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과는 다른 '더 로맨틱'의 매력

'더 로맨틱'(사진출처:tvN)

'짝'은 교양다큐의 포장을 하면서 기존 '짝짓기 프로그램'과 차별점을 만들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처럼 깊숙이 일반인들의 심리 변화를 파고드는 지점은 좀 더 강하고 리얼한 스토리를 가능하게 했다. 출연자들의 스펙, 외모, 성격 등이 매회 대중들의 화제가 되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지점을 세워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현실적인 지점은 애정촌의 행동강령 첫 구절에 들어있다. '애정촌의 존재목적은 결혼을 하고 싶은 짝을 찾는 데에 있다'.

실제로 이 '결혼'이라는 현실은 '짝'이 화제가 되는데 가장 큰 요소로 작용했다. 대부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던 스펙이나 외모에 대한 경도를 슬쩍 드러냈을 때, 마치 우리들 속에 있는 치부를 본 듯한 '불편함'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불편한 진실'은 그래서 방영 후 '논란'이 되기까지 했다. 이 부분이 바로 '짝'이 가진 다큐적인 접근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녀 간의 만남을 '결혼'이라는 틀에 가두면서 생겨나는 단점도 있다. 그것은 '사랑'이라든가, '로맨스'와는 조금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된다는 점이다. 마치 자연스럽게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것과, 선을 보러 남녀가 나오는 경우 그 태도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즉 결혼을 목적으로 하면 사랑보다는 그 외의 것들 즉 성격이나 스펙, 집안 등등을 먼저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짝'에서 사랑이 주는 '설렘'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마치 '동물의 세계'의 짝짓기를 보는 듯한 차가움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1박2일'의 이명한 PD가 새롭게 들고 온 '더 로맨틱'은 그런 점에서 '짝'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지점을 밟고 있다. 먼저 '더 로맨틱'은 결혼을 굳이 전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실적인 조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치 '비포 선라이즈' 같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낯선 곳에서 우연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그 설렘에 더 집중한다. 결혼이 '정착'을 목적으로 한다면, 사랑은 오히려 '유목'을 꿈꾼다. 사랑이란 찌든 현실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닌가.

'더 로맨틱'이 굳이 10명의 청춘남녀를 데리고 아드리아해의 이국적인 풍광을 담고 있는 크로아티아까지 날아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탈주하는 것. 우리에게 여행이란 그래서 사랑과 닮은 구석이 있다. 낯설고 이국적인 공간은 현실에 갇힌 우리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여행에서의 그 신산한 경험들은 그래서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인상을 남기지만, 그것은 또한 현실이기도 하다. 즉 여행은 리얼리티와 판타지가 공존하는 지점이다.

'더 로맨틱'은 그래서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지만, 그것이 또한 리얼인 남녀 간의 설레는 로맨스를 포착하는, 기존 짝짓기 프로그램과도 또 '짝' 같은 짝짓기 리얼리티 프로그램과도 차별화되는 프로그램이다. 사랑을 꿈꾸는 미혼남녀들에게는 스펙이 난무하는 현실적인 결혼의 틀을 훨훨 벗어버리고 마음껏 로맨틱해질 수 있는 프로그램이면서, 이미 현실을 경험한 기혼자들에게는 잊고 있던 청춘의 설렘을 다시 꿈꿀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 로맨틱'이다.

물론 현실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짝'은 그 리얼함이 주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하지만 만일 사랑을 보고(찾고) 싶은 사람이라면, 우리가 흔히 여행을 통해 '영화 같은 현실'을 경험하는 것처럼 '더 로맨틱'이 주는 현실 바깥의 또 다른 로맨틱한 현실에 빠져들게 될지도 모른다. '더 로맨틱'이 기대되는 지점은 바로 이처럼 더 로맨틱 할 수 없는 이 프로그램만의 차별점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 위선적인 세상을 뒤집다

세상은 얼마나 위선적일까. 가진 자들은 뭐든 손만 뻗으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불필요하다면 언제든 버릴 수 있지만, 그렇게 돈으로 산 세계에 진심은 남아있지 않다. 그저 행복한 척 웃고 있지만 사실은 거래에 가까운 삶을 그저 버티고 있을 뿐. 그렇다면 '나쁜 남자'가 그려내는 못 가진 자들은 어떤가. 늘 가진 자들에게 당하는 순박한 존재들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도 못 가진 걸 갖기 위해 가진 자들 앞에서 가면의 사랑을 서슴없이 하는 존재들이다. '나쁜 남자'는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가진 자들의 품속에 억지로 던져져 홍태성이란 이름으로 살 뻔했으나, 곧 버려지면서 심건욱(김남길)이란 괴물이 탄생했다. 심건욱이 누군가의 위험한 대역을 대신하며 살아가는 스턴트맨이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심건욱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버린 해신그룹 홍회장(전국환)의 가족들에게 접근해서 하려는 복수극이 남다르다. 그는 폭력으로 물리적인 상처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것처럼 그들에게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기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가면의 사랑'이다. 그는 해신그룹의 막내딸인 홍모네(정소민)의 마음을 뒤흔들고, 동시에 장녀인 홍태라(오연수)에게 접근한다. 심건욱이 그토록 쉽게 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위선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홍모네는 이 돈 냄새와는 상관없는(관심이 없는) 야성적인 남자에게 빠져들고, 홍태라는 정략결혼이라는 진심 없는 삶 속에서 이 거침없는 남자에게 흔들린다.

한편 심건욱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홍태성(김재욱)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한다. 이 상황에 갑자기 이들 사이에 나타난 문재인(한가인)이 의도적으로 홍태성(사실은 심건욱)에게 접근할 정도의 속물근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러나 그녀는 심건욱이 진짜 홍태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의 진심에 끌린다. 하지만 유리가면을 구하기 위해 간 일본 출장에서 진짜 홍태성을 만나게 되면서 문재인의 마음은 갈등을 일으킨다. 가난한 진심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위선이라도 화려함을 택할 것인가. 이 양 갈래 사이에 놓인 이 드라마의 멜로는 따라서 심건욱이 하려는 복수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 그녀가 돈이 아닌 진심을 선택하는 순간, 심건욱은 어쩌면 구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복수가 될 지도.

유리가면을 홍태성이 제 어머니 앞에서 복수하듯 집어던져 깨뜨릴 때, 순간 이 모든 가면의 상황들을 깨져버리고 제 모습을 드러낸다. 홍태성에게 "네가 그렇게 깨뜨릴 물건이 아냐"하고 대드는 문재인에게 오히려 뺨을 올려 부치며 "네가 뭔데, 선을 넘어오는 거야?"하고 말하는 신여사(김혜옥). 그만큼 위선의 세계는 견고한 듯 보이지만, 던지면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가면처럼 약하기 그지없다.

'나쁜 남자'가 매력적인 것은 이 자본 위에 세워놓은 세계의 위선과 속물근성을 이 심건욱이라는 사내가 적나라하게 헤집어놓는 통쾌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이 끈이 떨어진 자신의 백을 맨 채, 명품 백을 바라보는 장면이나, VVIP고객을 위한 홍보용 콜렉션인지도 모르고 신여사에게 선물로 받은 옷을 돈 때문에 환불하는 장면에는, 자본이 만들어놓은 부에 대한 선망과 속물근성에 대한 혐오가 뒤섞여 있다.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사랑은 과연 진심인가, 아니면 또 다른 속물근성의 하나인가. '나쁜 남자'는 지금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가 '나쁜 남자'인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없는 척 쓰고 있는 유리가면을 그가 거침없이 벗겨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신데렐라 언니', 희생과 용서의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가 전한 감동에는 그저 '슬프다', '기쁘다' 같은 표현으로는 담지 못할 그 무언가가 있다. 누구든 바라보면서 그 몇 줄의 대사를 듣기만 하면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 못하게 만드는 그 감동의 실체는 뭘까. 대성도가의 주인 구대성(김갑수)이 거실 벽면에 붙여놓은 가훈, '역지사지(易地思之)'처럼, 신데렐라 이야기를 언니의 입장에서 풀어낸 그 스토리 때문에? 물론 이것이 표면적인 '신데렐라 언니'의 이야기지만 그것만으로 심지어 영혼을 건드리는 듯한 그 눈물의 실체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데렐라 언니'는 여러 차원의 눈물들을 만들어내지만 그 중심에 서 있는 단 한 명의 인물이 있다. 그것은 주인공인 은조(문근영)도 아니고 신데렐라 당사자인 효선(서우)도 아니다. 그저 제 궤도에서 살아가며 버텨내고 있던 인물들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뒤흔들고는 스스로 모든 걸 떠안고 가버림으로써 그들을 다시 한 자리로 모아 놓은 인물, 바로 구대성이다. 이 드라마에서 구대성은 자상한 남편에 아버지로서 완벽한 인간의 표상처럼 그려진다. 심지어 배신하는 아내를 보면서도 오히려 그녀를 걱정하고, 아들처럼 여기던 기훈(천정명)이 사실은 다른 목적을 갖고 대성도가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으로 죽어가면서도 그를 용서한다. 이것은 범인의 모습이 아니다. 차라리 성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공교롭게도 이야기 구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모티브를 닮았다.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통해 거의 완벽한 사랑을 전하고는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구대성은 드라마 속에서 계속해서 부활한다. 대성도가에 남은 가족들, 은조를 포함하여 효선, 아내인 송강숙(이미숙) 그리고 막내 준수는, 대성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여전히 그의 사랑을 느낀다. 그의 사랑은 대성도가 구석구석에, 그가 남긴 일기장에, 준수의 스케치북 속에도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그가 남긴 사랑의 힘은 남은 가족들을 변화시킨다. 구대성의 희생은 사랑으로 부활하고, 그것은 남은 사람들을 참회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다시 가족을 결속시킨다.

은조는 뒤늦게 대성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는 차마 부르지 못했던 이름, "아버지"를 부르며 목 놓아 운다. 독하디 독한 계모 송강숙(이미숙)은 스스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됐다"고 말한다. "뜯어먹을 게 있어 좋다"던 이제는 고인이 된 남편 구대성(김갑수)의 무차별적인 사랑 앞에 세파에 말라버렸던 그녀의 눈은 결국 눈물을 흘린다. 구대성이 전한 '대가없는 사랑'은 그대로 효선에게 똑같이 이어지고, 막내 준수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심지어 자신으로 인해 구대성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죄의식을 가진 기훈은 이제 그 희생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이 희생함으로써 대성도가 사람들을 살리려 한다.

이 우리의 가슴 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희생과 용서에 관한 원형적인 이야기가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것은 당연한 일. '신데렐라 언니'는 그런 의미에서 희생과 용서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구대성이 희생을 통해 전한 사랑으로 인해, 남은 이들은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송강숙이 친구의 딸이 자신의 엄마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고 "그게 그렇게 속상해? 미안해. 그게 그렇게 속이 상하는 줄. 어린 것이 그렇게 피눈물 흘리는 줄 어떻게 알았겠냐. 미안해. 미안해."하고 말할 때, 그녀의 앞에는 또한 은조가 서 있었을 것이다.

툭하면 "마귀할멈!"이라고 독한 소리를 해대는 준수의 스케치북에서 가족들 그림 속에 자신만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쩌면 은조는 준수의 독한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늘 웃고만 있는 기훈의 눈물을 보고는 "이제 나한테 기대"라고 말했을 때, 거기서 은조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바락바락 소리를 치면서도 절대 기대려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대성이 남긴 가훈, '역지사지'처럼, 서로가 서로의 입장이 될 때, 그들은 드디어 누구의 엄마이고 누구의 딸이며 누구의 자매이고 누구의 애인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껴안게 된다.

구대성의 희생적인 사랑이 남은 사람들을 서로 용서하게 만들고,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기대게 하는 이 드라마는, 은조의 표현대로, "뭔가 딱딱하게 뭉쳐져 있었던" 것을 녹작지근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무기력할 정도로 약하디 약한 우리네 인간이 살 수 있는 힘은 어쩌면 그 거대한 사랑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 속에서 타인을 자신처럼 이해하면서 똑같은 가녀린 존재로서 서로를 기대는 일일 것이다. 비록 신데렐라 이야기의 모티브를 빌려왔지만, '신데렐라 언니'가 그토록 깊은 울림을 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이 격렬하면서도 아름다운 문학 같은 드라마가 주는 울림을 온전히 시청자들에게 전한 건 이른바 진정성으로 무장한 연기자들의 연기 덕분이다. 우리는 문근영을 통해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며 목 놓아 울던 은조를 이해하게 됐고, 서우를 통해 미움조차 이겨내지 못하던 사랑만 알던 효선의 성장을 보게 됐고, 이미숙을 통해 처절한 삶 속에서 사랑 없이 살아오다 덜컥 사랑을 알아버린 송강숙을 바라보게 됐고, 김갑수를 통해 자신이 부정당하면서도 결국은 모두를 끌어안은 그 큰 사랑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됐다. 또한 천정명의 여전히 소년 같은 미소와 택연의 마음까지 밝게 만드는 웃음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빙의된 연기가 있어 가능했다. '신데렐라 언니'가 전하는 결코 범상치 않은 큰 사랑의 이야기는.

'나는 별 일 없이 산다'가 던지는 질문

"살려고 그런 단 말야. 나도 살아야할 거 아냐!" 드라마 '나는 별 일 없이 산다'에서 황세리(하희라)는 늘 삶에 사기당하며 살아온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이제 자신이 누군가를 사기 쳐야 하는 이유로, '그래도 살아남아야 함'을 든다. 한편 나이 칠순에 접어든 신정일(신성일)은 "구차하게" 살아야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의 삶은 집사람이 떠나면서 그 의미를 잃었다. 한 사람은 그저 관성적으로 살아남으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살 이유를 찾지 못하지만, 사실 두 사람의 정조는 같다. 의미 없는 삶. 그들은 '별 일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 앞에 갑자기 동네 깡패가 나타나 위협을 한다. 쌍팔 년도 멜로에나 등장할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시퀀스. 하지만, 겉으론 '별 일 없이' 살지만, 속은 절망적인 이 노년과 중년여성을 만나자 특별해진다. "야. 이놈들아 나 말기암환자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너희들 손에 죽으나 매한가지야."하고 외치는 노년 남자. 그리고 "그래 이 새끼들아. 나도 겁날 거 없어. 막장인생이야. 이혼 두 번에 자식새끼도 앞세워 죽인 재수 더럽게 없는 년이야."라고 응수하는 중년 여자. 마치 '별 일 없는' 삶에 지쳤다는 듯, '별 일 좀 벌려보라'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 한 구석을 찌른다.

나이 칠십이면 말기암 판정을 받고도 담담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하루하루의 삶이 버텨내는 것이 되어버린 신정일에게 말기암은 그다지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고 기다려주는 아내가 있길 하나, 그렇다고 노년을 흡족하게 해줄 자식이 있길 하나. "늙으면 돈이 최고"라고 외치는 조회장 같은 속물도 있지만 신정일에게 돈은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넌 돈이면 다냐"고 물을 정도로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동병상련이라고 아직은 젊은 나이에 인생의 험한 꼴을 많이 당한 자칭 막장인생 황세리가 신정일의 마음을 보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외로울 때면 그 외로움을 털어내기 위해 혼자 추는 춤을 둘이 함께 추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함께 추는 짧은 춤사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죽는 순간까지 이렇게 웃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신정일에게 사랑은 그처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이것은 아무도 주변에 남지 않고 절망만이 남은 채, 승무원이 되어 아무도 없는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뉴욕과 파리가 뒤섞인 꿈을 꾸는 황세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느 밤 문득 외로움을 느낀 그녀는 신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함께 외로워요."

'나는 별 일 없이 산다'가 보여주는 사랑은 그래서 겉보기엔 노년에 주책없이 찾아온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좀 더 본질적인 사랑에 가깝다. 젊은 나이의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이들의 사랑이 청춘의 봄에 찾아드는 아지랑이 같은 사랑이라면, 이 지긋한 나이에 이제는 가질 것보다 놓아야 할 것이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은 그 유한함 앞에서 그저 그 한 순간 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해지는 사랑이다.

사실 '별 일 없이 사는' 이들이 나이 지긋한 노년의 삶들뿐일까. 장기하의 '별 일 없이 산다'가 젊은 세대들의 고통과 좌절을 복수하듯 반어법으로 노래하는 것처럼. 극중 신정일이 자식에게 말하듯, 나이는 먹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할 것이 없어질 때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별 일 없이 사는 삶'은 삶이 아니다. 그리니 여기서 말하는 '별 일'이란 사랑은 물론이고 사회적 의미로서의 행복과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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