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이라는 시공간은 기막힌 구석이 있다. 먼저 시간적으로는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구한말이다. 이것은 장르적으로는 사극의 시간이다. 여기에 '제중원'은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라는 공간을 세웠다. 장르적으로는 의학드라마의 공간이다. 즉 '제중원'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간을 제중원이라는 근대문명이 들어오는 공간 속으로 포획함으로써, 장르적으로는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하이브리드를 가능하게 만들어낸다.
이것은 두 차원의 볼거리를 하나로 결합해낸다. 조선이라는 시기에 처음으로 우뚝 세워지는 근대적인 병원공간인 제중원은 그 자체로 신기한 볼거리이면서, 동시에 사극이라는 장르적 공간 속으로 현대적인 의미의 의학이 침투해 들어가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안에는 갓 쓰고 가마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는 조선의 양반들과, 기와집 안에서 스테이크를 구우며 브랜디를 마시는 양인들이 공존한다. 또한 그 곳에는 사극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라고 할 수 있는 계급적으로 나뉘어진 공간이 있는 동시에, 중인이든 환쟁이든 모두 의생으로 불리는 제중원이라는 공간도 존재한다.
의학 사극 '제중원'은 500년 전통으로 견고하게 유지되어온 조선의 체계와 공간이 허물어져 내리고, 그 혼란 위에서 새로운 시스템이 세워지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시공간 위에 서 있는 소근개 황정(박용우)은 그 변화를 몸소 보여주는 캐릭터다. 백정 소근개가 황정으로 재탄생되는 과정은 과거 계급사회의 껍질을 깨고 나와 미래를 향해 힘겹지만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근대적 인간의 탄생이다.
소근개에서 황정으로의 이행
따라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소근개(개의 새끼라는 뜻이다)라고 태생적으로 백정의 운명으로 한계 지워져 태어난 인물이, 그 한계를 벗어던지고 저 스스로 선택한 황정이라는 이름으로 서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으로서의 의학이다. 마마를 귀신으로 생각하고 부적을 붙이거나 굿을 하고, 마마로 죽은 아이를 귀신이 노한다며 매장하지 않고 나무에 매놓는 풍습은 중세적 사고방식으로서 비합리적이다. '제중원'이 우두백신을 만들어 예방접종을 하는 것은 근대적 사고방식, 즉 과학적 사고방식을 조선사회에 접종하는 것과 같다. 어느 정도 생채기가 남겠지만 그것은 결국 합리적인 근대적 이성을 형성해낼 것이다.
재미있는 건 소근개가 황정이 되는 과정에 이 과학이라는 기술이 개입한다는 점이다. 소를 잡는 일을 하는 백정이라며 한 인간을 개 취급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런데 그 백정이 하는 일을 합리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상당부분 쓸모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 사람 몸에 칼을 대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던 시대에 소 잡는 백정은 이미 동물 해부 실험을 생활 속에서 해온 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백정이 천시되는 이유는 바로 그 육신에 칼을 댄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은 서양의학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시각과도 일치한다. 제중원 의생들은 필요하면 아기를 받아내야 한다는 말에도 천하다며 펄쩍 뛰는 위인들이다.
즉 조선인들에게 백정과 서양의학은 그 거부감에 있어서 동일하다. 다만 다른 것은 백정은 소에 칼을 댄다는 것이고 서양의학은 사람에 칼을 댄다는 것이며, 백정은 소를 죽이지만 서양의학은 사람을 살린다는 점이다. 소근개는 그 칼을 댄다는 그 천대받는 기술을 갖고 서양의학 속으로 들어가, 그 용도를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바꿈으로써 자신을 황정이라는 근대적 인간으로 구원해낸다. 소 잡는 백정이 사람 살리는 의사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제중원'의 구한말이라는 독특한 시공간 속에서나 가능해지는 이야기다.
'제중원' 의생들을 통한 다양한 근대적 인물의 조명
황정은 따라서 '제중원'이 다루려는 이야기의 가장 중심 모티브와 골격을 잡고 있는 캐릭터다. 그리고 이 근대적 인간으로 성장해나가려는 황정 주변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배치되면서 이야기는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도양(연정훈)은 황정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근대적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즉 사대부 양반가의 자제에서 제중원 의생이 되는 것. 그는 엄격한 사대부가의 관습을 깨고, 실용적이지 못한 성균관 교육을 박차고 나온다. 양반의 습속이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래도 의학이라는 하나의 뜻 아래서는 고개를 숙인다. 석란(한혜진)은 이미 서양문화에 익숙하고, 영어에 능통할 정도로 개화되어 있는 인물이지만 여성이라는 성 차별과 그 성에 따라 요구되는 행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즉 그녀 역시 황정이나 도양처럼 이 구한말이라는 시간이 부여한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인물이 자신을 넘어서 근대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 이들이 엮어내는 멜로의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계급적으로 보면 도양이 양반으로 맨 위에 서고, 석란이 중인으로 중간에 서며 황정이 백정으로 맨 아래에 서는데, 멜로는 계급과는 정반대의 흐름으로 엮여있다. 즉 백정인 황정을 중인인 석란이 흠모하게 되고, 그런 석란을 도양이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 멜로가 황정과 석란으로 이어지고 그것을 만일 도양이 인정해준다면 그 각각의 선택은 이들이 근대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한계 하나씩을 넘어서는 것이 된다. 즉 백정인 황정은 자기 비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중인인 석란은 늘 선택받는 여자라는 입장에서 선택하는 능동적인 인물로 바뀌며, 양반인 도양은 스스로 벗어버리지 못하는 양반이라는 계급의식을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황정이 갖고 있는 이야기 골격과 목표의식은 이처럼 도양과 석란으로까지 확장되고, 그것은 또 제중원 의생들로까지 퍼져나간다. 황정과 같은 방에서 기거하는 고장근(송영규)은 화원으로 천대받지만 황정처럼 그 특유의 기술을 의학을 하는데 활용한다. 생생한 해부도를 그려내는 것이다. 미령(김태희)은 관기로 천대받으며 살아오지만 제중원에 들어와 차츰 간호사로서의 꿈을 펼친다. 미령의 몸종으로 있던 낭랑(신지수)은 거꾸로 선 아기를 제왕절개로 출산시켜 산모와 아기 모두를 살리는 것을 도우면서 간호사의 꿈을 갖는다. 동생을 낳다가 죽게 된 엄마로 인해 간호사의 꿈을 키우는 낭랑의 이야기는,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해 죽게된 어머니로 인해 황정이 의사가 되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제중원의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근대적 인간이 되어가는 황정의 또 다른 버전들로 그려진다. '제중원'이 황정을 위시하여 그 주변 인물들의 집단적인 성장드라마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개화를 향해 달려간다.
'제중원', 사극으로서의 한계 의드로서의 한계
'제중원'은 이처럼 매력적인 시공간 위에 매력적인 인간을 세워놓는데 성공한다. 저마다 성장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그들은 이 구한말이라는 과도기적 시간 속으로 들어가 제중원이라는 공간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극이 갖추어야 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로 잘 설정된 드라마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구한말의 제중원이라는 시공간을 붙여놓음으로서 사극과 의학드라마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한 점은 가치를 인정받아야할 덕목이지만, '제중원'은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한다. 성공적인 봉합술로 만들어진 '제중원'이라는 생명체는 살아있기는 하지만 아름답지는 않아 보인다.
'제중원'은 사극이 갖는 계급적인 문제를 드라마의 힘으로 잘 살려내지 못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제중원이라는 공간 때문에 생겨난다. 이 사극에서 알렌 원장이라는 서구적 의식에 의해 경영되는 제중원이란 공간은 계급이 지워지는 공간이다. 그 안에는 천시 받던 백정도 화원도 양반가 자제와 똑같이 의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물론 그렇다 해도 신분적인 차별은 여전하지만, 황정은 그 백정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있다. 그가 의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도양의 아버지를 수술 중 죽게 했다는 윤제욱의 누명 때문이지 신분적 차별 때문이 아니다. 황정이 신분을 숨긴 채, 제중원이라는 안전지대에 머무는 한, 이 사극이자 황정이라는 인물이 넘어서야 하는 그 계급이라는 한계는 첨예화될 수 없다.
'제중원'은 또한 의학드라마의 결과를 알 수 없는 그 수술대 위의 긴박감을 드라마 속으로 끌고 오지 못했다. 의학드라마가 극적인 것은 그 수술대 위의 생명이 과연 수술을 통해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주목할 때다. 하지만 구한말의 제중원에서 벌어지는 수술과 처방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긴장감을 만들 수 없을 만큼 상식적이다. 여기서 긴장감을 위해 필요한 것은 보편적인 의학적 정황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을 갖고 온 인물들의 특별한 이야기이다. 죽어나가는 민초들을 위해 백신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흐뭇한 일이고, 구한말에 어떻게 그런 것을 만들었을까 살피는 것은 분명 볼거리지만 그것이 드라마를 극적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드라마 '제중원'은 이 제중원이라는 매력적인 시공간에 붙박여 있음으로 해서 사극이 갖는 장점인 계급이 유발하는 힘과, 의학드라마가 갖는 긴박감을 살려내지 못했다. '제중원'은 황정의 어눌한 목소리처럼 극적인 상황에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긴장감을 높여주지 못하고 있다. 설정은 완벽하지만 과정은 그렇지 못하다. 과정이 효과적이지 못하고 설정만 반복될 때, 드라마는 예정된 길로만 걸어가는 단조로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역사책을 통해서 마마를 어떻게 우두백신으로 예방했는지 잘 알고 있으며, 죽어가는 환자를 어떻게 수술했고, 거꾸로 선 아기를 어떻게 제왕절개로 안전하게 출산시켰는지 다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매력적인 설정을 가진 '제중원'이 고민해야 할 것은 이 드라마가 갖는 현재적인 의미일 것이다. 사극은 단지 과거의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거기서 발견할 때 의미를 갖는다. '근대적 인간의 탄생'은 학문적으로는 의미 있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무엇을 보여줄까를 고민하기 보다는 왜 보여주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 '제중원'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중원'이 갖는 사극으로서의 한계(계급적인 문제는 현대재 의미를 획득할 때 힘을 얻을 수 있다)와 의학드라마로서의 한계(초기 의학 도입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가질 때 긴박감을 확보할 수 있다)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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