소통하고 있다는 것. 일상 바깥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 그 올바른 자신의 얼굴로 돌아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는 것. 그러니 그 위에 걸쳐지는 토크의 내용이 뭐가 중요할까. 일상 바깥에서 관계와 위치 같은 사회적 껍질을 벗고 나면 다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 토크 없이도 되는 토크. 김제동의 '오 마이 텐트'가 보여주는 것은 그 소통의 세상을 향해 내딛는 길 위의 희망가다.

일상적 다큐의 시대, 다큐를 외면하는 TV

KBS는 가을개편을 맞아 그간 주중 저녁에 매일 방영되며 일일 다큐 시대를 열어놓았던 '30분 다큐'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30분 다큐'는 이번 주까지만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폐지 이유는 시청률이나 제작비 부담 등을 들고 있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편당 1천만 원 정도가 들어가는 이 프로그램에 제작비 부담을 얘기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게다가 시청률을 목적으로 했다면 그럴만한 후속 프로그램이 있어야 할 텐데, '30분 다큐'의 공백은 종전처럼 스포츠 뉴스가 채운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청률이 높은 KBS1TV의 일일드라마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 시간대의 KBS2는 공백지대로 놔두겠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30분 다큐'는 그렇게 간단히 폐지돼도 될 만큼 존재감이 없는 프로그램일까. 시청률이 낮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같은 시간대가 일일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이라, 이 시간대의 편성은 애초부터 다큐멘터리로서는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독특한 다큐멘터리 형식은 단지 시청률만으로는 얘기할 수 없는 존재가치가 있다. 그것은 국내 TV 다큐멘터리가 가진 거대담론의 이야기들을 벗어나 소품이지만 일상적인 다큐멘터리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30분이라는 시간으로 압축된 다큐멘터리는 그 안에 지금껏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거창한 기획의 다큐멘터리의 세계에서는 좀체 발견하기 힘든 지점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장점이 있다. 즉 일상이라는 소재 자체가 다큐멘터리의 카메라에 포착되기 시작된 것. 이것은 영상이 일상화되어버린 현재, 거대담론의 다큐멘터리들이 놓치고 있던 것들이기도 하다. '30분 다큐'는 그 짧은 시간이 주는 경쾌함으로, 일상성의 소재를 가벼이 다루지 않는 겸손함으로, 우리에게 다큐멘터리란 본래 이처럼 친근한 것임을 드러내주었던 프로그램이다.

이것은 또한 현재 TV 다큐멘터리가 어떤 변화의 길을 가는 도정에 놓여진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TV 다큐멘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그 변화의 속도가 느리게 진행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다양한 실험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을 고민하고, 틀에 박힌 엄숙주의의 무거움을 깨뜨리면서 대중들과 호흡하려 할 때, TV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그 보수적인 틀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TV 다큐멘터리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MBC스페셜'은 그 편안해진 다큐멘터리의 성공사례로 지목된다. 'SBS스페셜'는 여전히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작금의 변화된 다큐멘터리의 일상화를 저버리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KBS는 '30분 다큐'와 함께 '다큐멘터리 3일'이 그 첨병에 나서고 있다. 3일이라는 시간의 축으로 자른 특정 공간을 포착해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그려내는 이 독특한 형식의 다큐멘터리는 기획 다큐멘터리가 갖는 기획적인 의도성의 틀을 깨는 힘을 보여주었다. 즉 의도하지 않은 낯선 곳에서의 만남과 발견의 영상들은 그 순간의 포착이 잡아내는 리얼리티의 진정성을 극대화시켜 주었다. '다큐멘터리 3일'이 이렇게 포착하는 곳의 시간을 3일로 압축시켜 거기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삶 속에 숨겨진 비의를 포착해냈다면, '30분 다큐'는 방송분량을 압축함으로써 그간 일상이라는 이유로 소외된 소재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공적이 있다.

항간에는 '30분 다큐'가 폐지되고, '다큐멘터리 3일' 역시 지금 시간대인 토요일 저녁 9시40분에서 더 늦은 밤으로 미뤄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으로 롱런하며 세간의 관심을 한몫에 받아왔던 '인간극장'이 아침 7시50분대로 이동된 것까지 생각해보면, 이제 KBS 다큐멘터리는 'KBS 스페셜'을 빼고는 모두 한데로 내몰리는 느낌이다. 현재의 방송 프로그램들이 예능, 드라마 할 것 없이 다큐멘터리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식들이 탄생하는 요즘, 그만큼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이 시점에 다큐멘터리가 폐지되거나 한데로 옮겨가는 상황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물론 시청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TV에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어떤 재미적인 기능을 통해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형식이라면, 다큐멘터리는 TV라는 매체가 갖는 정보적 기능에 충실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정보성을 버리고 재미에만 치중할 경우, 결국 TV는 오락기로 전락하고 말 것이 명약관화한 현실이다. '30분 다큐'의 폐지. 시간대의 이동도 아닌 이 일상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폐지가 유감스러운 것은 그 때문이다.

신조어 속에 숨겨진 세태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가 방영될 때, 우리는 초식남이라는 신조어를 듣게 되었다. 초식남. 풀만 먹는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위키디피아의 정의를 보면, 초식남은 '남성다움(육식적)을 강하게 어필하지 않으면서, 주로 자신의 관심분야나 취미활동에는 적극적이나 이성과의 연애에는 소극적인 남성을 일컫는 말'이다. 초식남과 함께 고개를 든 신조어가 건어물녀다. 이 신조어는 2007년 방영된 일드 '호타루의 빛'의 주인공인 호타루라는 여성에게서 비롯된 말이다. 일 잘하고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연애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퇴근하고 나면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에 대충대충 살아가는 싱글 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연애세포가 말라 건어물처럼 되었다고 해서 건어물녀라고 불린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우엉남, 토이남, 품절남, 엣지녀, 인상녀, 짐승남... 이 끝없는 신조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는 양상이다. 그리고 그런 신조어들 옆에는 늘 연예인들의 이름이 달라붙는다. 오지호는 대표적인 우엉남이고, 유희열은 토이남, 빅뱅의 탑은 짐승남... 이런 식이다. 신조어가 어떤 트렌드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연예인들은 어떻게든 이 신조어와 만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러한 신조어가 붙는 연예인들은 뜨고 있는 연예인을 표상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복잡한 세상, 정리가 필요해
이렇게 ○○남, ○○녀처럼 어떤 특정 성향을 가진 이들을 지칭하는 신조어들은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경향은 아니다. 과거에도 신세대, X세대, 와인세대 같은 세대를 지칭하는 신조어들이 있었고, 오렌지족, 낑깡족, 야타족 같은 족속들을 지칭하는 신조어들이 있었다. 깊게 들여다보면 그 신조어들은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각기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그것은 과거처럼 성별의 구분이 되어있지 않은 신조어들과 달리, ○○남, ○○녀 같은 최근 신조어들은 남성과 여성을 마치 성별 구분하듯 나누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또 이러한 신조어들이 한번 나오면 일정 기간 동안 홀로 트렌드를 유지하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거의 매일같이 새로운 신조어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먼저 남성과 여성이 나누어지는 양상은 그만큼 성별이 동등하게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낼 정도로 다채로운 성향이 구분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덧붙여지는 것은 ○○남, ○○녀 같은 용어들이 그 자체로 재미있는 놀이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신조어들은 현재 인터넷이라는 공간 속에서 특정 부류와 특정 성향을 분류하는 놀이가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놀이성은 신조어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설명해준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왜 이런 놀이가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인터넷이라는 공간으로 표면화 되는 사회의 복잡성이 그 원인을 제공한다. 물론 사회는 예전부터 복잡했지만,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다른 매체와 달리 복잡한 사회의 구석구석에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러니 그 다양한 성향과 특징들이 몇 마디로 정리되고 구획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요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양한 별종들이 공존하는 세상
중요한 것은 이렇게 신조어로 정리되는 성향들이 갖고 있는 독특함이다.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조건 중 독특함이나 특별함은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그것을 듣고 신기하다거나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평범한 신조어는 그저 사장될 뿐이다. 초식남을 예로 들면 과거에는 이런 성향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다. 남성이 남성다움을 어필하지 않고 연애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인물은 별종으로 여겨지곤 했다.

가부장적 사고관이 지배했던 사회는 다양한 성향을 배제하고 누구나 따르기를 요구되는 성향이 획일적으로 제시됐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런 과거의 별종들은 이제는 다양성의 품속으로 들어와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심지어는 그 성향에 대한 공감대까지도 넓혀나간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초식남이나 건어물녀로 지칭되는 이들이 과거 신세대나 X세대처럼 다수의 트렌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신조어가 구획하는 인물군들이 소품종 다수를 지칭했다면, 지금은 다품종 소수를 지칭하는 경향이 짙다.

즉 특이한 성향을 가진 소규모 집단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 특이한 성향에 대한 거부보다는 수용하는 자세가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성의 추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인터넷은 이제 다채로운 인간군상들을 서로서로 뽐내듯 드러내고 또 인정하는 다양성 게임의 재미에 빠져있다는 것. 획일적인 과거를 생각해보면 그것을 하나하나 깨부수는 이 작금의 다양성 게임이 주는 매력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조어, 시대를 읽는 기호 혹은 상품을 위한 포장
하지만 이처럼 다양성의 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신조어들을 그저 긍정적인 것으로만 치부해도 좋을까. 문제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러한 발 빠른 마케터들의 상품 판매를 위한 성향에 대한 선점이다. 신조어는 때로는 자생적으로 생긴다기보다는 이해관계를 가진 특정인들에 의해 제시되고 배포되어 조장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신세대니 X세대니 와인세대니 할 때 그 용어들은 새롭게 부상하는 개성을 가진 이 세대들을 특정 감성을 가진 상품 마케팅의 영역으로 묶어두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상품의 구매가 멋져 보이는 세대로의 편입으로 이어지는 심리적인 효과를 유발시키기 위함이다. 이런 세대나 성향을 구획하는 신조어들이 가진 마케팅 경향은 지금에도 달라진 것이 없다. 이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인터넷에 한 신조어를 검색해보는 것이다. 초식남이나 건어물녀라고 치면 그 키워드를 가진 무수한 상품들과 회사들이 줄줄이 창에 떠오르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신조어들이 다양해진 것은 현재의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상품 마케팅 역시 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해진 특정 세력들을 겨냥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즉 이 시대는 다양한 개성들에 맞추는 맞춤 생산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신조어는 이처럼 작금의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기호로서 존재하면서, 동시에 산업과 만나면서 거꾸로 사회에 제시되기도 하는 마케팅의 그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신은 가만히 있지만 어느 순간, 어떤 부류로 분류될 때 그것은 자신이 이미 어느 그물 속에 들어가 있다는 얘기다. 신조어가 갖는 다양성의 놀이에 빠지는 것은 긍정적일 수 있으나, 그 상품성의 그물에 걸려드는 것은 조심해야 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신조어를 표상하는 연예인이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연예인을 지칭하는 신조어는 그 시대를 읽어내는 기호로 읽히기도 하지만, 또 거꾸로 연예 비즈니스를 위해 만들어지고 조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 영화에 부는 눈물과 웃음의 이중주

시골에서 상경해 가정부로 얹혀사는 자매. 동생의 학용품을 구하기 위해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고, 은인인 외국인 아저씨에게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버린 커튼으로 손가락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옷을 만드는 언니. 먹고 싶은 것 앞에서 유혹을 참지 못하는 동생을 구박하는 집주인 딸. '지붕 뚫고 하이킥'은 시트콤이지만 그 안에 전형적인 신파 코드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가슴 한 구석이 짠한 자매의 삶이지만, 그것이 시트콤이라는 장르 속으로 들어와 어떤 과장된 스토리를 입게 되자 주책없게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동생 신애의 학용품을 살 돈을 벌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뭐든 하려는 언니 세경의 마음은 안쓰럽지만, 그런 그녀가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간다는 과장된 설정은 웃지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눈물과 웃음의 공존. 이른바 '지붕 뚫고 하이킥'이 신파 시트콤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런 경향은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주말 드라마의 최강자로 자리한 '솔약국집 아들들'은 곳곳에 신파적인 설정들이 들어가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훈훈한 웃음이 공존한다. 가족드라마의 가장 전형적인 스토리인 혼사장애를 남성 버전으로 재해석한 이 드라마는 사형제를 내세움으로써 이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한 형제가 눈물을 짜게 만드는 신파적 상황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다른 한 형제는 코미디에 가까운 경쾌함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올 여름 극장가를 강타한 우리 영화 두 작품이 모두 신파와 웃음을 공존시키는 방식으로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해운대'는 재난영화가 갖는 신파적 스토리에 코미디에 가까운 드라마를 덧붙였다. 그러자 그 결과는 두 배로 증폭된 눈물과 웃음으로 돌아왔다. 이미 재난영화임을 알고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등장인물에 대해 긴장감을 갖게 마련이었다. 영화는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까지 이 긴장을 뒤트는 인물들의 코믹함으로 웃음을 두 배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두 배의 웃음으로 친근해진 인물들이 만드는 후반부의 눈물 역시 두 배가 되었다.

'국가대표'는 지질하다 못해 신파적인 삶을 살아가는 평균 이하의 인물들이 스키 점프라는 극한의 위치에서 오히려 뛰어 내림으로써 그 벼랑 끝의 절망을 희망의 비상으로 전화시키는 방식으로 눈물과 웃음을 엮어냈다. 지나치게 전형적일 정도로 보이는 인물들의 삶은 심지어 보는 이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 정도지만, 그런 인물들이 새처럼 날아가는 장면에서는 그 답답한 만큼의 응축된 힘을 갖게 만들었다. 웃음과 눈물이 섞이면 이처럼 양자가 모두 증폭되는 이유는 무얼까.

신파와 코미디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모두 고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파야 그렇다 치고 코미디가 어떻게 고통을 기반으로 하느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인물의 고통을 과장시키거나 희화화할 때 발생한다. 슬랙스틱 코미디처럼 본인은 넘어지고 망가지는 지점에서 상대방은 웃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코미디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즉 고통을 의도적으로 고통으로 그려내면 신파가 되지만, 그 고통을 고통 없이 희화화시키면 코미디가 되는 것이다.

눈물과 웃음의 이중주를 그려내는 이들 작품들은 바로 이 경계선을 오감으로써 신파와 코미디를 동시에 그려낸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모두 고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땅의 현실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수천 만 명씩 그 극장 문턱을 넘어서며 웃고 울었을 관객들과 TV 앞에서 깔깔 웃다가 눈물 한 방울씩 찍어내는 시청자분들. 이 시대 우리는 어쩌면 무언가를 붙들고 한없이 울고 싶거나, 잠시라도 모든 걸 잊고 맘껏 웃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이 뒤범벅된 감정을 이리저리 무한정 건드리는 이들 콘텐츠들에 쉽게 매혹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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