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충돌, 미션으로 승부

'선덕여왕'이 아역들을 떠나보내고 성인연기자들을 본격적으로 출연시켰다. 사실 드라마에서 아역의 존재는 가능성이면서도 그 자체로 위험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아역이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배역과 시간의 변화로 인해 반드시 이미지의 충돌이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처럼 어린 덕만(남지현)이 호연한 드라마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성인 역할을 맡은 이요원이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지금껏 가녀린 이미지의 역할을 해온 이요원으로서는 그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연기변신을 해야 하는 숙제까지 떠안았다. 본인 스스로 그런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가 지긋지긋하다고 밝혔을 정도로 그녀에게 이 역할을 모험이자 기회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생각보다 아역에서 성인역으로 넘어온 덕만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이미지의 충돌은 덜한 편이다. 심지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모습에서는 어린 덕만의 모습이 중첩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런 무난한 느낌을 주는 데는 물론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 이요원의 자세가 가장 큰 몫을 차지했지만, 드라마의 긴박한 이야기가 가진 힘이 작용한 결과임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먼저 덕만은 극 중에서 남장여자의 캐릭터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요원에게서 여성적인 면모를 지워낼 수 있는 기본전제를 제공한 셈이다. 그 중성적 배역이 연기자에게 주는 낯선 힘은 이미,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은찬(윤은혜)이나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문근영)을 통해 입증된 바이다.

여기에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스토리는 계속 되는 미션 제시로 재빠르게 성인 연기자들을 배역의 새로운 이미지로 정착시켜 나갔다. 화랑들 간의 대결구도를 전면에 내세웠고, 그 속에 백제와의 전쟁을 중첩시킴으로써 '선덕여왕' 특유의 미션사극이 가진 힘을 이미지 변신의 한 과정으로 활용해나갔다. 이로써 미션의 제시와 그 해결과정이 주는 캐릭터의 성장은 성인 연기자들에 와서도 여전히 진행형이 되는 셈이고, 이것은 현재 보여진 이미지(아역에서 넘어와 아직은 낯선)가 앞으로도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미션의 제시는 가녀린 여성 캐릭터에 강인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일찍이 김영현 작가는 '대장금'에서 그 가녀린 이미지의 이영애를 누구보다 강한 이미지로 만들어낸 경험이 있다. 즉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캐릭터에 끝없이 고난과 역경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요원은 지금 바로 그 첫발을 디디고 있는 셈이고, 그 결과는 무난한 편이다. 이요원이 이처럼 차츰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통해 기존 가녀리기만 했던 이미지를 벗어버릴 수 있게 된다면, 이 사극은 미실 역할의 고현정에 이어 또 한 명의 연기변신을 선보이게 되는 셈이다.

물론 이 사극의 성인연기자로의 재배치에 남은 숙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의외로 그것은 덕만 역할의 이요원에게서보다는 김유신 역할의 엄태웅과 천명공주 역할의 박예진에서 발견된다. 엄태웅은 이미지 자체가 너무 강해서 어린 아역과의 부조화가 크게 나타난 면이 있고, 박예진은 그 역할 자체가 새로운 미션을 제시받지 못함으로써 현재 모습이 성장의 과정이 아닌 고정된 이미지로 보이게 되는 부담이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모든 숙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스토리 속에 그 열쇠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스토리는, 어린 아역의 이미지를 그저 성인들이 물려받았다는 오해를 불식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아역에서 성인연기자로 넘어오며 생겨나는 문제는 물론 연기자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성인연기자가 가진 캐릭터가 성장하는 아역과 달리 성장을 멈추는 데서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미션사극의 정점을 보여주는 ‘선덕여왕’

“생(生)을 고르면 살고 사(死)를 고르면 모두 죽는다.” 금지시킨 차 교역을 한 죄로 끌려온 덕만(남지현)은, 자신과 일행들의 목숨을 건 제후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이미 어느 돌이든 모두 사(死)임을 알고 있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 수수께끼가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순간, 덕만이 자신이 선택한 돌을 꿀꺽 삼켜버리고 제후의 나머지 돌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으로 미션을 해결한다. 그러자 긴장이 풀리면서 어떤 문제를 풀었을 때 갖게 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이로써 덕만의 레벨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이것은 기본적인 '선덕여왕'의 '미션제시-해결'의 이야기 구조. 이 미션사극을 움직이는 강력한 주동력이다.

이중으로 겹쳐져 있는 위기의 미션
일종의 미션을 제시하는 것이 '선덕여왕'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미션 속에 제시되는 주인공의 위기는 여타의 사극보다 이중 삼중으로 겹쳐지는 특징을 가진다. 사막까지 쫓아온 자객을 피해 달아나는 미션에서도, 또 우여곡절 끝에 만난 덕만과 천명(신세경)이 설지(정호근)와 그 무리들에게 붙잡혀 팔려갈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미션에서도, 또 겨우 도망쳐 나와 절벽에서 천명의 손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가 살아나오는 미션에서도 이러한 위기는 또 다른 위기와 겹쳐진다.

발을 잘못 디뎌 유사(모래수렁)에 빠져버린 양어머니 소화(서영희)를 잃을 위기에 처한 덕만은 마침 나타난 자객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비를 내려야만 살아나갈 수 있는 설지의 마을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게 될 즈음, 미실이 파견한 토벌군에게 쫓기게 된다. 절벽에서 덕만과 천명이 서로의 생명줄을 잡고 안간힘을 쓰는 상황에서도 토벌군의 추격은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늘 해법은 제시된다. 때 아닌 모래폭풍이 덮치고, 안오던 비가 내리고, 늘 도움만 받아왔던 천명이 오히려 덕만을 구해낸다.

해결책은 의외로 싱겁지만, 그것은 하늘의 기운을 타고난 이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위기가 이중삼중으로 겹쳐 있다는 것, 그것이 사극의 힘을 만드는 진짜 힘이 된다. 이것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미션사극의 핵심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사극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 결말이 뻔한 사극에 빠져드느냐고?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닌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그 결과에 이르는가, 그것이 미션사극이 제시하는 가장 큰 재미요소라고 볼 수 있다.

미션사극이 성공하기 위해 가져야할 기본 전제
'선덕여왕'의 초반부를 끌어가는 힘을 미실(고현정)이라는 강력하고도 매력적인 악역에 둔 것 역시 이 사극의 다분히 의도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션사극은 도달해야할 지점이 현재 주인공이 있는 지점에서 멀면 멀수록 더 힘을 발하기 마련이다. 도달해야할 지점인 권력의 정점에 미실을 세워두고 신라도 아닌 중국 이역 땅에 덕만을 배치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먼 곳에서부터 점점 중심으로 다가가는 덕만이 해나가는 미션들은 그 거리만큼 더 폭발력을 갖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덕만이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미션들이 가진 단순함이다. 미션사극은 우리식 사극에 저 미드가 가진 스토리 전개를 접목한 것. 하지만 50부작에 이르는 우리네 사극이 저 미드만큼 꽉 짜여진 미션들을 갖고 있다면 이처럼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선덕여왕'의 미션들은 물론 뒤따르는 미션과의 연결고리를 갖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만큼 얼개를 느슨하게 가져감으로써 시청자들의 부담을 줄이는 것. '돌 뽑기 미션'이나 '사막 추격 탈출 미션'은 연결점 없이 각각의 것으로 존재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 미션들을 해결함으로써 어떤 성장의 과정을 그려내는 덕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따라서 좀 더 편안하게 각각의 미션을 즐기는 것으로 사극에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것은 '대장금'에서도 익숙하게 보아왔던 김영현 작가표 사극의 파괴력이다.

‘선덕여왕’, 미션사극의 새로운 정점
미션사극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이병훈 PD의 필모그래피에서 미션사극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조망해볼 수 있다. 99년도에 방영되었던 ‘허준’과 2001년도 방영된 ‘상도’는 미션사극이 가진 가능성을 촉발시켰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최완규 작가일 것이다. 최완규 작가가 이병훈 PD와 함께 ‘허준’, ‘상도’를 통해 우리식 사극에 미드 식 전개를 붙여 미션사극의 바탕을 만들었다면, ‘대장금’에 이르러 그 바톤을 이어받은 후배 작가 김영현은 여기에 여성적인 색채를 가미하면서 사극의 시청층 자체를 넓혀놓았다.

‘선덕여왕’은 김영현 작가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능수능란한 여성이 주인공인 미션사극이다. 따라서 현재 미션사극의 정점으로서 ‘선덕여왕’이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 사극의 성공에 작가의 공만이 있을까. 미션 사극에 있어서는 그것을 연기해내는 연기자들의 몫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양 극점에 선 인물들이다. 미션을 제시하는 자와 그 미션을 수행하는 자가 균형 잡힌 대립각을 이룰 때, 미션사극의 힘은 폭발적으로 커질 수 있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을 연기하는 고현정과 덕만을 연기해온 남지현의 호연은 바로 그 대본이 가진 힘을 배가시켰다.

올해 사극이 새롭게 꺼낸 ‘여걸’이라는 카드에도 불구하고, ‘천추태후’나 ‘자명고’가 거둔 성과가 미미한 반면, ‘선덕여왕’이 단 몇 회만에 폭발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미션사극이라는 흥미로운 대본의 공이 크다. 이제 막 초반을 달리고 있는 ‘선덕여왕’은 아직도 그 파괴력의 끝을 알기가 어렵다. ‘주몽’은 한때 월화의 밤을 장악한 이래, 한동안 동시간대 타방송사의 드라마들이 맥을 추지 못하게 했다. 탄력을 받은 사극을 현대극으로 맞받아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이산’이 등장했을 때 SBS는 ‘왕과 나’로 맞불을 놓았었다. 하지만 ‘자명고’가 사극으로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선덕여왕’의 독주는 막을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선덕여왕’의 폭발력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사극에서 아역이 주목받는 이유

'선덕여왕'의 초반 상승세가 예사롭지 않다. 그 중심에 선 인물들은 미소 속에 숨겨진 섬뜩한 악역 미실(고현정)과, 그 정 반대편에 서서 어린 시절을 사막에서 보내고 있는 어린 덕만(남지현)이다. 미실은 이 사극이 앞으로 수행해 나가야할 전체 미션에 무게를 실어주는 역할을 하고, 어린 덕만은 조금씩 그 미션을 향해 나아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극의 시점이 악역이 아닌 선한 우리 편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주목받는 인물은 덕만일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사극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은 아역에 실리는 엄청난 무게감이다. '태왕사신기'에서 어린 담덕 역할을 통해 유승호라는 배우를 얻었던 것처럼, '선덕여왕'의 어린 덕만을 통해서 남지현이란 배우를 얻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거대한 운명을 다루는 사극의 스토리 속에서 그 운명의 첫 걸음을 걸어 나가는 아역은 그 자체로도 특별한 아우라를 갖게 마련이다.

이들은 탄생부터 신화적이다. '태왕사신기'의 담덕이 쥬신의 왕이 될 운명을 점지해주는 왕의 별과 함께 태어난 것처럼, '선덕여왕'의 덕만은 '일곱 개의 북두칠성이 여덟이 될 때 미실에 대적할 영웅이 나타난다'는 신탁을 받고 태어난다. 그리고 이 신탁은 탄생부터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덕만이 선덕여왕이 된다는 것은 이미 사극의 시작부터 예고되는 일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덕만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자리에 오르느냐가 되기 때문이다.

어린 덕만은 탄생의 신탁이 주는 아우라와, 후에 선덕여왕이 된다는 기정 사실이 주는 아우라를 모두 갖고 사극에 등장한다. 그 성장과정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어린 덕만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자들로부터 도망쳐 지내고 있는 중국의 사막과 훗날 돌아와 여왕의 자리에 오를 신국(신라)과의 거리만큼 덕만에 대한 기대감은 커지기 마련이다. 어린 덕만은 기대감에 부응할 만큼 남다른 지혜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 '돌 뽑기 미션'이나 서역 상인들과의 자유로운 교류 등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를 여전히 쫓는 터미네이터 같은 자객과의 대결은 어린 덕만의 존재감을 더욱 높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캐릭터에 부여된 아역 덕만이 갖는 매력을 그걸 맡은 연기자가 100% 소화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남지현은 그런 면에서 그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는 배우로 주목된다. 특별히 연기하는 것 같지 않는 천진함에 절절함이 묻어나는 눈빛을 보여주는 남지현은 어린 덕만이 겪어야 하는 고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씩씩한 태도를 제대로 연기해 내고 있다. 이로써 사실상 사극의 한 축을 이루어야 하는 선한 우리 편의 존재감은 확실히 살아나고 있고, 이것이 미실의 악역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이 사극의 초반 시청률 상승의 주원인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최근 들어 이처럼 사극에 아역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사극이 부여하는 아역에 대한 기대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며, 또 한 편으로는 그걸 연기해내는 아역들의 연기력이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의 성인 역할을 할 이요원은 어쩌면 남지현의 아역 연기를 통해 한층 부담을 느끼게 된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극을 통해 마치 배우의 운명을 신탁 받은 것 같은 또 한 명의 아역 연기자를 얻었다.

연기 변신에 성공한 배우들, 작품도 살린다

배우의 변신은 무죄? 아니 이제는 필수다. CF퀸의 이미지 속에 갇혀 지냈던 김남주에게 약간은 푼수에 무식을 양념으로 얹은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라는 캐릭터는 구원이었다. 아낌없이 무너지는 천지애를 통해 김남주는 이제 제2의 연기 인생에 접어들게 되었다. 순수의 아이콘으로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던 고현정은 수차례에 걸친 연기 변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땅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영화로는 '해변의 여인'으로 드라마로는 '여우야 뭐하니'로 일상적인 맨 얼굴을 대중들 앞에 내밀었고, '히트'를 통해 가녀린 이미지에 강인함을 덧붙였으며,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이제 깨는 모습으로 개그맨을 웃기기까지 했다. 그녀가 '선덕여왕'의 악녀 미실을 연기한다는 사실은 그녀의 스타로부터 배우로의 연착륙이 이제 모두 안전하게 끝났다는 걸 말해준다.

'내조의 여왕'의 남자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변신에도 어떤 단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가 뭐래도 남자 배우들 중 가장 주목받은 캐릭터는 태봉(윤상현)이고 그 다음이 준혁(최철호)이며, 마지막이 달수(오지호)다. 윤상현은 '겨울새'로 먼저 얼굴을 알렸고, '크크섬의 비밀'에서 어떤 이미지를 형성했지만, 사실상 그의 캐릭터를 확고하게 심어준 것은 '내조의 여왕'의 태봉이다. 하지만 윤상현의 인기는 태봉이라는 캐릭터가 부여하는 점이 많다. 따라서 이 갑작스레 부각된 스타는 이제 다음 작품부터 배우로서의 시험대에 올라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캐릭터를 선택하면 인기는 유지되겠지만 배우로서의 길은 더 멀어질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연기 변신만이 배우로서의 생명을 오래 보장받는 길이 된다.

한편 준혁 역할을 해낸 최철호는 이번 연기를 통해 변신에 성공함으로써 또 하나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야인시대', '장길산', '불멸의 이순신', 그리고 '대조영'까지 시대극에서 주로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그가 주목을 받은 것은 '천추태후'의 초반부에 잠깐 등장한 경종 역할이었다. 여기서 그는 광기어린 연기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처럼 강렬한 인상은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준혁이라는 코믹한 역할은 최철호에게서 그간 없었던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어주었다. 이제는 광기어린 얼굴 뒤에 코믹한 이미지를 안전장치처럼 달고 있으니 이런 연기변신을 가능케 해준 '내조의 여왕'은 최철호에게 연기자로서의 날개를 달아준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익숙한 캐릭터를 반복한 달수 역할의 오지호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것과 상반된 결과다. 연기 변신이 필요한 시기에 변신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연기자 개인에게도 부담이지만 그 드라마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남자이야기'의 박용하가 그렇고 '자명고'의 정려원이 그렇다. 박용하는 거친 남자로의 이미지 변신을 꿈꾸었지만 부드러운 남자로서의 이미지를 넘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사극이라는 옷이 부담스러운 정려원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물론 모든 연기자가 변신을 요구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시티홀'의 김선아와 차승원은 새로운 옷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의 연기를 통해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경우는 아직까지 그들이 가진 자신의 고정 이미지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변신이 어렵다면 이처럼 자신의 옷에 가장 잘 맞는 작품 선정에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늘 같은 모습으로는 식상한 연기로 추락하게 된다. 박중훈이 똑같은 이미지를 고수해도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변주해온 것은 그 오랜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다. 비슷해도 조금씩 성장하는 느낌의 작은 변신은 늘 필요한 법이다.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것이 직업인 이상, 늘 같은 모습만 보여준다면 어찌 그 직업을 배우라고 할 수 있을까. 배우의 변신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그리고 그 변신을 위한 각고의 노력은 결국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대중들에 의해 보상받기 마련이다. 이른바 '되는 드라마'의 대부분에서 이 배우들의 연기변신을 목도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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