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라는 용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다. 그 용어는 주로 최루성 멜로물, 자극적인 설정 남발, 뻔한 소재와 스토리 전개처럼 구태의연하고 식상한 스토리텔링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 현재의 작품을 얘기할 때, 신파적이라는 말은 절대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부정적인 의미의 신파 코드들이 여전히 문화 전반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고, 때로는 호평받는 작품 속에서도 발견되며, 심지어는 이 코드를 버리고서는 대중성을 얻기가 어렵다고까지 말한다.

시청률 45%를 넘긴 국민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흔히들 착한 드라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호칭은 작가 스스로도 밝혔듯이 애매한 구석이 많다. 이 드라마는 물론 주제가 착하지만, 드라마의 극적 구성으로 보았을 때 여타 자극적인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탓이다. 아무리 계모라 해도 남편이 죽자(실은 살아있지만) 자식을 내치고 그 유산을 가로채고, 그것도 모자라 정신지체인 은성의 동생 은우까지 멀리 내다버리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에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은 자극이다.

그런데 이 극과 극을 치닫는 대립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른바 신파 코드(이것은 신파라기보다는 신파적인 코드들을 활용하는 것을 지칭한다)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계모에 의해 버려졌지만 착한 심성으로 하늘이 도와 결국, 잘 살게 되는 이야기 구조는 우리네 고전적인 이야기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으로, 신파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찬란한 유산>의 고은성이 계모 백성희로부터 버려지지만, 그 착한 심성으로 거의 신적인 존재인 장숙자 여사(반효정)의 구원을 받는(게다가 왕자님인 선우환(이승기)까지!) 이야기는 소재적으로나 극적 구성에 있어 신파 코드를 잘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파 코드의 활용은 이미 우리네 드라마에서 흔한 것들이다. 대표적인 신파 코드인 출생의 비밀은 최근 드라마들만 예로 들더라도 쉽게 발견된다. 시대극을 표방한 <에덴의 동쪽>이 그렇고, 다시 리메이크된 <미워도 다시 한 번> 역시 그러하며, 심지어 최근 방영되는 사극 <선덕여왕>이나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는 <태양을 삼켜라>에서도 이 코드는 여전히 유용하게 활용된다. 그 이유는 그 신파적인 코드가 자극적인 감정 분출을 쉽게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유행했던 막장 드라마는 바로 이 자극적인 감정 분출의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파적인 코드들, 예를 들면 출생 비밀, 불륜, 불치 같은 소재들을 섞어 심지어 개연성을 무시하고 나열했던 드라마들이다.

한때 이러한 신파 코드들이 활용되는 드라마들이 외면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른바 트렌디물이라 불리던 멜로 드라마들의 퇴조와 미국 드라마(미드) 열풍으로 일어난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환호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과연 신파적이고 트렌디한 멜로 드라마는 사라졌을까? 잠깐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상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호응은 낮았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으로는 감정 과잉 드라마가 식상하다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감성적으로는 바로 그러한 드라마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현재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은 이제 미드식의 장르 드라마를 구사하면서도 그 안에 우리식의 신파 코드를 반드시 끼워 넣는다. <카인과 아벨>은 의학 드라마에 가정 비극(이 코드는 <찬란한 유산>과 유사하다)을 넣었고, <태양을 삼켜라>는 액션 드라마에 트렌디한 멜로 구조를 끼워 넣었다.

신파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느낌을 주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신파가 주로 다루는 감정의 분출을 근간으로 삼는 콘텐츠들은, 드라마는 물론이고 연극, 소설, 대중음악 등에서도 하나의 지류를 이루고 있다. <친정 엄마와 2박3일> 같은 연극은 암에 걸린 딸이 친정 엄마를 찾아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전형적인 신파조의 극으로 연일 매진 사례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신파가 가진 부정적인 의미들 즉, 틀에 박힌 대사나 연출 등을 벗어나 같은 소재라도 새롭고 진지한 접근을 하려는 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2009년 상반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 역시 바로 이런 시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신파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신파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신경숙 작가의 스토리텔링에 대중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또한, 대중음악에 있어서 신파적인 코드들은 주로 외환위기 시절에 활용되었었다. 조성모의 <아시나요>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나중에 등장한 이른바 소몰이 창법들의 창궐과 퇴조는 신파 코드가 가요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대변해 준다. 현재 발라드 가수들은 여전히 신파 코드가 담겨진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예능 프로그램 출연 같은 웃음의 코드를 동시에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가수가 트리플 크라운(드라마, 가요, 예능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이승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분야 진출은 다양한 감정의 분출을 통해 캐릭터의 균형을 잡아준다. 이것은 마치 <찬란한 유산>이 구사한 감정의 양면 전략과 유사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드라마는 물론이고, 연극, 소설, 대중가요에까지 신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늘 어떤 시기에 새로운 옷을 입고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파가 가진 어떤 힘이 우리네 문화 속에서 그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한국식’이라는 수식어를 즐겨 사용한다. ‘한국식’ 블록버스터, ‘한국식’ 액션, ‘한국식’ 의학 드라마 등등. 그런데 여기서 ‘한국식’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네 정서 속에 자리한 특유의 ‘감정 중심 문화’와 ‘특유의 끈끈한 관계의 문화’가 들어 있다. 우리는 아직까지 할리우드식의 아드레날린 과잉의 드라마나 영화에 익숙하지가 않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끈끈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폭풍, 혹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콘텐츠에 더 익숙하다. 외국의 문화 콘텐츠들이 하드보일드한 감정 배제의 스토리텔링을 할 때, 우리는 끝없이 감정을 터뜨리고 끌어올리는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이것은 볼거리 위주의 콘텐츠들이 갖는 대규모의 투자와 대규모의 소비로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우리네 문화 산업의 특징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는 볼거리보다는 그 속에 있는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물량 투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작품은 물론이고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문화 콘텐츠는 여전히 인력에 의지하는 산업이다.

흔히들 신파라고 말하면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마련이다. 그 상투적인 설정과 뻔한 스토리, 게다가 그런 스토리에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리고 나면 이성적인 문화의 소비자들은 도리어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감정에 치중하는 우리식의 문화 경향을 모두 후진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스토리텔링이란 그 나라의 문화적 특징을 부정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감정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갖는 힘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흔히 신파라고 했을 때 갖게 되는 부정적인 인상을 제거하면서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발전적인 것이 아닐까.(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캐릭터 자체의 매력과 스토리텔링이 만드는 기대감

'선덕여왕'에 비담(김남길)이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든 시간은 얼마일까. 짧게 말하면 1초도 걸리지 않았고, 길게 말한다 해도 10분을 넘기지 않았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맨발만 살짝 드러냈을 때, 그리고 빛으로 나와 예사롭지 않은 얼굴로 하품을 해댈 때, 덕만(이요원)을 향해 찡긋 윙크를 했을 때 그는 이미 범상치 않은 고수의 캐릭터로 우리들 마음 속에 들어와 있었다. 후에 덕만을 해치려는 무리들을 향해 무차별 칼을 휘두르는 장면은, 이미 시청자들의 마음에 구축된 캐릭터를 확인시켜 주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선덕여왕'의 제작진이 비담을 비밀병기라고 공공연히 발표한 시점은 작품이 시작하기도 전부터였다.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이 얘기는 그저 지나가는 얘기처럼 들렸다. 하지만 20회가 지난 시점에서 비담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비밀병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선덕여왕'이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하고 활용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선덕여왕'은 주제를 함축하고 스토리를 굴러가게 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내고는, 그것을 특유의 미션식 스토리텔링 속에서 가장 극대화되는 지점에 순차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캐릭터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나가고 있다.

'선덕여왕'이 만들어내 첫 번째로 선보인 캐릭터는 미실(고현정). 이 매력적인 캐릭터는 모든 갈등과 구조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이 사극의 뼈대에 해당하는 캐릭터다. 강력한 악역으로서의 미실이 구축된 후, 그녀로 인해 중국으로 도망친 어린 덕만이 고개를 내민다. 당돌하면서도 착하고 때론 대담하면서도 남다른 영민함이 보이는 이 캐릭터는 미실과의 격차를 드러내면서 차츰 대립각을 만들어낸다. 덕만이라는 캐릭터가 미실에게 근접하고 그 미실을 누르는 과정이 이 사극의 전체 얼개라면 이때 이미 이 사극의 방향성은 만들어진 셈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천명(박예진)과 유신(엄태웅)으로 이들은 각각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어 보이는 미실과 정면승부를 예고하며 부각되었다. 즉 미실의 캐릭터를 통해 구축된 이 캐릭터들은 정치적인 상황 보다는 대의 그 자체에 몰두하는 것으로 미실의 정치 장악력을 벗어난다. 한편 미실 측은 그들대로 새로운 캐릭터들을 구축하며 진영을 갖춘다.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그 카리스마를 보여준 설원공(전노민)이 무인이면서도 동시에 지략을 갖춘 캐릭터로 등장하고, 미생(정웅인)은 미실의 일식을 이용한 깜짝쇼를 구상해내고 때론 미실의 심중을 정확히 읽어내는 면모를 보이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부차적인 인물들이 다만 부차적으로만 활용되지 않는 것은 '선덕여왕'이 가진 캐릭터들의 가장 큰 장점이다. 사막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소화(서영희)와 칠숙(안길강)이 궁으로 돌아와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궁의 인물들과 그들이 가지는 일련의 만남들에 극적인 상황을 제공했다. 칠숙과 덕만의 만남, 칠숙과 미실의 만남, 미실과 소화의 만남... 이런 식으로 극은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사극의 감초로서 죽방(이문식)과 고도(류담)는 극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극을 만들어가는 역할도 수행해낸다.

중요한 것은 이 많은 캐릭터들이 덕만을 중심으로 잘 꿰어져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덕만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그다지 복잡하지 않게 드라마를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덕만을 위기로 몰거나, 혹은 도움을 주는 캐릭터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덕만을 움직이게 만든다. 캐릭터들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이처럼 이 사극이 가진 캐릭터 장악력과 거기서 비롯되는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 능력 때문이다. 사실상 캐릭터들은 창조되는 그 순간부터 저마다의 숨겨진 이야기를 하나씩 이상은 갖고 등장한 셈이다.

마찬가지로 비담의 등장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그 캐릭터 속에 내장된 앞으로의 이야기를 첫 등장에서부터 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사에 무심한 듯 보이며, 뛰어난 무공을 갖추고 있지만 어느 편에 붙을 지 종을 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아군이라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 되지만, 적이라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덕만의 입장에서 사극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비담이란 존재가 주는 무게감은 따라서 클 수밖에 없다. 그가 미실의 버려진 아이라는 점은 이 상황을 더 흥미진진하게 한다. 혈육으로서의 입장은 버려졌다는 입장과 상충하며 비담이라는 캐릭터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선덕여왕'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바로 이 범상치 않은 캐릭터들과 그 캐릭터의 운용으로 만들어지는 스토리텔링에서 나온다. 가장 적확한 스토리의 시점에서 가장 매력적인 성격의 캐릭터라면, 그것이 구축되는 데 드는 시간은 어쩌면 단 1초면 충분한 지도 모른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 속에 척척 달라붙는 캐릭터의 힘, 그것이 '선덕여왕'이라는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선덕여왕'의 고현정, '드림'의 박상원, '스타일'의 김혜수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은 주역은 아니지만 이 사극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사극은 바로 이 미실이라는 악역 캐릭터에서부터 그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그 힘으로 굴러가며 주역은 물론이고 주변인물들까지 이 캐릭터에 의해 창출되고 움직여진다. 이 사극이 가진 미션의 목적 자체가 바로 이 절대 권력의 소유자인 미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미실을 연기하는 고현정은 어쩌면 이 사극의 가장 중요하고도 힘겨운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야 극은 흥미진진하게 흘러갈 수 있다.

이것은 '드림'의 강경탁(박상원)이란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드림'이 스포츠 에이전트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로서 그 핵심적인 틀이 복수극에 있다면, 그 틀을 쥐고 있는 인물은 강경탁이다. 비정하고 철두철미한 이 악역은 청춘을 온전히 바쳐 개처럼 일해 부와 명예를 쌓아온 남제일(주진모)을 저 바닥까지 내치는 인물이다. 이로써 남제일은 이 드라마 속에서의 미션을 부여받는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저 스스로 스포츠 에이전트로서 성공해 강경탁을 무릎 꿇려야 한다. 따라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강경탁을 연기하는 박상원은 이 드라마의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주말 드라마, '스타일'의 박기자(김혜수)는 이 드라마 속에서 도무지 넘어서기가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악역이다. 직장상사의 표상처럼 과장되게 그려지는 이 박기자는 이서정(이지아)이라는 말단 직원의 캐릭터를 구축해주는 인물이다. 박기자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는 이서정은 이로써 그녀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서정의 성장 드라마로도 볼 수 있는 이 '스타일'에서 박기자는 그 성장의 동기를 제공한다. 박기자 역할의 김혜수가 그 어떤 주역들보다 돋보이고 중심축에 서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고현정이나 박상원, 김혜수 같은 이제는 중견이 된 연기자들이 매력적인 악역으로 돌아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악역이란 드라마의 척추 같은 역할을 한다. 극을 만들어내고 극을 움직이게 하며 심지어 거꾸로 주역을 이끌어가기도 하는 악역이 주역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역할을 맡으면서도 악역이라는 이유로 자칫 꺼려할 수 있는 이 배역을 기꺼이 끌어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여전히 주역을 맡아도 빛날만한 자신들만의 아우라를 가진 연기자들이 아닌가.

연기자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스타라는 허울보다는 연기자라는 실재에 더 몰입하는 것은 실로 중요하다. 이것은 중견 연기자라는 칭호를 받는 그들에게도 그렇지만, 우리네 드라마 전체의 성장을 위해서도 그렇다. 한때 청춘스타들로 빛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연기자들은 어찌 보면 우리 드라마의 큰 손실이기도 하다. 그들이 기꺼이 스타의 스포트라이트보다 드라마의 척추 역할로 돌아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한류스타라는 빛 속에 여전히 서서 그 언저리를 배회하는 연기자들이 외면당하는 것은 이처럼 큰 틀 속에서 자신이 해야할 역할보다는 여전히 하고 싶은 역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의 드라마를 보는 시각은 그만큼 성숙해졌다. 그들은 이미 드라마 속에서 악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그 악역 속에서 어떤 매력을 발견해내 기꺼이 박수를 쳐준다. 드라마의 성패가 그 드라마를 움직이는 매력적인 악역의 발굴에 있다고 볼 때, 어쩌면 이런 선택을 하는 중견 연기자들의 어깨 위에 우리네 드라마의 향방이 달려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력적인 악역의 중견들, 그 의미있는 귀환은 주목받고, 박수받을 만한 일이다.

감초 연기의 대가 이문식, '선덕여왕'이 재발견한 감초, 류담

"니들 위장이란 거 해봤어? 안 해봤으면 말을 말어." '개그콘서트' 달인 코너의 대사가 아니다. '선덕여왕'에서 웃음을 책임지고 있는 죽방(이문식)과 고도(류담)가 나누는 대화 중 하나다. 덕만(이요원)이 미실에게 접근하기 위해 용화향도들까지 속인 것에 대해 마치 죽방이 그것이 위장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고도 역할의 류담이 하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아휴 지겨워. 맨날 말을 말래." 이것은 '개그콘서트' 달인의 패러디다. 달인 김병만이 늘 하는 말, "안 해봤으면 말을 말라"는 그 말을 '선덕여왕'의 죽방고도가 나누는 웃음의 코드로 끌어들인 것이다.

'선덕여왕'의 죽방고도 콤비만 떼놓고 보면 진짜 '개그콘서트'의 달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죽방이라는 캐릭터는 늘 "자기는 다 알고 있었다"거나,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는 '선덕여왕'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류담이 맡은 역할이다. '개그콘서트'에서 류담은 달인의 머리를 툭 치며 "나가!"하고 면박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선덕여왕'에서 류담은 거꾸로 죽방에게 늘 얻어맞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죽방고도 콤비는 긴장감 넘치는 사극 속에 늘 존재하는 감초 역할이다. 어리숙한 도둑이라는 캐릭터는 사극 이외에도 드라마 속에 늘 빛나는 감초 역할을 해왔다. 누군가의 물건을 훔쳤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어리숙함은 늘 드라마에 웃음과 함께 극의 긴장감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 캐릭터다. 죽방고도가 훔쳐온 연적 에피소드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연적으로 해구신을 산 그들로 인해 향도들은 일제히 신체검사(?)를 받게 되는데, 이것은 주인공 덕만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반면 그 해구신을 숨기기 위해 고도의 입에 그걸 밀어 넣으면서도 아까운 듯 다 먹지는 말라는 죽방은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 도둑이란 캐릭터는 더 큰 도둑(이를테면 나라를 훔친) 앞에서는 용인되기 마련. 그것도 그 큰 도둑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문식은 이미 정평이 난 감초연기의 달인이다. 그의 감초연기가 여타의 배우들과 다른 점은 그 웃음 속에 서민적인 눈물까지도 묻어난다는 점이다. '일지매'에서 생니까지 뽑아가며 연기투혼을 한 이문식은 뜨거운 부정을 보여줌으로써 웃음은 물론이고 감동까지도 선사했다. '선덕여왕'에서 이문식은 좀 더 웃음의 코드에 접근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덕만이 기댈 수도 있는 형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문식의 감초 연기야 이미 정평이 났지만, 류담의 연기는 재발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그콘서트' 달인에서 그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중심에 선 김병만의 개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그가 맡은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덕여왕'에서의 그의 감초 연기는 보통 개그맨들이 드라마로 진출할 때 넘기가 좀체 어려운 까메오 역할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류담이 연기하는 고도는 그만큼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녹아있다는 말이다.

그간 보지 못했던 그의 다양한 표정 연기는 이문식과 콤비를 이루면서 더욱 빛이 난다. 억울한 얼굴과 놀라서 동그랗게 뜬 눈, 가끔씩 보이는 바보 같은 웃음은 '달인'에서는 보지 못했던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을 류담에게서 발견하게 한다. 거구의 몸 역시 '달인'에서는 주목되지 못했지만, '선덕여왕'에서는 이문식과 대비되면서 이른바 훌쭉이와 뚱뚱이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사극처럼 진지하고 긴장감이 넘치는 드라마 속에서 자칫 감초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은 간과되기 쉽다. 하지만 감초는 그저 드라마에 부가되는 웃음이라는 양념만은 아니다. 논리적인 접근보다는 감성적인 접근이 필요한 부분에서 감초라는 캐릭터는 사건을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하는 자체로 극을 움직이는 하나의 틀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의 달인, 죽방고도가 돋보이는 것은 이 두 가지 역할, 즉 웃음을 주는 역할과 극을 움직이는 역할을 모두 잘 소화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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